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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지분제한 풀자 삼성물산 등이 인수 나서

[중앙은행 오디세이] 재벌은행 불러온 56년 은행 민영화
김유택 제2대 한국은행 총재. 경성상업고등학교(훗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와 규슈(九州) 제국대학법문학부를 졸업해 금융과 법률에 해박했다. 행정가적 기질이 뛰어나 초기 한국은행 조직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네 번에 걸쳐 경제부처 장관을 지냈다. [사진 한국은행]

김유택 제2대 한국은행 총재. 경성상업고등학교(훗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와 규슈(九州) 제국대학법문학부를 졸업해 금융과 법률에 해박했다. 행정가적 기질이 뛰어나 초기 한국은행 조직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네 번에 걸쳐 경제부처 장관을 지냈다. [사진 한국은행]

천일야화 또는 아라비안나이트는 오늘날 인도·이란·이라크·시리아·이집트 지역의 고대 설화들을 한데 모은 상상력의 저수지다. 서양의 많은 작가들이 거기서 영감을 얻거나 이야기들을 빌렸다. 볼테르의 철학소설 『자디그』(1747년)에 실린 ‘세렌딥의 세 왕자’가 그런 경우다. 세렌딥(오늘날 스리랑카)의 세 왕자가 지혜를 찾아 모험하다가 보물을 갖고 돌아온다는 줄거리다.
 

54년 이후 민영화 여섯 차례 실패
산업자본 참여 허용 후 경쟁 가열
이병철·정재호 등 시중은행 인수
5·16 후 부정축재 재산으로 환수

거기서 나온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뜻밖의 횡재 또는 우연한 발견을 뜻한다. 뢴트겐의 X선이나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이 세렌디피티에 속한다.  
 
세렌디피티는 금융의 세계에도 많다. 남북전쟁 도중에 링컨 대통령이 도입한 지급준비제도라든가, 대공황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도입한 예금보험제도가 그 예다. 절체절명의 경제난을 탈출하려고 엉겁결에 만든 지급준비제도와 예금보험제도는 오늘날 필수적인 금융제도로 손꼽힌다.  
 
은산분리(銀産分離)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한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를 법률로 엄격히 제한한다. 1956년 제정된 미국의 은행지주회사법이 그 시작인데, 이 법은 법률소송 중에 탄생한 세렌디피티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지주회사인 트랜스아메리카는 은행·보험사·영화사·부동산투자회사는 물론 렌터카회사와 여행사까지 소유했다. 그러자 연준(Fed)이 제동을 걸고 너저분한 주식들을 처분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정을 내린 마리너 에클스 의장은 유타주 최고의 재벌이라서 그 역시 부동산투자사와 은행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트랜스아메리카는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음모”라며 에클스의 긴 재산목록을 폭로했다(2002년 동계올림픽이 치러진 솔트레이크시티 스타디움도 에클스 가문 소유다). 그리고 불복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민망스럽게 계속되자 의회가 나섰다. 은행을 소유하려면 다른 사업을 포기하라는 내용의 은행지주회사법을 만든 것이다. 결국 트랜스아메리카와 에클스는 각기 은행 주식을 정리했고, 그 법은 우리나라에 전해져 금융지주회사법(2000년)의 뼈대가 되었다. 미국의 은행지주회사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대공황 때 만들어진 글라스·스티걸법(1933년)에 따라 은행이 문어발식 영업확장을 하는 것만 규제했다. 한국의 은행법도 마찬가지였다.
 
김유택 총재, 장기영의 한국일보 설립 지원
1 1952년 2월 작성된 정부-한국은행 간 대출계약서. 이 계약서는 아직도 유효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의 선진국에서는 이런 대출계약이 법으로 금지된다. [사진 한국은행]

1 1952년 2월 작성된 정부-한국은행 간 대출계약서. 이 계약서는 아직도 유효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의 선진국에서는 이런 대출계약이 법으로 금지된다. [사진 한국은행]

한국의 은행법은 한국은행법과 같은 날 탄생한 이란성 쌍둥이다. 그런데 한국은행법은 1950년 5월 25일부터 시행된 반면, 은행법은 재무부가 시행시기를 정하도록 되어 있었다(부칙 제28조). 은행들이 워낙 영세하고 부실했기 때문이다.  
 
금융조합(훗날 농협중앙회)과 조흥·저축·상업·상공·신탁 등 5개 일반은행은 대출의 25%가 연체 상태였고, 자기자본비율은 평균 0.001%에 불과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은행법 시행이 미뤄지면서 은행들은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은행령에 따라 운영되고, 한국은행법에 따라 감독을 받았다.
 
한국은행의 김유택 총재는 그런 어정쩡함을 싫어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한 탓에 법적 근거를 잘 따졌다.  
 
예를 들어 총재 취임 직후 한은법을 기초한 미국의 블룸필드 박사에게 질문서를 보내서 미심쩍은 조항들의 입법취지를 확인했다(1952년 2월). 자신의 임기를 두고 직원들이 입방아를 찧자 재무부를 통해 한은 총재 임기에 관한 법무부의 공식 입장을 받아 내기도 했다(3월, 지난 호 참조). 엉성하게 취급되어 왔던 대정부 대출업무를 정확히 처리하고 이자를 제대로 받아내기 위해서 재무장관과 대출계약을 맺었다(1953년 2월). 그 계약서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정부의 요구에 따라 장기영 부총재를 사퇴시킬 때도 규정을 짚었다. 사퇴를 거부하는 장기영을 석 달간 설득해 사표를 받아내면서도 섭섭지 않은 특별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재무부와 심계원(오늘날의 감사원)의 동의를 받고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1952년 5월 29일)을 거쳤다. 훗날 법적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2 은행민영화를 위한 제7차 경쟁입찰을 앞두고 정부의 정책변경을 알리는 기사(1956년 3월 16일). 1인당 입찰한도를 폐지하고 주식매입대금의 분할납입을 허용해서 재벌의 은행 장악을 사실상 방조했다.

2 은행민영화를 위한 제7차 경쟁입찰을 앞두고 정부의 정책변경을 알리는 기사(1956년 3월 16일). 1인당 입찰한도를 폐지하고 주식매입대금의 분할납입을 허용해서 재벌의 은행 장악을 사실상 방조했다.

장기영이 그 돈으로 한국일보를 설립(1954년)하자 김유택은 윤전기 1대까지 제공했다. 『조사통계월보』 발행을 위해 조사부가 갖고 있던 것이었는데, 물론 보낼 때는 내부규정을 꼼꼼히 살폈다. 창업 이후 동분서주하던 장기영은 그 윤전기를 받고 김유택에 대한 서운함을 깨끗이 잊었다.
 
이처럼 김유택은 냉정히 법을 따지면서도 남을 세심히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향 선배이자 직장 상사이기도 했던 백두진 재무장관에게는 은행법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전쟁 중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장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박희현 재무장관이 취임하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재무차관(김유택)과 회계국장으로서 전쟁 초기의 ‘사변수습 비상경비예산’을 함께 꾸려나간 명콤비였다(2016년 11월 6일자 참조). 박희현은 은행법 시행에 동의했다.
 
60년 지난 지금도 엄격한 은산분리 이어져
은행법은 공포된 지 4년이 지난 1954년 8월 15일 시행되었다. 다음 수순은 은행 민영화와 증자였다. 당시 일반은행 지분의 절반 이상은 정부와 한국은행이 소유했는데, 그러다 보니 은행들은 정치권과 행정부에 휘둘리면서 한국은행 대출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소위 ‘금융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은행 민영화를 요구했다. 그런데 1954년 10월 ‘은행 귀속주 불하요강’을 발표한 뒤 2년에 걸쳐 진행된 여섯 차례의 경쟁입찰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부자들은 1인당 입찰한도와 주식의 양도제한 조건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고, 서민들은 증자할 돈이 없었다. 결국 정부는 입찰한도와 양도제한 조건을 모두 철폐했다.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1956년 3월의 7차 입찰은 전례 없는 경쟁률 속에서 낙찰가가 정부가 내정한 금액의 4배까지 치솟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금동원력과 경영능력을 이유로 재무부가 느닷없이 일부 우선협상자를 교체했다. 새로 선정된 대한방직의 설경동은 자유당 재정부장 출신이었다. 언론은 설경동이 자격미달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법무부는 재무부의 변덕에 이의를 제기했다. 궁지에 몰린 대통령은 재무장관을 두 차례나 교체했다.
 
우여곡절 끝에 흥업은행(상공·신탁의 합병은행, 훗날 한일은행)은 삼성물산의 이병철, 조흥은행은 조선맥주의 민덕기, 상업은행은 합동증권의 진영득, 저축은행(오늘날 SC제일은행)은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돌아갔다. 이병철은 민덕기와 진영득의 전주(錢主)라서 사실상 3개 은행을 지배한다고 알려졌다. 그는 인수받은 직후부터 은행 경영에는 깊숙이 개입했지만, 막상 현금이 부족해서 정부가 특별히 허용한 주식대금 분할납입 시한을 자주 어겼다.
 
정재호는 대통령 비서관 박찬일의 매형이었다. 박찬일은 비서관 중 유일하게 대통령을 독대하며 각종 인사와 정책에 개입해서 ‘문고리 실세’로 통했다. 정재호는 그런 박찬일을 앞세워 자기가 인수한 은행에서 거액 대출을 받아 은행 인수대금을 납입했다(온갖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박찬일은 4·19혁명 직후 유일하게 미꾸라지처럼 처벌을 피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시민들은 ‘금융 민주화’가 가져온 그런 결과에 기가 찼다. 그래서 4년 뒤 ‘혁명’을 앞세운 군부가 ‘부정축재 재산 환수’라는 이름으로 은행 대주주들의 재산을 빼앗자 반색을 했다. 은행 국유화를 정의의 회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0년 전 공산주의와 전쟁을 치른 나라에서 벌어진 아이러니였다.
 
돌이켜보건대, 1954년 10월 ‘은행 귀속주 불하요강’에서 재무부가 밝혔던 1인당 입찰한도가 잘 지켜졌다면, 한국의 은행 민영화는 미국의 은행지주회사법에 앞선 은산분리의 출발점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경유착 속에 그 한도가 사라지면서 은행 민영화는 소수 재벌들만의 세렌디피티로 끝났다.  
 
그로 인한 후폭풍은 컸다. 정부의 은행소유를 규탄했던 ‘금융 민주화’는 재벌의 은행소유를 혐오하는 ‘경제 민주화’로 대체됐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인들은 은산분리를 말할 때 유난히 강퍅한 태도로 삼성을 떠올린다. 거기에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책임도 있었다. 7차 입찰을 앞두고 “소수의 재벌이 은행을 지배해도 괜찮겠느냐”고 정부가 묻자 “걱정 말고 민영화를 서두르라”며 부추긴 때문이다(1956년 11월 22일). 김유택도 그때 동의했다.  
 
한편, 정부와 은행법 시행을 협의할 때 김유택은 나라 밖으로도 눈을 돌렸다. 그리고 더 큰 일을 계획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가입이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hyeonjin.cha@bok.or.kr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3년째 한국은행에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숫자없는 경제학』『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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