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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붕괴 #16. 전투 (2)

“흩어져서 찾아볼까요? 한 놈뿐이라면 그렇게 위험할 것 같진 않은데요?”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걸 막는 게 우선입니다. 이무생 씨와 아드님, 박금옥 씨가 중앙 정원 쪽을 지켜주세요. 김달호 씨와 윤삼식 씨는 이정자 씨와 최민우 씨를 데리고 저쪽 구획을 뒤져보시고, 오희섭 씨와 김길수 씨는 박금봉 씨와 함께 절 따라오세요. 당신들은 그냥 여기 남아 있다가 합류해요.”
 
카리스마 넘치는 야전 지휘관으로 변한 차재경의 지시에 사람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흩어졌다. 모두 흩어지고 라커실에는 우리 넷만 남았다. 어정쩡한 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서였는지 이대백이 우리들에게 농담을 건넸다.
 
“우린 완전 왕따네요. 이래서 줄을 잘서야 한다니까요.”
 
“저런 줄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다들 미친 것 같아요. 이 안에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뭔가가 있나 봅니다.”
 
이대백의 말을 역시 뼈 있는 농담으로 받아넘긴 나는 어둠에 잠긴 라커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까 김원섭이 있는 책상들의 방에 들어가기 전처럼 어둠이 이 안에 뭔가 있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러세요?”
 
눈을 동그랗게 뜬 김승리가 내 어깨너머의 어둠을 흘끔거리며 물었지만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어둠 너머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존재에게서는 아까의 김원섭처럼 혼돈밖에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합시다. 병원에서 승리 씨에게 필요했던 게 뭐였습니까?”
 
주저하던 김승리가 눈을 약간 내리깔고는 대답했다.
 
“기억이요.”
 
“기억?”
 
“네, 동의서에 서명한 날 제 통장에 무려 3천만 원이나 넣었더군요. 그리고 며칠 후에 전화가 왔어요. 기억을 제공해달라고요.”
 
“어떤 방식으로 말입니까? 여기에 왔던 겁니까?”
 
“아니요. 무너진 병원 본관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어떤 큰 강의실 같은데 데려가더니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얘기를 하라고 했어요. 그날 사고에 대해서요.”
 
“사고? 승리 씨와 박희우 씨가 함께 참가했던 철인 3종 경기 말인가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중간에 끼어든 이대백의 말에 놀란 김승리가 되물었다.
 
“아들의 죽음에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아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형사 한 명이 찾아왔었지. 무슨 다단계에 얽힌 연쇄살인을 조사하는데 내 아들의 죽음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면서 말이야. 그래서 내 아들은 다단계 같은 거랑은 아무 연관이 없다고 했더니 근래에 벌어진 몇 가지 사고들이 어떤 식으로든 세화병원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 박희우 씨 얘기도 들려줬었어요.”
 
“형사요? 혹시 송기수 경위라는 사람 아니었던가요?”
 
“맞아요. 승리 씨한테도 찾아갔었나요?”
 
“한 달 전 쯤 연락이 온 적 있었어요. 사고 관련해서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고 찾아온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만나봤습니까?”
 
“아니요. 다시 약속을 잡기로 한 후에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어요. 저도 잊어버렸고요.”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어 나가면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애썼다. 차재경이 주도하는 실험은 생각보다 더 광범위했다. 대체 어떤 걸 얻고자 이런 어마어마한 임상실험센터를 지어놓고 실험을 거듭했을까? 생각은 다시 어둠이 뱉어낸 느낌 때문에 훼방을 받았다. 누군가 있다는 느낌, 살벌한 적의보다는 나만큼이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생각을 부리처럼 쪼아서 흩어버렸다.
 
“차재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대체 왜 여기에 들어온 걸까요? 아까 얘길 들어보니까 가족들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던데요. 이런 광경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승리 씨 말대로라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것 같네. 분명 좋은 뜻은 아닐 테지만, 어?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은데?”
 
통로에서 쏟아지는 빛들 사이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봐봐, 이 엘로드가 분명 그 괴물들을 찾아낸다니까.”
 
신이 난 박금봉의 목소리가 제일 앞에서 들려왔다. 반쯤 열린 문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자 엘로드를 손에 쥔 박금봉의 뒤로 수많은 불빛들이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렸다. 눈이 부신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물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몰라? 이 엘로드로 그 괴물들을 찾아내는 중이잖아. 아까도 이걸로 화장실에 숨은 원숭이를 찾아냈다니까, 다들 이리 와봐. 이쪽이여. 이쪽!”
 
살아있는 것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틀던 엘로드는 문 쪽을 정확히 가리켰다. 박금봉의 기세에 옆으로 물러난 나는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밀려 조금 더 뒷걸음질 쳤다. 기세 좋게 라커실로 밀고 들어온 박금봉은 엘로드가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정신없이 빙빙 돌자 당황해했다.
 
“얼라? 얘가 왜 이런데?”
 
박금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엘로드는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울상을 한 박금봉이 다시 엘로드를 집어 들고 손 위에 올려보았지만, 엘로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래?”
 
“여기까지는 확실히 찾았으니까 이 안 어디엔가 있다는 뜻일 겁니다.”
 
김길수가 형광색 피가 묻어있는 창을 흔들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문을 막고 저 배양실부터 뒤져봅시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염려 탁 놓고 뒤져들 봐.”
 
문을 가로막은 이무생이 말하자 김길수를 선두로 한 사람들이 배양실 안으로 들어갔다. 돌이킬 수 없는 광기가 이성을 마비시키면서 살육이라는 괴물을 잉태시킨 모습이었다. 안이 깨끗하게 비워진 유리관들 사이를 누비며 사냥감을 찾는 그들의 눈빛에는 살인에 대한 쾌감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드리워졌다. 배양실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이들은 하나둘씩 라커실로 넘어왔다.
 
“대체 어디 숨은 거지?”
 
“배양실 안에 없으면 라커실 뿐입니다. 일단 라커들을 하나씩 뒤져보죠. 저와 삼식이가 저쪽부터 뒤지겠습니다.”
 
박금봉의 투덜거림에 대꾸한 김달호가 윤삼식과 함께 오른쪽 벽에 붙어있는 라커들의 문을 하나씩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눈빛을 주고받은 오희섭과 김길수가 왼쪽 벽에 붙은 라커들을 확인해나가자 잠잠해졌던 내 마음이 다시 부글거렸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감정의 선이 텅텅거리며 열어젖히는 라커 어딘가와 이어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라커들은 빠르게 열려 나갔고, 내가 손을 쓸 공간과 여유는 점점 줄어들었다. 박금봉의 엘로드가 다시 생명을 얻은 건 열리지 않은 라커들이 3분의 1 정도 남았을 때였다. 투덜대던 박금봉이 환성을 올리자 양쪽에서 라카를 열던 손길이 멎어버렸다.
 
“다시 움직인다. 이쪽, 이쪽이야!”
 
신중하게 머리를 틀던 엘로드는 문 쪽에 고정되었다. 그때까지 닫힌 문을 등지고 서 있던 이무생은 엘로드가 자신 쪽을 가리키자 화들짝 놀라서 옆으로 비켜섰다. 좁디좁은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온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희끄무레한 빛 아래 혓바닥처럼 늘어졌다.
 
“문밖에 있는 것 같아.”
 
박금봉의 속삭임에 반응을 보인 것은 두 덩치들이었다. 문 양쪽으로 갈라선 김달호와 윤삼식이 품속에서 팔꿈치 길이의 긴 사시미를 꺼내 들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천천히 검은색 바를 손으로 누르자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천천히 문이 열리자 문 위에 켜져 있는 방향지시등의 녹색 불빛을 뒤집어쓰고 서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하얀 곰인형을 품에 안은 채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아이의 모습에 두 덩치는 물론 다른 사람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라커실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야. 여긴 왜 왔니? 엄니 따라서 들어와 있는겨? 이리 오너라. 어서...”
 
엉거주춤 허리를 낮춘 박금옥이 양손을 펼치며 오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아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저했다.
 
“선상님, 저 아도 혹시 그 괴물은 아니겠지요?”
 
“실험에 참여한 환자들 중에는 저 또래 여자아이는 없습니다.”
 
이무생과 차재경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저 또래 실험 대상은 내 아들뿐이겠지, 라고 웅얼거렸다. 두 덩치들도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볼 무렵 여자아이의 사뿐한 발걸음이 멈췄다. 아이는 오희섭과 김길수 사이에 서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뭔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아이가 김길수에게 다가가서는 들고 있던 곰인형을 건네주었다. 아무 말 없이 곰인형을 건네는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길수는 어서 받아보라는 주변의 말에 손을 내밀어 곰인형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여자아이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메스로 김길수의 팔뚝을 그었다. 팔을 타고 피가 튀었고, 김길수의 얼굴은 아픔보다는 경악으로 가득 찼다. 여자아이는 피가 튄 곰인형을 떨어뜨리고 뒤로 물러서는 김길수를 따라가며 메스를 휘둘러댔다. 놀란 사람들이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이 라커가 세워져있는 벽까지 밀려난 김길수는 아이가 휘두른 메스에 허벅지를 베였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김길수에게 여자아이가 말했다. 
 

“자기야. 옆구리가 뻐근하네.”
 
그 말을 들은 김길수는 눈을 감은 채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여자아이가 내뱉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른 목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으악!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사랑한다며?”
 
여자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여자아이의 애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피 묻은 메스를 고쳐잡은 여자아이가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떨고 있는 김길수에게 다가갔다. 김길수의 살려달라는 외침이 어두운 라커실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김길수의 머리 위로 천천히 메스를 들어 올리던 여자아이의 눈이 번뜩이는 순간 오희섭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오희섭이 뻗은 창날은 여자아이의 등 한복판에 퍼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찔렸고, 사방으로 형광색 피가 튀었다. 숨을 삼킨 여자아이가 메스를 떨어뜨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튄 형광색 피를 작은 손등으로 닦아낸 여자아이가 뻐금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빠?”
 
“죽어! 죽어버리란 말이야!”
 
창을 쥐고 있는 팔에 바짝 힘을 준 오희섭의 절규에 여자아이의 얼굴에는 천천히 고통이 떠올랐다.
 
“오빠도 날 죽이고 싶었어? 날 사랑한다며?”
 
몸통에 꿰인 창날의 힘에 눌린 여자아이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를 악문 오희섭이 창대를 비틀자 으드득거리며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무릎을 꿇은 여자아이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고장 난 노래방 마이크에서 나오는 높은 신호음 같은 높은 고음 비명소리에 라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들고 있던 무기를 놓치고 귀를 틀어막았다. 들고 있던 창을 떨어뜨린 나 역시 두 귀를 양손으로 막아봤지만 고막을 터트릴 것 같은 고음의 비명은 막지 못했다. 갓난아기처럼 온몸을 웅크린 나는 옆으로 쓰러진 채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의식의 마지막 한 모금이 혼돈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이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붕괴 후 여덟 시간 이십 분 경과 지하 4층.


  
내가 정신을 차린 건 곁에 쓰러진 이대백의 손목시계가 뱉어내는 시끄러운 기계음 때문이었다. 한번 눌러놓고 안심하는 순간 다시 울려버리는 알람처럼 겨우 떨쳐버리고 의식이 닫혀버리려는 찰나마다 다시 울리는 기계음이 결국은 가물거리는 내 의식을 붙잡아 세웠다. 계속 반복되는 악몽을 꾼 것처럼 온몸은 땀에 젖었다. 당기는 뒷목을 잡고 겨우 몸을 일으키자 다른 사람들 역시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헤드램프의 빛들이 하나둘씩 허공에 떠오르면서 제각각의 신음소리들이 들렸다. 곁에 있는 이대백과 김승리, 김원섭이 깨어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여자아이에게 공격을 당했던 김길수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박금옥이 김길수의 허벅지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아이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통증을 털어내던 이대백이 물었다. 그의 말에 이끌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여자아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 보입니다. 그 아이도 실험체였던 걸까요?”
 
“병원장 말이 그런 여자아이는 실험 대상이 아니었다고 했잖아.”
 
“원장 말은 이제 더 이상 못 믿겠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만, 실험체를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이 그냥 무심코 넘어간 걸 보면 정말로 아닌 것 같아.”
 
시계를 슬쩍 바라본 이대백이 대답했다.
 
“그럼 실험체가 어린 여자로 변신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아까 보니까 김길수와 오희섭 모두 알고 있는 눈치던데요.
 
짧은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김승리가 끼어들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요?”
 
나는 마음속에 불쑥 끼어든 생각을 내뱉었다. 김원섭은 아이와 부인이 죽었고, 김승리와 이대백은 자신의 가족들이 이곳에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나만 결심하면 우리 넷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백은 고민하면서도 수긍하는 눈치였고, 김승리 역시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때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김원섭이 입을 열었다.
 
“안됩니다. 지금 와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왜요?”
 
“전 여길 설계하긴 했지만 시공현장은 물론 완공 후에도 한 번도 들어와 보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여길 몇 번 들어와 봤었고, 어땠냐는 물음에는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잠시 숨을 고른 김원섭이 사람들을 모으는 차재경을 흘끔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신의 뜻을 벗어나는 일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면서도 신앙을 배반하는 일에 가담한다고 괴로워했죠. 아까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발작을 일으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파헤칠 작정입니다. 그래야 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안 나오죠.”
 
김원섭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가슴팍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쪽 가슴이 아까 아이의 잔해가 담긴 복주머니가 들어있는 곳이라는 걸 눈치챘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다친 사람 없어요?”
 
차재경이 목청을 높여 소리치자 괜찮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사람들을 지켜보던 나는 아까 주먹질을 하고, 그 이후에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던 김길수와 오희섭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았다. 정체불명의 여자아이가 두 사람에게 어떤 신뢰를 심어준 것일까?
 
“아까 그 여자아이는 실험체의 염력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앞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이런 일들을 더 겪을 수도 있을 테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만 합니다.”
 
“그 실험첸가 뭔가 하는 것이 우리 송자를 해쳤으면 어쩌죠. 선상님.”
 
울상이 된 이무생의 말에 차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 이런 사고를 대비해서 지하 7층에 중앙 실험실에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대피시켜 놓으라는 지침을 내려놓았습니다.”
 
“만약에 못 들어갔으면요? 우리 송자는 몸이 너무 약해서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데요.”
 
“맞은편 구획에 통제실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생체 반응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차재경의 말에 이무생은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리고 말았다. 곁에 있던 이형주가 부축해주었다.
 
“어서 갑시다. 이 그악스러운 괴물한테서 가족들을 구해내야 허지 않겄소?”
 
사람들은 피로에 지친 얼굴로 하나씩 문을 빠져나갔다.
 
“벌써 열두 시 이십 분이야. 빨라야 내일 새벽에나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겠어.”
 
바닥에 침을 뱉은 이대백이 김원섭을 부축한 채 걸어나갔다. 뒤를 따라가던 나는 등 뒤에서 흐르는 이상한 공기의 흐름에 붙잡혔다. 홱 고개를 돌린 나는 어둠과 공백에 싸여있는 라커실을 노려보았다. 김길수와 오희섭, 김달수와 윤삼식이 열어젖힌 라커들 말고 다른 라커 하나의 문이 살짝 열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사라져버렸을까? 아니면 아직 숨어있을까? 더 이상 의문을 갖고 싶지 않아진 나는 어서 오라는 재촉을 핑계 삼아 그곳에서 떠나버렸다.
 

작가 소개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을 시작으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거쳐 길을 쓰고 있다. 소설과 교양서를 비롯해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쓴다.
장편소설 『폐쇄구역 서울』 『마의1, 2』 『쓰시마에서 온 소녀』 『김옥균을 죽여라』 『바실라』 『명탐정의 탄생』 등을 썼으며,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시리즈에 〈불의 살인〉을 비롯한 단편추리소설들을 발표했다.
역사 교양서 『연인, the lovers』 『혁명의 여신들』 『조선의 명탐정들』 『조선전쟁 생중계』 『고려전쟁 생중계』 『조선직업실록』 『조선백성실록』 등을 펴냈다.
2013년 제1회 직지소설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NEW 크리에이터 상을 받았다.
현재 한국미스터리작가모임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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