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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R&D 딜레마에 갇힌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18일 뜬금없는 보도자료를 하나 발표했다.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ㆍ일본어ㆍ중국어 등 9개 언어 음성을 인식할 수 있는 음성인식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인공지능 기술의 한 분야인 딥러닝(deep-learning) 기술을 바탕으로, 대용량의 데이터를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ETRI는 “구글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과 비교하더라도 한국어에서는 성능 우위를 점하고 있고 다른 언어에서는 대등한 수준”이라며 “음성인식 기술의 세계시장 진출에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보도자료가 뜬금없는 이유는 ETRI의 음성인식 기술 개발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ETRI는 1980년대부터 음성인식 기술과 이를 바탕으로 한 동시통역 기술을 개발해왔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ETRI의 동시통역기 ‘지니’를 서비스하겠다고 발표한 지도 오래다.  
ETRI에 물었다.“음성인식을 넘어 동시통역 기술까지 완성됐다고 발표한 지가 언제인데 이런 자료를 냈습니까.”
ETRI 관계자는 “지적이 맞다. 하지만 이번에 독일어ㆍ러시아어ㆍ아랍어 음성인식기술까지 추가로 개발돼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보도자료가 과장된 느낌이라고 재차 묻자 안타까운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한국)도 이런 기술이 있다는 사실을 국내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기자는 6년 전인 2011년 초 ETRI의 음성인식과 동시통역 기술을 처음 취재해 기사로 썼다. 그때 우리의 기술을 자랑스러워 하던 연구원의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 ETRI 연구원은 “올해부터는 한국어-일어, 내년부터는 한국어-중국어 자동통역 기술개발도 시작할 계획”이라며 “내년 초까지 한-영 자동통역에서 5만 단어급 이상의 통역률 95%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고 말했다.“선진국의 통ㆍ번역 기술에만 의지하게 되면 우리나라 말의 자동통역에 대한 기술 및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라며 기술 개발의 의미까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다시 2017년 4월로 돌아온다. 삼성전자는 최신형 스마트폰 갤럭시 S8에는 인공지능(AI) 비서 빅스비를 탑재됐다. 사용자의 말을 알아듣고 정보를 찾아주고, 명령을 수행한다. SK텔레콤은 '누구', KT는 '지니'라는 이름의 AI 비서 서비스를 내놨다. 하지만 이 3개사의 서비스 어디에도 ETRI의 음성인식기술은 없었다. 삼성전자 빅스비의 음성인식 기술은 지난해 미국 기업 비브랩스를 인수해 확보한 것이다. SK텔레콤과 KT의 한글 음성 인식기술은 자체 개발했다.  
 
1980년대부터 30년 이상 쌓아온 ETRI의 음성인식 기술을 국내 대기업들은 왜 외면할까. ETRI의 박사들이 결코 연구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문제는 기업과 따로 노는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에 있다. 대기업이 외면하는 이유를 ETRI 박사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대기업들은 ETRI 기술을 자기 회사만 독점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 출연연의 기술은 특정 대기업에만 줄 수 없습니다.”
 
기업도 할 말이 많다.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삼성전자로서는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을 꺼릴 수밖에 없다. 경쟁사가 공개된 같은 기술로 따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KT와 SKT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체 개발 능력이 있는데 굳이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는 ETRI의 기술을 쓸 이유가 없다.  
 
한국의 국가 R&D 기획은 시작단계에서부터 수요 기업과 분리돼 있다. 정부부처가 주도해 R&D의 큰 그림을 그리고 나면, 22개 연구관리전담기관들이 교수와 연구원 등을 모아 매년 6만 개에 달하는 세부 과제를 결정한다. 여기에 대학과 출연연 등이 경쟁 응모해 과제를 따내는 게 한국국가 R&D의 모습이다. 과제 제안서 상에는 기업이 참여하긴 하지만, 말 그대로 ‘페이퍼 워크(paper-work)’에 그친다.  
이에 대해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한 연구원은 “국가 R&D에서 기술개발 부문은 처음부터 기술을 원하는 기업과 손을 잡고 시작하지 않으면 헛일이 되기 십상”이라며 “연간 19조원의 헛돈을 쓰는 국가 R&D와 정부 출연연 딜레마의 표본”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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