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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리포트] 몹쓸 짓 당한 아픔, 해시태그·대나무숲에 털어놨더니 …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
 

달라지는 여성운동 방법론
직장 내 성폭력, 단톡방 성희롱 등
SNS 통해 공개, 사회운동으로 확산
젠더폭력 피해자 위한 상담도 늘어
대중 관심 꺼지면 가해자들 역공
명예훼손 고소하고 보복 위협도
2차 피해 막을 제도 개선 뒤따라야

지난해 한 살인 피의자가 경찰조사에서 했다는 이 한마디는 나비효과가 됐습니다. 분노한 여성들은 “오늘도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토로했고, 여성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깨웠습니다. 논의가 더해지며 ‘여성혐오’ 논란이 일었고, 반작용으로 ‘남성혐오’를 언급한 ‘메갈리아’라는 키워드까지 이어졌습니다. ‘#○○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게시물의 분류와 검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핵심어 앞에 ‘#’ 기호를 붙인 것)를 달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쏟아진 성폭력 피해 고발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성에 대한 강요와 편견, 무의식적이고 일상화된 차별, 다양한 폭력의 피해자로서의 여성, 그리고 페미니즘. 지난해 우리 사회를 뒤흔든 주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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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들은 새롭다기보다 수면 아래 있었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그러나 논쟁을 촉발시킨 과정은 과거와 달랐습니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벽을 빼곡히 채운 포스트잇이 그랬고, 메갈리아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동하는 방식이 그랬고, 해시태그를 단 피해 고발이 그랬습니다. 이처럼 생소한 방식으로 논쟁과 행동의 최전선에 나선 것은 바로 20~30대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청춘리포트가 지난 한 해를 달군 여성 관련 이슈들을 되짚는 이유입니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기념 ‘2017 페미니스트 광장’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성평등이 민주주의 완성이다’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기념 ‘2017 페미니스트 광장’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성평등이 민주주의 완성이다’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여성이 자기 목소리 낼 수 있는 공간 생겨
 
2016년 달궜던 여성 관련 이슈

2016년 달궜던 여성 관련 이슈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사태가 불거진 지난해 10월, 많은 이를 분노케 한 또 다른 이슈가 있었다. ‘#○○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SNS를 점령한 ‘문화계 성폭력’ 논란이었다. 시인 박진성씨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글이 10월 19일 트위터에 올라온 뒤 비슷한 피해 사례를 고발하는 글이 SNS에 쏟아졌고 ‘#미술계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과 같이 분야를 막론한 ‘해시태그 고발 운동’으로 번졌다. 소설가 박범신씨, 시인 배용제씨, 큐레이터 함영준씨 등 수많은 문화예술계 유력 인사의 실명이 피해 사례와 함께 등장했다.
 
2016년 달궜던 여성 관련 이슈

2016년 달궜던 여성 관련 이슈

피해 사례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해시태그 고발 운동에 대한 기대감도 흘러나왔다. 그동안 관행이었다는 이유로, 또는 보복이나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적폐를 알리고 바로잡을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17일 ‘#문단_내_성폭력, 문학과 여성들’ 토론회를 기획한 이경언 문학비평가는 “그 전까지 자신이 당한 일이 성폭력인지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스스로 피해자였다는 걸 인지하게 됐다. 소위 ‘그들에게 세뇌됐을 때 들었던 이야기’들을 알리기 시작했고 해시태그 고발이 봇물처럼 터졌다”고 진단했다. 대학가에서도 ‘대나무 숲’(익명이 보장되는 게시판이나 SNS 계정)을 통해 학내 성폭력 사례들이 알려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여성운동이 새로운 형태로 전환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열리면서 여성운동도 달라졌다. 10~30대 젊은 여성들은 자기주장을 쉽게 펼칠 수 있고 함께 모이기도 쉬운 온라인 활동에서 강점을 보인다. 온라인에서의 경험과 축적된 역량이 오프라인으로 연결돼 ‘강남역 포스트잇’ 같은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역시 “일상에 뿌리를 둔 피해 당사자가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사회운동의 양태가 변하고 있다. 여성운동에서도 그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피해자들이 직면한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고발 대상이 된 사람들의 보복성 고소가 이어지며 졸지에 ‘명예훼손 가해자’가 돼버린 경우가 적잖다. 여론의 뭇매가 쏟아지자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문을 쓴 사람들조차 피해자를 고소하기도 했다. 강제추행 혐의로 지난달 17일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시인 김요일씨를 고소했던 A씨의 경우가 그렇다. A씨는 지난해 3월 강제추행으로 김씨를 고소했다. 이후 10월 해시태그 고발 운동이 벌어지면서 김씨는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됐고, 지난해 11월 페이스북에 피해자들의 주장을 인정한다는 취지로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A씨가 트위터에서 실명을 거론하며 악의적으로 명예를 훼손했다며 지난해 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2016년 달궜던 여성 관련 이슈

2016년 달궜던 여성 관련 이슈

 
젠더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단체 ‘섀도우핀즈’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이후 해시태그 폭로를 이유로 고소당했거나 고소 협박을 받았다며 상담을 요청해 온 사람이 50여 명에 달한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례를 책으로 엮기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진행 중인 독립출판사 ‘봄알람’의 정혜윤 마케터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분만 10여 명이며 5~6명은 실제로 고소를 당했다. 정신적 피해를 덜어줄 의료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보복성 고소뿐 아니라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의 편을 들거나 사태를 묵인하는 식의 2차 피해도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해시태그 고발을 통해 알려진 사건 외에 다른 성폭력 사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편집디자인 업체 ‘디자인 소호’는 지난해 6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를 해고했다. 이후 피해자가 해당 사실을 온라인에서 공론화하자 명예훼손·업무방해 혐의로 두 차례 고소했다가 논란을 빚었다. 디자인 소호는 지난달 2일 1차 고소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무죄가 선고된 뒤 공식 사과문을 내놨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피해 여성들의 고발이 여건 개선으로 이어지기보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사건이 묻히거나 보복이 가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이다.
 
"해시태그 폭로 후 괴롭힘 당해” 상담 잇따라
 
2016년 달궜던 여성 관련 이슈

2016년 달궜던 여성 관련 이슈

대학가에서 잇따라 벌어지는 ‘단톡방 성희롱’ 사건도 유사하다. 문제 발생 시 논란은 크지만 제대로 된 재발 방지책이 마련되진 않고 있다. 지난해 6월 고려대에서 남학생 30여 명이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에서 여학생을 대상으로 성희롱에 가까운 음담패설을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서울대·연세대·서강대 등 여러 대학의 ‘단톡방 성희롱’이 잇따라 논란이 됐다. 이후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다. 6일에도 연세대에서 남학생들의 단톡방 성희롱을 고발하는 대자보가 붙어 논란이 일었다. 학교는 진상조사를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이 고민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다. 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건이 일어나면 사회적으로 조금 환기되다가 그냥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제도는 어느 정도 개선된 반면 인식이 전환되거나 생활 속에 정착하진 못했다. 아직 구조적으로 양성평등 사회라고 할 수 없는 이유”라고 진단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도 “지난해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은 높였지만, 양성평등 사회를 위한 구체적인 여건을 형성하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홍상지·윤정민·하준호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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