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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제프 니콜스의 영화에는 우직한 사랑이 산다

러빙

러빙

1950년대 미국, 흑인과 백인의 결혼이 금지된 시기에 사랑 하나로 가족을 지켜 낸 러빙 부부의 실화를 다룬 ‘러빙’(3월 1일 개봉).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가 사랑하는 미국 감독 제프 니콜스(38)의 신작이다. 그의 전작 ‘테이크 쉘터’(2011) ‘머드’(2012)에 이어 ‘러빙’ 역시 지난해 제69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돌이켜 보면 니콜스 감독의 영화엔 늘 사랑과 가족 그리고 이를 지키려는 이들이 있었다. ‘러빙’은 그가 더욱 자신만의 방식으로, 밀도 높은 이야기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펼쳐 낸 사랑 찬가다. 니콜스 감독은 묻는다. 사랑을 지키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1 사랑에 빠진 남자들, 집을 지키는 남자들 
“어때(Like it)?” 너른 밭에 선 리처드 러빙(조엘 에저튼)은 애인 밀드레드(루스 네이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살기 위해 이 땅을 샀고, 여기에 함께 살 집을 짓겠다는 고백. 무뚝뚝하지만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은 단단한 남자의 청혼이었다. 
 
건설 현장에서 미장일을 하는 리처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연방의 평화와 존엄을 위배한 결혼”이라고 한 법원의 판결 앞에서도. “당신을 영원히 지켜 주겠다”는 밀드레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리처드는 고향 버지니아를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날 인권 운동을 다룬 영화의 감독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방면에서는 더 나은 감독이 있을 테니까. 난 오직 두 사람의 존재를 전하고 싶었다.” 니콜스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러빙 부부의 평범한 삶을 세밀하게 묘사해 나간다. 
 
리처드가 일하러 가면, 밀드레드가 아이들을 돌보는 보통의 일상.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반대하는 당국은, 이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느닷없이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리처드는 자신의 무리를 지키는 야생 동물처럼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남자. 이는 ‘테이크 쉘터’의 커티스(마이클 섀넌)와 자연스레 포개진다. 폭풍우가 몰려올 것이라는 편집증적 불안에 사로잡힌 그는, 이것이 자신의 정신적 문제임을 알고 있다. 친어머니가 비슷한 증상으로 가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가정을 지키는 쪽”을 택하고, 폭풍 대피소 ‘쉘터(Shelter)’를 만드는 데 몰두한다. 
 
니콜스 감독의 출세작이 된 이 영화는 북미 개봉 당시 “미국 중산층 붕괴에 관한 불안 심리를 섬세하게 그렸다”고 호평받았다. 니콜스 감독 역시 “결혼 후 영화를 찍으며 가정을 지킬 수 있을까 불안해 하면서 쓴 대본”이라 말했다. 사랑을 지키려는 사투는 ‘머드’에서도 계속됐다. 숲에 사는 남자 머드(매튜 맥커너히)와 열네 살 소년 엘리스(타이 셰리던). 엘리스가 머드와 연인 주니퍼(리즈 위더스푼)의 재회를 돕는 건 “그 둘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비록 두 사람의 연약한 사랑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머드’는 사랑을 향한 소년의 신념이 어그러진 후, 새로운 사랑을 상상하는 과정을 담담한 화법으로 써 내려갔다.
 
 
2 강인하고 지혜로운 여자들
머드

머드

내면의 불안, 경제적 조건, 인종 차별…. 그의 영화엔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가 많다. 하지만 극 중 인물들은 그런 위협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위협으로 인한 긴장감에 숨죽이고 끝내 고뇌하는 것은 관객이다. ‘러빙’에서 가장 관객의 마음을 미어지게 하고 흔들어 놓는 장면은, 러빙 부부가 법원에서 승리하는 대목이 아니다.


“그냥 이혼해 버려”라는 흑인 친구의 농담을 들으면서도 대꾸 없이 웃어넘기는 리처드. 그런 그는 집에 돌아와 “난 당신을 지켜 줄 수 있어”라며 흐느낀다. 요란한 표현 없이 강인한 의지로 자신의 울타리를 보살피고 지키는 것. 크고 작은 상처가 쌓여도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위로받는 것. ‘테이크 쉘터’의 커티스 역시 지독한 환각을 겪었음에도 가족의 곁에 머무르려 한다. 그토록 집착했던 쉘터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정까지 내리면서.
테이크 쉘터

테이크 쉘터

니콜스 감독 영화엔 흔들리는 남편을 다잡는 강인하고 지혜로운 아내가 있다. ‘러빙’의 밀드레드는 지친 리처드를 말없이 안아 줄 뿐 아니라,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에게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결혼을 둘러싼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다. 
 
밀드레드는 감정 표현이 투박한 리처드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세상에 맞선다. ‘테이크 쉘터’의 아내 사만다(제시카 차스테인)도 마찬가지다. 점점 미쳐 가는 남편 커티스 앞에서도, 그는 결코 이성을 잃지 않는다. 니콜스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남성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여성 주인공이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이유다. 이는 니콜스 감독의 실제 삶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인터뷰 자리에서 아내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한 번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언젠가 아내가 이야기하더라. ‘당신을 사랑하지만, ‘러빙’을 만들지 않으면 너와 이혼할지도 몰라’라고. 반쯤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웃음). 아내는 영화 제작이 어려울 때마다 늘 내게 힘이 됐다.”
 
 
3 일상의 결을 살린, 절제된 연출
 
“‘러빙’은 불합리한 관습과 법 제도 때문에 고통받는 흑인-백인 부부의 삶을 그린다. 하지만 인권과 자유의 권리를 구호처럼 내세우거나 치열한 법정 장면으로 승부하지는 않는다. 니콜스 감독은 극적인 상황에서조차 그것을 투쟁과 승리의 서사로 풀지 않는다. 
 
그 대신 두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되, 최대한 절제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니콜스 감독은 이를 “실용적 접근”이라 설명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다. 대부분의 연출작에서 니콜스 감독은 일련의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두려움과 서스펜스를 차곡차곡 쌓아 나간다. 
 
불쑥 나타나 주인공의 평범한 삶을 흔드는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에 반응하는 일상적 행동들. 이를테면 ‘러빙’에서 리처드를 바라보는 경찰서장의 비난 어린 시선, 누군가가 자동차에 고의적으로 넣어 둔 벽돌을 리처드가 발견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제프 니콜스 감독

제프 니콜스 감독

‘러빙’의 간결한 연출은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니콜스 감독은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적 순간에 공들여 방점을 찍는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대사보다 행동으로 신념과 사랑을 드러내는, 그의 영화 속 인물과 꼭 닮았다. 


‘러빙’을 통해 “총격전 없이 오로지 어떤 순간을 포착해 하나의 영화를 만들게 되어 기쁘다”는 니콜스 감독. 그의 영화는 평범한 듯하지만 비범하고, 담담한 듯하지만 격정적이다. 이처럼 독특한 정서의 비결은, 아마 니콜스 감독 자신이 직접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스크린에 녹이기 때문 아닐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상의 결을 살려 세밀하고 단단하게. “처음 영화를 만들 때 이렇게 마음먹었다. 


‘최대한 돈을 많이 모아, 내가 인생에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자.’ ‘내가 사는 곳,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느낀 감정을 전부 표현해 보자.’ 지금껏 이렇게 나만의 영화 철학을 키워 나갔다.” 니콜스 감독의 말이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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