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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건곤이감<乾坤離坎>

이건용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건용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나는 태극기를 사랑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태극기에 관한 자조적인 해석도 있었다. 태극은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를 나타내며 네 개의 괘는 한반도를 탐내는 미국·소련·중국·일본의 네 강국이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 깃발도 일본 것처럼 강렬하거나 프랑스 것처럼 우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물이 위에 있고 불이 밑에 있어야 대화가 된다
태극기가 표상하는 것은 조화와 변화의 이치

태극기에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은 주역을 알고부터였다. 잘 알려져 있듯 가운데 태극은 우주의 기운이 뒤섞여 있는 혼돈을 나타내는 것이고 네 개의 괘는 하늘과 땅과 불과 물 등 삼라만상을 상징한다. 주역을 읽어보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태극기는 우주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우주의 철학을 표명하는 깃발이었다. 요약하면 변화와 조화다.
 
농부는 때를 가려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둔다. 한겨울에 밭을 갈지 않는다. 가을까지 땀 흘려 일하고 겨울에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쉰다. 그는 계절이 변함을 안다. 삼국지를 보면 제갈량은 전투에 임박해 주역을 펼쳐보곤 한다. 하늘의 기운이 지금 아군에 유리한지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를 알기 위함이다. 서죽(筮竹)이라는 산가지를 49개 펼쳐 놓고 세 번씩 두 번, 즉 여섯 번 음양을 가려 괘를 얻는다. 만일 음-양-음, 양-양-양을 얻었다면 그것은 밑에 물(?)이 있고 위에 하늘(?)이 있는 천수송(天水訟)이다. 이 점괘를 얻었다면 제갈량은 출전을 멈추고 외교적 해결을 모색할 것이다. 전투하기에 좋지 않은 괘이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던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는 주역을 보고 매료되었다. 작곡가의 뜻에 의해 만들어지는 음악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대로 흘러가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주역의 방식을 음악에 도입했다. 서죽 대신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져 음악의 차트에서 음을 골랐다. 우연음악이다. 그 첫 번째 대표작이 ‘변화의 음악(Music of Changes)’인데 그 제목은 주역의 영어 번역(Book of Changes)에서 따온 것이었다.
 
케이지는 싫어했지만 작곡가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음악도 실은 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낮은 음만 나오거나 강한 소리만 나오는 음악은 없다. 고조되었다가는 하강하고 금관악기가 나오는가 하면 현악기가 그 뒤를 잇는다. 자신의 의도를 음악에 반영하는 작곡가들도 나름 자연의 원리를 따른다. 케이지의 다른 점은 자신의 뜻을 극단적으로 유보해 우연이 지배할 몫을 크게 한 것뿐이다.
 
우주만물을 여덟 개의 요소로 나누어 파악하는 주역의 철학은 음악에도 적용된다. 『악학궤범』은 방향과 절기와 음 높이와 악기 소리가 팔괘의 어떤 부분에 해당되는지를 도표로 보여준다. 예를 들면 북쪽 방향과 동지 절기는 감괘(?)에 해당하며 음 높이로는 황종, 악기로는 북이 여기에 속한다. 실제 음악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형이상학적이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소리들이 있고 그 소리들의 조화와 그 조화의 변화가 음악을 이룬다는 원리를 정연하게 설명한다.
 
위에 언급한 천수송의 괘상은 하늘이 위에 있고 물이 밑에 있는 모습이다. 당연한 풍경이다. 그러나 주역은 다르게 말한다. “하늘은 하늘대로 위에만 있고 물은 물대로 밑으로만 흐른다. 상응과 화합이 없으니 서로 괴리하고 배반한다. 대립이 심해져서 소송과 재판이 끊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싸고 찬반이 격렬히 마주치는, 특검과 헌법재판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를 잘 그려주는 괘상이다.
 
주역은 위의 괘와 밑의 괘가 서로 상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밑으로 흐르는 물이 위에 있고 위로 치솟는 불이 밑에 있는 수화기제(水火旣濟)를 가장 이상적인 괘로 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괘에서 모든 요소는 서로 잘 상응하고 소통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완벽한 점괘에 대한 설명이다. “매우 좋다. 그러나 조심하고 조심하라. 이제 나빠질 일밖에 없다.” 이 역시 변한다는 것이다.
 
국기에 경례를 하고 태극기를 흔드는 것은 그 정신을 되새기고 드러내려 함이리라. 그렇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태극기가 표상하는 나라, 하늘과 땅이 화합하고 불과 물이 조화롭게 교차하는 나라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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