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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로즈힙, 장미의 큰 선택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손대기 애처롭다. 간밤 봄비가 거세었는데 내 작업실 뒷마당에 어린 장미의 몽우리들이 가지 끝에 돋았다. 새로운 계절에 거리낌 없이 피어나고 세상에 도도하게 제 모양을 뽐낼 준비를 하는 중이다. ‘메릴린 먼로 로즈’-화단에 꽂힌 푯말이 그 장미의 품종을 알려준다. 화려하게 살다가 젊은 날에 세상을 떠난 여배우의 이름이다. 그녀는 장미의 한 종류로 남아 영영 잊히지 않는 이름으로 이 뜰에서 자란다 싶다. 곧 화창한 날이면 골목골목마다, 아파트 울타리마다 장미 향으로 온 도시가 진동할 거다.
 
화가인 나에게 정치는 온통 색깔이었다.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황색 돌풍, 녹색 혁명, 청명한 파랑과 뜨거운 빨강의 대비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선 특정한 색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한때 4월 대선 가능성에 맞춰 ‘벚꽃 대선’이라는 말이 나왔다. 지금은 오로지 5월 9일의 대선 날짜를 상징하는 ‘장미 대선’이란 단어가 온 사방을 도배하고 있다. 다양한 빛깔의 장미들이 다투어 피어오르는 모습이다.
 
반 고흐, 장미와 작약, 캔버스에 유채, 1886.

반 고흐, 장미와 작약, 캔버스에 유채, 1886.

미술에서도 장미는 중요한 소재다. 해바라기의 화가로 알려진 고흐는 알고 보면 장미의 화가이기도 하다. 고흐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 프랑스의 프로방스는 장미의 고장이다. 그가 남긴 해바라기의 그림 수만큼 장미도 많이 그렸다. 그의 해바라기 그림의 열정적 붓 자국은 꿈틀대는 태양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반면에 고흐는 장미 앞에서 자신의 들끓는 개성과 기질을 누그러뜨리고 꽃이라는 대상을 더 존중하는 듯하다. 이처럼 장미는 천재의 광기마저 굴복시키는 마력의 꽃이다.
 
어느 때, 어느 지역에서든 장미들은 여자를 불러들이고 남자를 불러들인다. 나비며 벌 그리고 온갖 벌레를 모은다. 그들은 탐스러운 꽃잎을 따기 위해, 향을 좇아서, 달콤한 꿀을 얻기 위해, 그들 나름의 이해관계로 장미에게 간다. 고대 로마의 귀부인들은 화폐로 쓰기 위해 그 꽃잎을 땄고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삶 사분의 일을 장미 속에 파묻혀 보냈다고 한다.
 
장미는 정치의 꽃이기도 하다. 1908년 3월 여성 섬유노동자 1만5000명이 뉴욕에 모여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고 외쳤다. 세계 여성의 날이 시작되는 사건이다. 빵은 생존권을 그리고 장미는 참정권을 의미한다. 여기서 장미는 헌사와 대접의 상징으로 쓰였다. 장미를 받는 것은 존중과 귀하다는 인정이다. 그 노동자들은 장미를 받는 것으로 그들 스스로 세상의 일을 선택할 자격을 요구했다.
 
사람들이 장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 장미는 꽃만 있는 게 아니다. 찬바람이 불고 모여들었던 열망들이 사라진 자리에 장미는 한 알의 열매를 맺는다. 이 장미의 열매를 “로즈힙(rose hip)”이라고 한다. 장미의 가장 큰 선택은 로즈힙이다.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장미는 100여 일 이상 화려한 꽃잎들 속에 몰래 씨방을 숨기고 부풀린다. 물결치는 풍성한 치마 속에 숨겨진 엉덩이 같아서 그 이름이 로즈힙인가 보다. 장미는 화려한 날 그를 찾아왔던 열망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로즈힙에는 온갖 영양소가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인들은 로즈힙을 사랑했다. 영국의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비가 세월을 역행하는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로즈힙 오일 덕분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영국군에게 비타민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로즈힙이 지급됐다고 한다. 젊음과 건강을 위하는 소수의 사람들 말고는 장미의 로즈힙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장미의 큰 선택은 그 꽃을 보고 달려드는 많은 열망에도, 그렇다고 그 열매를 찾는 소수의 사람에게도 있지 않다. 장미의 가장 큰 선택은 끊임없이 생명을 영속시키는 열매를 맺고 그 속의 씨앗을 땅에 떨구는 일이다.
 
내 작업실 마당에서 본 먼로 로즈의 여린 꽃봉오리가 활짝 필 때 우리는 우리대로 큰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장미 대선이다. 형형색색의 장미들이 각기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무수한 기대와 열망들이 그들에게 이끌릴 것이다. 온갖 요란한 캠페인이 벌어질 것이고, 현란한 말들과 장밋빛 약속들이 우리의 신념을 부를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개척하고 밝혀 갈 제대로 된 선택에 올곧은 순리가 작용했으면 한다.
 
전수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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