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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피셔 만난 고은 “함께 도박했던 사이처럼 정답다”

미국의 선승 노먼 피셔(왼쪽)와 고은 시인이 시에 관한 선문답을 나눴다. 피셔는 고은의 『만인보』에 대해 “보통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준 보살(자비심을 가진 자)의 시”라고 평했다. [사진 김현동 기자]

미국의 선승 노먼 피셔(왼쪽)와 고은 시인이 시에 관한 선문답을 나눴다. 피셔는 고은의 『만인보』에 대해 “보통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준 보살(자비심을 가진 자)의 시”라고 평했다. [사진 김현동 기자]

지난 20일 경기도 광교산 자락 고은(84) 시인의 자택에 반가운 손님이 들었다. 노먼 피셔(71). 미국의 영향력 있는 선승이자 선시(禪詩)를 쓰는 시인이다. 시와 불교라면 시인 고은의 일.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출가해 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을 은사로 모시다 1960년대 초반 10여 년 만에 환속한 그의 사연은 유명하다. 시인은 91년 선시집 『뭐냐』(2013년 재출간)를 내기도 했다. 피셔는 시간 순으로는 반대. 한국 작가들도 자주 참가하는 아이오와 창작프로그램을 마친 후 80년 일본 조동종 계열 선불교의 계를 받아 승려가 됐다.
 

선시(禪詩) 쓰는 미국 승려와 만남
고은 “아내 퍼스트”라고 말하자
피셔 “wife의 한국어냐, 어감 좋다”
“침묵의 시어 옮기는 게 시인” 표현엔
“인간은 언어 감옥에 갇혔다” 응수

 
선(禪)과 시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숙명처럼 전제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선불교의 최고 경지가 언어를 거치지 않고 진리를 전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단계라면, 시는 언어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자주 ‘초과’한다. 언어를 넘어서는 시의 어떤 특성이 시를 읽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둘의 만남을 지켜봤다.
 
#‘만다라 카지노’에서 한 판 더
 
불교의 합장을 하며 반가워하는 미국의 선승 노먼 피셔(왼쪽)와 고은 시인. [사진 김현동 기자]

불교의 합장을 하며 반가워하는 미국의 선승 노먼 피셔(왼쪽)와 고은 시인. [사진 김현동 기자]

옥스퍼드 박사 출신 미산 스님에 따르면 미국 선불교는 한국 선불교보다 부드럽다. 단박에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몰아치지 않는다. 서구 취향에 맞춰 친절해진 불교다.
 
그런 점을 의식한 듯 시인이 “당신이 말하는 중도(中道) 개념은 어머니같이 자애롭다. 자궁 같은 중도”라고 운을 뗐다. 집안으로 들이기도 전에 마당에서 만난 채로다.
 
그러자 승려는 “한국에서 며칠 전 기자회견을 할 때 트럼프의 ‘미국이 먼저(America First)’보다 ‘인간이 먼저(Human First)’라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자 아내 캐시가 눈치를 줬다. 동물과 식물을 잊지 말라는 얘기였다. 나는 지혜로운 아내의 말을 항상 존중한다”고 응수했다.
 
“아내 퍼스트!”(시인) “‘아내’가 ‘wife’의 한국어냐. 어감이 좋다!”(승려) 여기까지가 일합.
 
시인이 “요즘 세상은 더 이상 혼자서 살 수 없는 시대다. 과거에는 누구에게 ‘의존적’이라는 말이 굴욕적인 뜻이었는데 지금은 반대다. 가장 진취적인 말이 됐다”는 말끝에 “피셔 없이 고은 없다”고 선언했다. 승려도 당연히 응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스님을 만나니 옛날에 도박을 같이 한 사이처럼 정답다. 한 판 더하자. 불교라는 카지노, 만다라 카지노 말이다”라고 말해 좌중을 흔들었다.
 
#선의 기본은 침묵
고은 시인(오른쪽)의 즉석 제안에 따라 찻잔을 술잔처럼 부딪친 미국의 선승 노먼 피셔. [사진 김현동 기자]

고은 시인(오른쪽)의 즉석 제안에 따라 찻잔을 술잔처럼 부딪친 미국의 선승 노먼 피셔. [사진 김현동 기자]

 
시인이라면 언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언어의 불명료성과의 싸움 없이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진작에 공언한 바 있다. 90년대 초반 한 문예지 대담에서다.
 
시 쓰는 승려도 마찬가지. “70년대 미국에 일었던 언어시(language poetry)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언어로 어떤 걸 표현할 수 있는지보다 어떻게 언어로 뭔가를 표현할 수 있나에 관심이 더 컸다. 언어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고 소개했다.
 
화제는 시 쓰기로 옮아갔다. 시인은 “선의 기본은 침묵”이라고 했다. “언어가 가장 희박한 곳”이어서다. 하지만 “언어가 침묵의 쓰레기가 아니듯 침묵 또한 언어의 묘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침묵 안에서 시가 피어나서다.
 
“침묵은 저절로 뭔가 표현하는 게 있다고 본다. 그게 시인 것 같다. 그럴 때 시인의 역할은 꽃가루를 열심히 실어나르는 나비처럼 침묵의 시어를 옮기는 거다.” 말하자면 시의 발생학이다.
 
승려가 받았다.
 
“언어는 인간 정신의 가장 심오한 표현이다. 인간은 언어가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이 된다는 건 언어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가에서는 인간이 오히려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가르친다. 선수행은 그래서 의미있다. 인간이 언어와 맺는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언어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제공한다. 그건 하나의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물론 선시도 나온다.
 
시인이 다시 받았다 .
 
“네안데르탈인은 언어가 없어 사라졌다.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러 언어가 생겼지만 언어는 완전무결하지 않다. 나는 60년간 시를 써왔는데도 아직 세계를 표현하는 기술을 다 가지지 못했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개가 꼬리 치며 반가워하는데 내 언어는 그 기쁨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럴 때 나는 절망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언어를 버릴 수 없다. 그런 절망에서 가끔씩 시가 나온다. ”
 
승려에게 선시 한 편을 보여달라고 했다.
 
‘Let’s talk about our structures. They do not include the absences, and only then do I look for a word. But I am excitable. I don’t know what to say. Like an amoeba.’
 
‘우리 구조물에 대해 얘기해보자. 거기에 부족함이란 없다. 오직 그럴 때 나는 단어를 찾는다. 하지만…’. 짧고 쉬운 단어들이지만 뜻을 알기 어렵다. 불교의 깨달음이 담긴 걸까. 승려는 "내 시는 선시가 아니다. 의미도 설명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시는 언어 이상이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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