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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만 가능한 발레, 세계에 보여줄래요”

‘전설적인 안무가 ○○이 유럽 유명 △△발레단을 위해 안무한 작품. 세계적 작곡가 ◇◇의 음악을 사용한다’.  
 

국립발레단 신작 '허난설헌-수월경화'
안무 맡은 현역무용수 강효형

발레 공연이 있을 때마다 으레 따라붙는 홍보 문구다. 50여년 역사를 가진 한국 발레는 창작의 영역이 아니었다. 주요발레단들은 외국 고전을 카피하고 해외 트렌드를 쫓아가기 바빴다. 몇 안 되는 창작 작품도 외국 안무가·작곡가 중심의 서양식 발레였다.
 
그런데 아주 새로운 발레를 만나게 됐다. 국립발레단의 ‘허난설헌-수월경화’(5월 5~7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는 20대 현역 발레리나가 국악을 베이스로 한국적 움직임을 추구한 창조적인 무대다.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안무가 부문에 올해의 후보로 오른 솔리스트 강효형(29)이 비운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시와 삶을 춤 속에 오버랩시켰다. 국립발레단의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KNB 무브먼트’를 통해 2015년 선보인 10여 분짜리 소품 ‘요동치다’로 호평받았고, 지난해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넥스트 제너레이션’ 무대에도 올랐던 그가 전막 발레 안무에 도전하는 것이다. 모던하면서도 한국적인 색깔 찾기가 무용계의 화두가 된 지금, 100% 우리 힘으로 창작된 ‘한국적 발레’는 뭐가 다를까. 24일 국립발레단 연습실을 찾았다.  
 

 
“감정선을 더 살려야 해요. 표정에 신경 좀 써주세요.” “시인의 고뇌가 더 섬세하게 표현돼야 할 것 같아요.”
 
무용수들에게 던지는 안무가 강효형의 주문은 정중하고도 단호했다. 국립발레단의 최근작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요정·쥬얼스·친구 등 멀티 플레이어로 뛰다 순식간에 무려 36명의 선후배 무용수를 이끄는 입장이 됐지만, 주눅든 기색없이 자신감이 넘쳤다. “저도 놀랬어요. 선배들이 예상보다 훨씬 마음을 열어 주셔서요. 사람간의 스트레스가 있다면 안무가 죽었을 텐데, 그런 것 전혀 없이 아주 즐겁고 행복하게 하고 있어요.”  
 
국립발레단의 현역무용수가 정기공연의 안무를 맡은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세계적인 안무가들의 산실인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출신으로서 부임 당초부터 안무가 육성에 뜻을 품고 있던 강수진 단장에게 그가 “안무가가 꿈”이라며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됐다. 안무에 뜻 있는 무용수들이 꽤 있다는 것을 파악한 강 단장은 곧바로 KNB 무브먼트를 추진했고, 강효형의 ‘요동치다’에 크게 만족해 전막 안무까지 그에게 의뢰했다.  
 
“재작년 TV 춤 오디션 프로그램 ‘댄싱 9’ 출연 허락을 받으러 갔다가 단장님과 안무에 대한 얘기를 나눴어요. 우리 무용수들은 이미 세계적 반열에 올라 각자의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발레단의 이름을 알리려면 발레단만의 레퍼토리가 중요하거든요. 단장님이 안무가 육성의 밑그림을 그리고 계시던 차에 제가 운 좋게 첫 번째 사례가 됐어요. 모쪼록 잘 되서 다른 무용수들도 기회를 얻고, 안무로 해외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강 단장이 제시한 조건은 심플했다. ‘스토리가 있고 한국적이되 발레의 테크닉이 보여야 한다’는 것. 이 조건에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이 허난설헌의 시였고, 그녀의 삶 자체를 스토리라인으로 엮을 수 있는 ‘감우(感遇)’와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두 편을 시놉시스로 삼았다.  
 
“그녀의 시와 코드가 통했달까요. 색감과 어휘가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와닿았어요. ‘감우’는 난초를, ‘몽유광상산’은 부용꽃을 그리고 있는데, 난초가 시들어가는 것을 보고 옷소매가 젖도록 운다거나 부용꽃 27송이가 진다는 표현 자체가 시인의 처지를 말하고 있거든요. 추상적인 시상을 넘어 감정 표현을 위해 화자로 허난설헌을 등장시켜요. 두 시를 엮어 ‘파릇파릇하다-시든다-진다’는 과정을 그녀 인생의 흐름으로 연결시킨 거죠.”
 
시대를 잘 못만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쓸쓸히 요절한 허난설헌의 비극적 삶 자체가 스토리라인이 되긴 하지만 구체적인 드라마는 없다. 추상적 이미지 속에 감정선이 드러날 뿐이다.  
 
“이미지 자체가 이야기가 되는 걸 좋아해요. 인물간의 스토리는 마임이 필요하고 직접 설명을 해야 하는데 그건 제 성향이 아니거든요. 앙상블이 만드는 그림 자체가 스토리가 되고, 흐름에 감정선이 살아나도록 만들고 있어요. 무용수들도 연기나 드라마 없이 오직 춤과 몸으로 시의 구절들을 다 표현해야 하니 어려운 작업이죠.”
 
허난설헌의 시상과 인생을 오버랩시켜
박슬기, 신승원이 시인을 맡고 이재우, 김기완 등 남자무용수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남녀 주인공 개념은 아니다. 앙상블과 군무가 중심으로, 허난설헌은 두 시를 엮는 화자일 뿐이며 남자들은 구체적인 캐릭터가 아닌 형이상학적 존재들이다.  
 
“여자는 난초, 부용꽃 같은 구체적인 사물이고 남자는 주로 바람이 되요. 예컨대 부용꽃이 가을에 떨어질 때 남자들이 리프트로 바람에 흩날리는 형상을 표현하는 거죠. 마지막에 시인과 춤추는 이재우도 사람이 아니라 그녀의 이상의 집합체랄까. 천재성을 발휘할 수 없던 시대에 이상의 벽에 부딪쳐서 떨어져 나가는 비극이 그대로 미장센이 되는 거죠.”
 
시의 이미지에 맞는 기성 음악을 찾는 작업은 새로 곡을 쓰는 것보다 더 공이 들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침향무’ ‘하마단’을 비롯해 김준영의 거문고, 한진·심영섭의 가야금 등 총 12곡을 선정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들었다. 각각의 개성적인 음악이 10개 장면에 고루 뒤섞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이 이어지도록 엮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황 선생님의 음악은 자연을, 난해한 거문고 음악은 복잡한 꿈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 골랐어요. 시인이 자기가 쓴 시 속으로 들어가는 오프닝 군무에는 거문고가 강렬하게 쓰이는데, 검은 옷 입은 여자들이 굵은 붓글씨가 됐다가 하늘거리는 난초로 오버랩되면서 입체적인 수묵화를 보듯 만든 거죠. 한진과 심영섭의 곡들은 감정선을 위한 건데, 처절한 마음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기에 좋아요.”  
 
텍스트가 여성스러운 한시지만 춤사위는 결코 하늘하늘하지 않다. 타악 기반의 파워풀한 군무로 어필했던 ‘요동치다’와는 다르지만, 붓획이 강렬하게 그어지는 이미지를 통해 ‘외유내강’의 에너지를 담았다. “한시를 저만의 언어로 필터링하는 작업인데, 모던하고 힘이 있어 놀라실 거예요. ‘요동치다’가 대나무처럼 강했다면 이번엔 휘어지지만 절대 부러지지 않는 갈대 같은 에너지를 보여드리려구요.”
 
데뷔작 ‘요동치다’부터 국악 베이스를 고수해온 건 글로벌 차원의 차별화를 위해서다. 지난해 슈투트가르트 무대에서도 세계 안무 트렌드를 체험하면서 차별화의 방향성을 새삼 되새겼다. “세계로 나가려면 ‘왜 내 작품을 봐야 하는가’ 답이 나와야 하니까요. 이안·장이머우 영화의 동양적이면서도 모던한 비주얼에 서양인도 흥미를 느끼듯 저도 그런 걸 찾으려 해요. 한국인들에게는 알면서도 찾지 않던 국악을 새로운 방식으로 던져주는 일이죠. 허난설헌을 택한 것도 그래서예요. 신사임당과 동시대인이지만 몰락한 가문이라 빛을 못봤는데, 지금이라도 재평가 받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복을 입고 국악 반주에 맞춰 춤을 추지만 네오클래식에 기반해 모던을 가미한 안무에는 발레만의 매력이 살아있다. 바로 ‘섬세하고 명료한 라인’이다. “발레의 매력은 잘 다듬어진 조각상을 보는 듯한 라인에 있죠. 아라베스크 동작 하나에도 섬세한 라인을 위해 굉장한 연마가 필요하거든요. 잘 다듬어진 조각의 형체에 감동하듯, 발레에는 규율과 체계가 있기에 그런 감동을 줄 수 있어요. 같은 동작을 현대 무용가들이 하면 느낌이 달라져요. 라인이 다르니까요.”  
 
“발레는 주역보다 앙상블의 힘이 더 막강한 장르”
그가 추구하는 ‘한국적 발레’의 차별점은 뭘까. 바로 한국인만이 가능한 깊은 호흡이다. “발레는 잡아끄는 풀업 상태를 유지하고 내려놓는 게 없는데, 저는 들숨날숨을 제일 강조하죠. 서양인은 그 느낌을 못내거든요. 호흡이 춤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는 게 제 철학이라,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호흡을 끄집어내는 중이에요. ‘요동치다’도 한국적 춤사위는 없지만 호흡 때문에 한국적이라는 얘길 듣는데, 선 자체는 발레지만 움직이게 만드는 호흡과 플로우가 한국적일 수 있다고 믿어요. 발레라인만으로 한국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게 제 역할이죠.”  
 
데뷔작으로 후보에 오른 브누아 드 라 당스에 수상 기대는 안 한다지만 “20년 넘게 춤을 춘 전문가 입장에서 ‘요동치다’는 만족스런 작품”이라고 당차게 말한다. “10분 안에 버라이어티한 군무 연결로 기승전결을 치밀하게 담았고, 음악과 조명의 시너지도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데뷔작으로 주목받았으니 더 연구하고 훈련해야죠. 예술가는 동시대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흐름을 읽는 센스가 있어야 해요.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걸 보여주는 건 실패죠. 뻔한 틀 안에서도 새로운 조합을 보여주는 게 우리 세대 역할인 것 같아요.”  
 
무용수로서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아쉬움은 없다.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하는 무용수가 되고 싶을 뿐이다. “어릴 때는 ‘프린시펄’의 꿈을 꿨지만 발레단 와서 깨달은 건 주역보다 앙상블, 솔리스트의 힘이 더 막강하다는 거예요. 제 작품만 해도 군무가 주인공의 비중을 넘어서죠. 밖에서 볼 땐 주역 혼자 많은 박수를 받지만 안에서는 진주알처럼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걸 잘 소화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관객분들이 그것까지 인지해주시면 좋겠어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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