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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와 글자 사이, 당당한 충만감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외벽 문양과 글자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외벽 문양과 글자

인도 무굴 제국 시대의 쿠란 필사본

인도 무굴 제국 시대의 쿠란 필사본

물고기들은 고체 상태의 물이다.
새들은 고체 상태의 바람이다.

유지원의 글자 풍경 :
아랍 문자의 기하학적 우주

책들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옛날에 대하여』 중 한 구절이다. 생명과 물질들의 고체화한 형상에서 유체적 흐름을 통찰하는 상상력에 감탄한다. 키냐르가 여기서 ‘침묵’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다시 쓰고 싶어지곤 한다. “책들은 고체 상태의 숨이다.”  
 
깊고 무한한 시간의 심연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 북아프리카에 바짝 다가선 지중해 연안 도시 말라가의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말라가의 공기 속에는 매캐하고 향긋한 후추향 같은 것이 은은하게 났다. 유럽 출장 중 경로를 상당히 벗어나는 무리를 무릅쓰면서 그곳을 향한 이유는 이웃 도시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Alhambra) 궁전을 보고 싶어서였다. 이슬람 건축과 기하학 문양, 글자들을 그 건축적 실재 속에서, 그곳의 대기와 태양과 풍토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찬란한 알람브라 궁전. 이곳의 마지막 이슬람 술탄이었던 보아브딜은 가톨릭 왕 부부의 공세 속에서 아프리카로 추방됐다. 보아브딜의 서글픈 운명을 간직한 궁전은 섬세한 아름다움 속에서 어딘지 처연했다. 타레가의 기타곡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의 애잔한 선율이 달빛에 떨리는 듯 들려올 것만 같았다. 가톨릭 세력에 의해 몰락했음에도 다행히 이 ‘이교도’의 궁전은 잘 보전되어 있었다.
 
이슬람 문양의 정교함에 숨 죽이던 첫 순간을 기억한다. 독일의 한 악기박물관에서였다. 페르시아 악기인 타르가 박물관의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상아와 놋쇠로 나무에 상감한 값진 장식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큰 문양 속에 작은 문양이 바닥 모를 심연으로 깊어져갔다. 그 안에는 장인의 밀도 높은 시간과 삶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었다. 그 대가는 무명으로 남았다. 명예와 부에 눈을 뜨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토록 열정적이면서도 고요하게 집중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무시무시한 밀도였다.
 
이슬람 문양과 글자 공간의 기하학  
글자들을 조합하고 배열하는 방식은 문자권마다 다르다. 한글과 로마자도 공간을 인식하는 틀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대체로 수직과 수평, 그리고 사각형 격자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90°와 그 배수가 아닌 각도로 공간을 구획한다면, 글자 배열은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까?    
 
이런 궁금증에서 나의 관심은 결정학(crystallography)과 고체물리학으로 이어졌다. 고체물리학에서는 원자들이 상호작용해서 기하학적 패턴의 결정을 형성하며, 물질의 특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낱글자들이 상호작용해서 문자문화권마다 다른 결합방식으로 패턴을 형성하며, 텍스트와 의미를 드러내는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피터 루와 폴 슈타인하르트가 기리 타일링으로 쿠란의 패턴을 재구성한 모습. 다섯 가지 도형의 기리 타일들과 각각의 도형이 가진 내각 크기의 종류. 모두 36°의 배수이다.

피터 루와 폴 슈타인하르트가 기리 타일링으로 쿠란의 패턴을 재구성한 모습. 다섯 가지 도형의 기리 타일들과 각각의 도형이 가진 내각 크기의 종류. 모두 36°의 배수이다.

2007년, 권위있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재미있는 논문이 실렸다. 물리학자인 피터 루와 폴 슈타인하르트 박사가 13세기의 이슬람 타일링 양식 속 기하학을 10회 회전 대칭과 준결정 구조로 설명한 논문이었다. 알람브라는 아니었고 주로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간직한 도시들의 건축 속 패턴이었다. 그들은 자와 콤퍼스로 제도하기보다는 다섯 가지로 유형화한 도형들의 타일을 이어맞춰 평면 공간을 가득 채우는 테설레이션을 제안했다. 이 다섯 도형에 그들은 ‘기리 타일(girih til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도형들의 모든 내각은 36°의 배수이다. 36°를 이어서 10회 돌리면 360°의 한 바퀴가 완성된다. 이것을 10회 회전 대칭이라고 한다.  
 
‘준결정(quasicrystal)’은 규칙적이고 주기적인 결정 구조에 비해, 규칙이 잡힐 듯 잘 잡히지 않는다. 뚜렷한 주기와 규칙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규칙하지만은 않다. 그러면서도 결정을 이룬다. 이렇듯 준주기성을 띄는 결정이라 해서 준결정이라 부른다. 준결정 타일링의 유명한 예는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의 타일링이다. 루와 슈타인하르트는 펜로즈의 준결정 구조를 응용해서 이슬람 타일링에 접근했다. 중세 이슬람 패턴의 기저에 흐르는 한 기하학의 원리가 현대 서구 과학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지기까지는 수백여 년이 걸린 셈이다.
 
이렇게 균형을 확보한 이슬람 기하학의 우주 속 글자 공간은 전체가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책의 테두리 구석구석과 여백, 글자의 사이사이를 메우는 꽃들, 이파리들, 식물 덩굴들은 기운찬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슬람의 신은 자신의 이 창조물들 속에 깃든다. 뿐만 아니라 아랍 문자는 글자 간 앞뒤 연결성이 강해서 서로의 육신을 직접 붙들며 이어진다. 글자의 획들 사이에는 철자와 문법과 장식을 보조하는, 더 작은 펜으로 쓴 작은 부호들도 채워진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불행한 이는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알람브라 궁전의 벽 위에 얽힌 싯구들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스페인 여행기를 쓴 작가 세스 노터봄은 “아랍어에 까막눈이라 글자를 알아볼 수도 없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반쯤은 장님이고 귀머거리였다”고 한탄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이런 까막눈으로 봐도, 서유럽의 값싼 현대 인쇄물들 속에서 고충을 겪던 아랍 문자들이 본연의 우아한 태생적 환경 속에서는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어찌나 당당해 보이던지, 안심이 될 지경이었다.
 
이슬람 도서. 글자들이 수직과 수평의 격자를 벗어난 각도로 배열되어 있다.

이슬람 도서. 글자들이 수직과 수평의 격자를 벗어난 각도로 배열되어 있다.

형상·면적 가진 사이 공간
다른 문화를 접하면 우리 문화 속 익숙한 것들을 한 줄기 바람같은 싱그러운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 한글과 로마자 글자의 검은 형상 사이 흰 공간조차도 사실은 비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다. 글자들을 연결하는 이 ‘사이 공간’은 엄연한 면적과 형상, 뚜렷한 역할을 가진다.  
 
‘영감(inspiration)’이라는 단어 속에는 ‘정신(spirit)’이 들어있다. 이 어근은 ‘바람이 불어 깃든다’라는 어원을 가진다. 생명의 호흡처럼 정신의 숨결이 깃드는 것은 즉 영감을 얻는 것이다. 아랍 문자의 장(field)에서는 말과 소리의 숨결에 꽃이 피어난다. 잡힐 듯 말듯 복잡하고 정교한 이슬람 기하학의 심연에는 아라베스크 무늬의 끊임없는 흐름이 깃들고 글자들은 유기적으로 그 흐름을 탄다. 글자들의 사이에는 무한한 신의 창조물들이 충만하게 채워진다. 문명의 정신과 영감이 여기에 숨을 뿜듯 스며든다. 하여 “책들은 고체 상태의 숨이다.” ●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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