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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만 보는 그대 뒤돌아보라, 자기 성찰의 거울 있다

[CRITICISM] 지금, 왜 황순원 문학인가
양평에 살고 있는 민정기 화백이 그린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소나기마을 상상도.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던 풍광 그대로다.

양평에 살고 있는 민정기 화백이 그린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소나기마을 상상도.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던 풍광 그대로다.

불후의 명작 『실락원』을 쓴 존 밀턴(1608~ 1674)은 “험난한 시대를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았다”는 언표를 남겼다. 어느 시대인들 험난하지 않을까마는, 오늘날과 같이 나라의 명운을 건 큰 사건들이 임립(林立)한 시기에 있어 밀턴의 소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상 전례를 보기 드문 국정 농단 사태와 거리로 나선 보수·진보 진영간 갈등을 거쳐 이제 대선을 보름 남짓 남겨 놓고 있다. 이 불꽃 튀는 접전의 선두에 선 대선 후보들과 조력자들은 미상불 눈앞의 목표가 화급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대의를 망각하기 쉽다.타산지석이 될 교훈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이 겪는 내면적 고통 응시
치유의 방향성 탐색하는
인본주의적 태도에 바탕 둬

그의 작품에 넘쳐 나는
부끄러움 알고 고뇌하는 인물은
후안무치와 말 바꾸기를
대범하고 힘 있는 지도력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큰 교훈

양평에 조성된 황순원문학촌
마음의 짐 내리고 동심 찾는 곳

 
 
한국문학에 순수와 절제의 극 이뤄
여기에 유용한 자기성찰의 거울이자 자기측정의 저울로, 작가 황순원(1915~2000)과 그의 작품들을 떠올려 본다. 20세기 격동기의 한국문학에 순수와 절제의 극을 이룬 이 작가는 일제강점이 시작된 암흑기 초입, 평남 대동군에서 출생했다. 열여섯의 청춘에 시를 쓰기 시작해서 80대의 노령에 이르도록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의 문학적 유산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시종일관 인간이 겪어야 하는 내면적 고통을 응시하며, 이의 극복과 치유의 방향성을 탐색하는 인본주의적 태도에 바탕을 둔다.
 
황순원의 문학은 시에서 출발하여 단편소설로 그 세계를 확대하고 다시 장편소설로 영역을 확장한 뒤 말기엔 함축적인 단편과 시의 자리로 돌아오는 완결성의 미학을 보인다. 이 보기 드문 과정은 서구문학의 괴테가 그러했듯이 일생을 두고 지속적 시간과 함께 창작을 한 작가에게서 목도할 수 있는 현상이다.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며 먼 길을 내다보는 눈이 허약한 우리 시대의 지도층 인사들이 반드시 학습해야 할 덕목에 해당한다. 문학평론가 천이두는 황순원의 이와 같은 면모에 ‘노년의 문학’이란 명호를 붙이고, 단순히 노년기의 작가가 생산한 문학이 아니라 노년에 이르도록 작품 활동을 한 작가에게서 볼 수 있는 원숙한 분위기의 문학이라고 설명했다.
 
황순원은 일제 말기에 읽히지도 출간되지도 않는 작품들을 은밀하게 쓰면서 모국어를 지켰다. 이 소설들은 광복 후 『기러기』라는 표제를 달아 상재되었다. 모두가 압제적 권력에 밀려 숨죽이거나 훼절을 일삼을 때, 한 작가의 외로운 창작실은 그 혼자만의 불을 밝히고 있었으니 이것이 나라사랑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 기실 황순원의 부친 황찬영은 3·1운동 때 평양에서 교사로 있었으며 평양 시내 태극기 배포 책임자로 투옥되었고 나중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우리가 오늘의 대선주자들에게 정파적 정권적 욕망을 버리고 민족적 국가적 차원에서 생각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작가의 염결한 정신주의가 우리 곁에 살아 있는 까닭에서다.
 
 
험난한 시대에 깨어있는 정신의 힘
황순원

황순원

황순원이 살았던 격동의 시기는 그 작품세계와 더불어 세 개의 고비로 분할해 볼 수 있다. 먼저 일제강점기다. 문필에 뜻을 둔 청년의 꿈은 컸으나 그것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협소했다. 열다섯 살이 되던 1929년, 정주의 오산중학에 입학한 황순원은 건강 때문에 평양의 숭실중학으로 옮기기까지 한 학기를 거기서 보냈다. 이때 만난 교장 선생이 남강 이승훈 선생이다. 아직 연소한 시절의 작가에게, ‘남자라는 것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로구나’라는 느낌을 얻게 한 분이다.
 
황순원의 단편 「아버지」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부친에게서 다시 ‘늙을수록 아름다운 남자’를 발견한다. 황순원 자신도 결국 이 부류의 남자였다. 이러한 내면적 각성의 힘, 인간의 삶에 있어서 꼭 지켜야할 것과 버려야할 것을 구분하는 도덕적 근본주의의 힘은 『늪』이나 『기러기』 같은 초기소설의 주정적(主情的)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에게는 이 두 권의 소설집 보다 앞서 『방가』와 『골동품』이라는 두 권의 시집이 있다. 시대적인 삶, 그리고 개인적인 삶의 양자에 걸쳐 황순원의 초기 작품에는 ‘부끄러움’을 알고 고뇌하는 인물들이 넘친다. 후안무치한 행동과 식언(飾言)의 번복을 마치 대범하고 힘 있는 지도력의 면모인 양 착각하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값있는 ‘거울’들이다.
 
두 번째는 민족상잔의 6·25동란이다. 전쟁이 나자 황씨 지주집안은 그동안의 핍박을 뒤로 하고 솔가하여 월남한다. 황순원은 그 포화의 여진 속에서, 또 부산 피난 시절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작가의 수발한 단편 「목넘이마을의 개」는 전쟁 중에서도 환경조건을 넘어서는 강인한 생명력을 그렸고,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그 엄혹한 기간을 살아낸 젊은이들의 삶을 형상화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모색했다. 전쟁 중에 이데올로기의 주박(呪縛)을 어린 시절 우정으로 넘어서는 「학」이나, 전쟁 말기에 한 시골 소년과 소녀의 순정한 첫사랑 이야기를 쓴 「소나기」는 어떻게 전쟁의 상황을 초극할 것인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 작품들이다.
 
세 번째로 황순원이 감당한 시대는 실상 앞의 두 경우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구조적인 성격을 가졌다. 곧 전후 복구의 시기를 거쳐 새롭게 열린 산업화의 자본 형성과 물신주의의 시대를 말한다.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작가에게는 전면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 길고 힘겨운 창작 기간에 그는 훨씬 부피가 큰 장편소설로 대응했다. 『일월』이나  『움직이는 성』과 같은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이나 한국인의 근원 심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 『신들의 주사위』처럼 한 지역사회를 통한 다양한 삶의 양상에 대한 실증적 탐구 등이 그 증빙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저변을 반사하는 ‘거울’이자 그 실상을 계측하는 ‘저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황순원의 후기 단편과 시는 삶을 마감하는 노년의 눈으로 죽음의 문제에 대한 웅숭깊은 접근을 보인다. 단편집 『탈』에 수록된  「소리 그림자」「마지막 잔」「나무와 돌, 그리고」 같은 작품은 이 대목에 있어서 한국 소설의 수준을 한 차원 높게 이끄는 성취를 거양한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두고 추구하는 가치 있는 삶에의 꿈이 있다. 황순원은 언제나 본질적인 것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지향한 문학적 태도를 견지했고, 그의 작품 속 화자들은 죽음을 대면하고서도 전혀 요동하지 않았다. 그 자신 또한 그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의 소설은 일생을 건 구도(求道)의 도정이었고, 우리는 그로부터 인생론의 진수를 배웠다.
 
 
그의 소설은 일생을 건 구도의 도정
격동의 사건들로 편만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의 문학에서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국가 지도자에서부터 저잣거리의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고 문학을 접하고 교양을 쌓아야 할 이유 한가운데 작가 황순원과 그의 문학을 향한 꿈이 잠복해 있는 것이다. 1931년의 처녀 시 「나의 꿈」은 어쩌면 이 머나먼 행로를 내다보면서 한 소년이 그 가슴이 지핀 예감의 불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침 이 작가를 기리고 그 문학적 가르침을 지키며 이를 우리의 현실적인 삶 속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경기도 양평의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란 이름의 테마파크로 조성되어 있다. 인본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지향하며 한국문학에 순수성과 완결성의 범례를 보인, 그 삶에 있어서는 금도(襟度)와 절제를 실천한 작가와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소나기마을이 양평에 자리한 것은 단편 「소나기」 중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는 구절에서 비롯됐다. 작가가 23년 6개월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경희대와 양평군이 함께 손잡고 국내 최대의 문학공원을 조성했다. 3층으로 지어진 문학관과 1만4000평 야산의 문학 산책로로 구성된 이 마을을 한 바퀴 돌면, 황순원의 작품 속을 일주하고 나온 듯한 후감이 남는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 어리고 젊은 시절의 꿈과 추억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옛날의 동심으로, 순후한 초심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이 마을의 소박한 권면이다.
 
소나기마을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유료 입장객이 찾아오는 문학관이다. 성수기에는 하루 2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앞으로 알퐁스 도데의 「별」, 생 떽쥐베리의 『어린왕자』,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포함한 ‘소년·첫사랑 테마파크’로 제2의 건립을 추진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작가 황순원과 그 작품세계 그리고 작가를 기리는 소나기마을 덕분에 잠시나마 상쾌한 행복을 누린 아침이다.
 
 

김종회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나온 이래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해 오고 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한국비평문학회 회장이다.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디아스포라를 넘어서』『문학의 거울과 저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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