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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2000㎞ 행군한 유대인의 생존 투쟁

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리모 레비 지음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쓴 장·단편
나치의 폭력과 광기 생동감 넘쳐
꿈꾸고 번민하는 가여운 인물 묘사
인간정신의 깊이·너비·한계 보여줘

이현경 옮김, 돌베개
539쪽, 1만7000원
 
릴리트
프리모 레비 지음
한리나 옮김, 돌베개
347쪽, 1만3000원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1919∼87)는 단순한 고발자, 성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증언록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그는 독일인들의 새로운 죄를 찾거나 널리 알려진 잔학상에 뭔가 덧붙이기 위해 책을 쓴 게 아니라고 했다.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치 독일의 절멸 캠프가, 이방인을 일단 적으로 간주하는, 어쩌면 보편적인 인간 의식이, 엄밀한 그러나 삐뚤어진 사유 과정을 거쳐 도달하게 된 논리적 귀결이라고 했다. 우리 안의 야만성을 섬뜩하게 고발한 셈이다.
 
올해는 그가 자살이라는 뜻밖의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에 맞춰 나란히 출간된 두 책은 고발자 레비가 아닌 소설가 레비의 빼어난 문학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물증’들이다.
 
두 책은 레비가 쓴 소설책이라는 점을 빼면 사뭇 다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묵직한 장편, 『릴리트』는 짧은 이야기 30여 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인간 정신의 깊이와 너비, 한계와 범위의 측량기사였던 작가의 손길이 공통적으로 느껴지지만 『릴리트』에서 레비는 한껏 자유로운 모습이다. SF를 연상시키는 작품(‘고요한 별’)도 있을 정도로 소재, 글쓰기 방식에서 거침이 없다.
 
증언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프리모 레비. 인간성에 대한 끈질긴 성찰을 보여줬다. [사진 돌베개]

증언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프리모 레비. 인간성에 대한 끈질긴 성찰을 보여줬다. [사진 돌베개]

그에 비해 『지금이…』는 훨씬 레비다운 작품이다. 인간성에 대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고자 했던 레비 말이다. 2차 대전 막바지, 생존을 위해 18개월 간 2000㎞를 행군하며 싸워야 했던 동유럽 유대인들의 투쟁 과정을 영화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지만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의 인간학 연구결과였던 것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은 단순한 생존 기계,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꿈꾸고 욕망하며 흔들리고 번민하는 가여운 인간들이다. 오늘은 적의 총탄에 쫓겨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내일은 이성 유격대원에 대한 욕망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캐묻는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레비는 현미경처럼 차가운 관찰의 시선을 놓치는 법이 없다. 레비 자신의 의심하는 시선을 체현한 인물인 소설의 주인공 멘델, 뼛속까지 투사이자 자유 연애주의자인 페미니스트 여성 라인, 거침 없고 활달해 희랍인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유격대 대장 게달레까지 인물들이 하나같이 개성적이고 생동감 넘친다. 아슈케나지(동유럽 유대인)들은 돌아갈 고향이 없다. 태어나 자란 곳이 고향이겠으나 정신적, 물리적으로 뿌리 뽑힌 존재들이다. 러시아 정규군에서 이탈한 멘델 등은 심지어 왜 싸워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생존 희망과 자유를 찾아, 혹은 싸움의 의미를 찾아 이들이 지나는 러시아·폴란드·독일 등지의 사지(死地)는 거대한 디스토피아 세상을 연상시킨다.
 
소설 뒷부분 이런 대목이 있다. “피를 피로 갚아서는 안 돼. 피는 정의로 갚아야지 (…) 독일인들이 가스로 죽였다고 우리도 독일인들을 모두 가스로 죽여야 하는 건가?” 멘델의 발언이다. 이런 폭력과 광기로부터 인류의 21세기는 과연 자유로운가. 여전히 설득력 있는 레비의 소설은 묻는다. 요즘 세상의 유대인들은 누구냐고.
 
[S BOX] 소설 속 여자 조종사 이외는 모두 가상 인물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이번이 첫 출간이 아니다. 2010년 같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는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이탈리아어 원문을 직접 번역했다. 번역자 이현경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과거 영어판 번역본이 “기본 줄거리와 등장인물만 같은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고 주장했다. 윤문 수준을 뛰어넘어 원작을 훼손하는 정도였다는 얘기다. 이번 번역본 뒤에 붙인 ‘작가의 말’에는 번역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단서들이 나온다. 레비는 밀라노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소설의 모델이 된 유대인 유격대원들을 만났던 친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고, 소설 속 여자 조종사 폴리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2010년 판은 책 표지에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이라고 소개했다. 레비의 말대로라면 자전적 작품도 아닌 셈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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