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화려한 무대, 다양한 소품, 혼신의 열연 … 7시간 훌쩍 지나

지난 11일 7시간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당일 전막 공연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로 나왔다. 공연 시작 8시간 40분 뒤였다.

지난 11일 7시간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당일 전막 공연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로 나왔다. 공연 시작 8시간 40분 뒤였다.

 지난 11일 오후 1시 50분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3층 대극장 매표소 앞. 볕 좋은 봄날에도 극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500석 좌석이 진즉에 매진됐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한국 연극 최초로 시도되는 7시간 연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성대한 축제처럼 막을 올릴 줄은 몰랐다. 낯익은 얼굴도 꽤 보였다. 정치인 김한길씨, 배우 박정자ㆍ윤석화씨가 극장으로 들어갔다. 긴장한 표정도 있었다. 입구에서 인사를 건네는 나진환(50) 연출이었다.
11일 오후 1시50분쯤.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매표소 풍경. 500석 좌석이 매진됐다. 

11일 오후 1시50분쯤.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매표소 풍경. 500석 좌석이 매진됐다.

 극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옆자리에 원로배우 이순재(82)씨가 앉아 있었다. “뜻 깊은 공연이 오르는데 당연히 와야지.” 작품에서 1인4역을 맡은 52년차 배우 정동환(67)씨도 이씨에게는 한참 후배였다. 원로배우는 반듯한 자세로 연극을 끝까지 지켜봤다.

국내 최장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 ’
이순재·박정자·윤석화 등 객석에
춤·마임의 연속 … 지루할 틈 없어
“인생은 고통, 연극 관람도 마찬가지”

 연극은 예상보다 볼거리가 풍성했다. 인간의 원죄를 묻는 원작의 묵직한 주제가 다양한 소품과 화려한 무대장치로 시각화했다. 거울 안이 보이는 특수거울이 수시로 활용됐고, 7층 높이의 계단도 등장했다. 배우들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춤을 추기도 했고 마임을 하기도 했다. 무대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통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1부가 막바지 치달을 즈음 대심문관으로 분장한 정동환씨가 등장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23분 독백 장면이었다. 베테랑 배우는 오로지 혼자서만 토해내는 대사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소화했다. 조곤조곤 설명하기도 했고 극장이 울리도록 울부짖기도 했다. 이순재씨가 옆자리에서 “대사 전달이 정확한 동환이니까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귀띔했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1, 18일만 빼고 1부와 2부를 날마다 공연했고, 티켓도 따로 판매했다. 그래서 1부가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에 나와 인사를 했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1, 18일만 빼고 1부와 2부를 날마다 공연했고, 티켓도 따로 판매했다. 그래서 1부가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에 나와 인사를 했다.

 오후 5시 50분쯤 1부가 끝났다. 예정된 시각보다 20분이 늦었다. 오후 7시 2부가 시작하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야 했다. 극장을 나오는 이영열 문체부 예술정책관을 만났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6년 공연예술 창작산실 지원작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의 온상으로 지적됐던 그 사업 말이다. 이 정책관은 “정부 지원이 없으면 이런 작품은 무대에 오르기 힘들지 않겠느냐”며 “정부가 문화예술을 제대로 지원해야 할 이유를 현장에서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정책관과 함께 허겁지겁 멸치국수를 마시고 극장으로 돌아왔다.
 지난 4일 개막한 연극은 이날 전까지 1, 2부로 나뉘어 공연됐다. 1, 2부가 모두 공연되는 날은 11, 18일 이틀뿐이다. 11일 공연이 축제처럼 열렸던 까닭이다. 이날 현장에 나왔던 문화예술위 공연지원부 신우진 대리는 “11, 18일 공연부터 예약이 찼다”고 설명했다. 이순재씨도 “공연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작품만 좋으면 관객은 온다”고 말했다.
3월 11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2부 티켓.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티켓이다.

3월 11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2부 티켓.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티켓이다.

 1부에서 드미트리 역의 김태훈(50) 배우가 돋보였다면 2부에서는 이반 역의 지현준(38) 배우가 두드러졌다. 특히 배우 이기돈이 열연한 스메르쟈코프와 이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난 네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너니까”라는 스메르쟈코프의 대사처럼 스메르쟈코프와 이반은 이 장면에서 한 몸처럼 움직였다. 눈가에 시뻘건 분장을 하고 헐렁한 흰 팬티와 늘어진 양말만 걸친 스메르쟈코프는 인간 본성에 숨은 악마적 모습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오후 8시35분. 2부 휴식시간이 됐다. 15분 휴식시간 동안 3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사실 공연 시작 6시간이 지날 때부터 몸에 반응이 왔다. 장시간 비행을 한 것처럼 무릎이 저렸고 눈이 뻑뻑했다. 여느 공연보다 객석이 수선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객석에서 이따금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몰래 간식을 먹는지 비닐봉지 부스럭대는 소리도 들렸다. 스마트폰도 여러 번 울렸다. 처음에는 영 거슬렸지만, 일반 공연 서너 편 보는 시간에 한 편 보는 셈이니 따지고 보면 이 작품만 소란스러운 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 커튼콜도 끝나갈 시간. 무대 중앙 배우를 비추던 조명도 서서히 빠지고 있다. 이로써 연극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 커튼콜도 끝나갈 시간. 무대 중앙 배우를 비추던 조명도 서서히 빠지고 있다. 이로써 연극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마침내 연극이 끝났다. 오후 10시 40분쯤이었다. 휴식 세 차례(약 1시간 30분)를 포함해 8시간 40분 만에 막을 내렸다. 극장을 나오는 관객을 붙잡고 소감을 물었다. “소설로 못 읽었던 고전을 연극으로 경험했다. 배우들 열연이 눈에 띄었고 무대에 볼거리도 많았다(조미경ㆍ55).” “무대가 인상 깊었다. 특수거울을 활용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이반과 스메르쟈코프가 한 몸처럼 보였다(송명주ㆍ24) .”
 분장실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정동환씨가 반갑게 맞아줬다. 하나 정씨는 11일 전 연습실에서보다 수척한 얼굴이었다. 눈이 퀭했고 입술 두 군데가 터졌다. 그런데도 정씨는 “좋은 기회를 얻어 정말 고맙다”며 연방 고개를 숙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더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너무 피곤해 보였다.
연극이 끝난 뒤 분장실에서 만난 정동환 배우.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는데도 평화로운 미소를 내내 머금었다.

연극이 끝난 뒤 분장실에서 만난 정동환 배우.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는데도 평화로운 미소를 내내 머금었다.

 드미트리 역의 김태훈(50)과 이반 역의 지현준(38)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김태훈 배우는 “체력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중년배우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 기분 좋다”고 말했다. 지현준 배우는 저녁으로 나온 도시락도 못 먹었다고 했다. 2부에서 팬티만 입고 등장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이반을 표현하기 위해 신경정신과 의사로부터 발작 증상을 배우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스메르쟈코프 역을 인상 깊게 연기했던 이기돈 배우는 벌써 집에 갔는지 분장실에 없었다.
 52년차 정동환 배우가 출연하는 바람에 화제가 덜 되기는 했지만, 김태훈과 지현준은 대학로에서 손꼽히는 인기 배우다.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 김태훈은 연기와 연출에서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배우다.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며 활약 중인 지현준도 팬층이 탄탄하다. 막이 오르기 전 이순재씨가 공연 프로그램에서 지현준 사진을 발견하고 “얘도 나오는구나. 얘랑 ‘시련’에서 같이 작업했어. 잘하는 배우야. 지켜 봐”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연극이 끝난 뒤. 왼쪽부터 이반 역의 배우 지현준, 드미트리 역의 배우 김태훈, 정동환 배우, 나진환 연출, 이영열 문체부 예술정책관. 

연극이 끝난 뒤. 왼쪽부터 이반 역의 배우 지현준, 드미트리 역의 배우 김태훈, 정동환 배우, 나진환 연출, 이영열 문체부 예술정책관.

 나진환 연출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배우들을 너무 괴롭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칼 한 자루 쥐여 주고 전쟁터로 내몬 기분이다. 배우들이 침 맞고 파스 붙이며 연기하고 있다”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래도 관객 반응에 고무된 것은 분명했다. “9∼10시간 공연을 준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기 때문이다. 나 연출이 애초에 이 작품을 구상할 때 러닝타임이 9∼10시간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들어냈던 두어 시간을 연출은 말하고 있었다.
 분장실을 나오니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푸근했던 봄날의 오후도, 흥청거렸던 주말의 저녁도 지난 뒤였다.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잊지 못할 봄날이었다. 문득 배우 박정자(75)씨의 소감이 떠올랐다. 박씨도 작품을 끝까지 지켜봤다.
“연극에서도 나왔잖아요. 인생은 고통이라고. 연극도 재미로만 보면 안 돼요. 삶의 고통을 느껴야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연극도 고통을 참고 볼 수 있어야겠죠.”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