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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쉼의 미덕이 살아있는 동네 만들어야죠”

서울 익선동 한옥 레스토랑 ‘열두달’ 을 기획한 ‘익선다다’의 박한아(왼쪽)ㆍ박지현 대표

서울 익선동 한옥 레스토랑 ‘열두달’ 을 기획한 ‘익선다다’의 박한아(왼쪽)ㆍ박지현 대표

서울 익선동 166번지(종로구 수표로 28길)는 수십년간 도심 한복판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한옥마을이었다. 동쪽으로 동묘, 서쪽으로 인사동, 위로는 창덕궁과 북촌에 둘러싸인 130여 채의 한옥이 주변의 재개발 바람에서 비켜선 채 호젓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1년 사이, 이 동네는 주말이면 멋지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핫한 골목으로 탈바꿈했다.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 사이사이로 한옥의 멋을 그대로 살린 카페와 레스토랑, 향수 가게, 게스트하우스, 수제 맥줏집 등이 들어서 있다.
 

익선동의 내일 만들어가는
‘익선다다’ 박한아·박지현 대표

익선동의 이런 변화를 이끈 건 두 명의 여성이다. 매장 기획·인테리어·운영 등 이것저것 다 하는 회사 ‘익선다다’를 이끄는 박한아(33)·박지현(29) 공동대표다. 이들은 2014년 익선동을 ‘발견’하고, 골목 구석의 한옥 한 채를 빌려 갤러리 카페 ‘익동다방’(현재는 ‘틈(TUEM)’으로 상호 변경)을 시작했다. 이어 ‘열두달’, ‘경양식1920’, ‘동남아’, ‘르 블란서’ 등의 레스토랑을 열고, 가맥(가게 맥주)집 ‘거북이슈퍼’, 카페이자 영화관 ‘엉클비디오타운’ 등을 연이어 기획했다. 지난달 15일 익선동을 찾았다. 이들은 종로 3가 쪽 입구에 막 문을 연 ‘낙원장 호텔’의 마무리 인테리어 작업으로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태국음식점 ‘동남아’는 한옥에서 맛보는 외국 음식을 콘셉트로 했다.

태국음식점 ‘동남아’는 한옥에서 맛보는 외국 음식을 콘셉트로 했다.

작은 한옥이 늘어선 익선동 골목

작은 한옥이 늘어선 익선동 골목

-익선동에 최근 처음 와봤다.
 
서울에 오래 살면서도 이런 동네가 있는 줄 몰랐다.
 
=
“우리도 마찬가지다. 2014년 봄 무렵에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이 골목을 발견했다. 허름한 한옥들이 모여 있는데, 딱 어릴 적 놀러 갔던 할머니네 동네 같았다. 호기심이 생겨 인근 부동산에 물어보니 2000년대 초 재개발이 확정돼 묶여 있던 동네인데 2014년 재개발 계획이 무산됐다고 하더라. 서울 한복판에 이런 정겨운 동네가 있다니, 제발 고층빌딩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현재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생기있는 골목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박한아)
 
 
“처음 이 곳을 알고 진짜 흥분했다. 한옥을 그대로 지키며 사람들이 오도록 하려면 뭔가 ‘꺼리’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00만원짜리 한옥을 고쳐 ‘익동다방’을 열었는데, 처음엔 손님이 하루 두 세 명이었다. 손님 없는 시간에 조금씩 이 동네를 공부하다보니 재밌는 사연이 많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익선동을 이렇게 변화시키면 좋겠다’는 기획안을 짜고 있더라.”(박지현)
골목 간장게장

골목 간장게장

르 블란서

르 블란서

경양식 1920

경양식 1920

식물

식물

럭키분식

럭키분식

프루스트

프루스트

이어라

이어라

낙원장 호텔

낙원장 호텔

아마츄어 작업실

아마츄어 작업실

거북이슈퍼

거북이슈퍼

그랑

그랑

열두달

열두달

 
낡은 것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라
직선거리로 불과 수십 미터 길이밖에 안되는 4개의 골목으로 이뤄진 이 동네는 조선시대부터 익동, 혹은 궁동이라 불렸다. 조선 25대 임금 철종(1831~63)이 왕이 된 후, 자신이 태어난 장소인 이 동네에 집을 지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위(神位)를 모셨다고 한다. 지금의 한옥이 들어선 것은 1920년대.‘건양사’라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건축왕’ 정세권(1888~1965)이 북촌에 이어 두 번째로 도시형 한옥 마을로 개발한 곳이 익선동이다. 한자로 익선(益善)은 점점 더 좋아진다는 의미다.
 
북촌에는 상경한 영·호남 지주들을 위한 큰 한옥집들이 들어섰지만, 익선동에는 서민들을 위한 50m²(약 15평) 안팎의 작은 한옥이 대부분이다. 1950~60년대엔 유명 정치인들이 드나드는 ‘요정거리’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도시화와 함께 차츰 집주인들이 떠나면서 방 한칸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한옥 셋방촌’ 형태로 변했다. 이 한옥들을 개조해 매장을 열기로 결심하자 새로운 숙제가 나타났다. 수십년에 걸쳐 수리를 해 이제 ‘너덜너덜해진’ 골조를 최대한 지키며 인테리어를 하는 것이었다.
 
매장 대부분이 작은 중정을 방이 둘러싼,
원래의 ‘ㅁ’자형 구조를 지키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돈을 아끼려고 인테리어를 직접 했는데, 원칙이 있었다. 한옥의 기본 보와 서까래 등을 그대로 살리고, 50년 넘게 붙어있는 타일벽 등 세월이 묻어나는 요소를 인테리어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낡지만 새롭게’를 컨셉트로 삼았다. 예를 들어 ‘열두달’은 음식 재료를 재배하거나 가공하는 업체들과 협업해 운영하는 ‘음식점+식료품점’이다. 방 하나에 테이블 하나를 넣는 식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부모님과 함께 오면 좋은 식당을 만들고 싶어 경양식집을 기획했고, ‘한옥에서 맛보는 외국음식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 태국 음식점을 열었다. 먹는 것 외에 즐길 만한 콘텐트가 필요해 만든 곳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엉클비디오타운’이다.”(박지현)
 
엄청난 프로젝트들인데, 돈이 많은가보다.
“그럴 리가. 다 월세 내며 운영하는 곳들이다. 가게의 콘셉트를 정한 후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투자를 받거나 아예 가맹점식으로 운영을 맡겼다. 2월에 문을 연 ‘낙원장 호텔’만 60명 정도에게 500만원 이상씩 소액 투자를 받아 ‘익선다다’가 직접 건물을 매입했다. 이곳은 세계적인 부티크 호텔인 ‘에이스 호텔(ACE HOTEL)’을 벤치마킹했다. 객실 안의 가구·수건·꽃 장식 등은 다 젊은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이고, 투숙객들이 맘에 들면 로비에서 물건을 직접 구입할 수 있다.”(박한아)
‘낙원장 호텔’ 옥상에서 내려다본 익선동

‘낙원장 호텔’ 옥상에서 내려다본 익선동

 
“올해 안에 한옥 라운지바, 만화방 기대하세요”
‘익선다다’를 시작하기 전, 박한아 대표는 방송국 입사에 수차례 도전하다 벤처 기업을 차려 셰어 하우스를 운영했다. 박지현 대표는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설치미술 작업을 하는 전업 작가였다. 자매로 자주 오해받는 이들은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인연을 맺었고, 익선동에서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요즘 자신들을 ‘도시공간기획자’로 소개한다. “부동산 업자도,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아니고, 우리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고민이 많았어요. 한 미국인 친구가 미국에는 ‘도시공간기획자’라는 직업이 있다고 알려주더라고요.”
 
-거리를 기획한다고 해도,
 
익선동의 모든 가게에 관여할 수는 없지 않나.
 

=“물론이다. 지금 130여 채의 한옥 중 30여 개가 상업시설로 바뀌었는데, 지금도 골목마다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익선동이 뜬다는 말을 듣고 홍대나 강남 쪽에서 옮겨온 매장들도 있다. 앞으로 2~3년 동안은 새로운 가게들이 속속 생겨날거다. 우리에게 매장 기획을 의뢰하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많은데, 우리가 요즘 하는 일은 이 곳에 가게를 여는 사람들에게 ‘오지랖’을 부리는 거다. 부동산 아저씨가 새로 누군가 가게를 연다고 이야기해 주면, 찾아가서 주인을 만나 우리의 콘셉트를 설명한다. ‘한옥의 기본 구조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주시면 좋겠어요’ 이런 식으로 디자인적인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 할 생각이다.”(박한아)
 
 
“내가 하는 가게인데 왜 너희가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익선동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남으려면 익선동만의 정체성을 끈질기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활의 냄새가 남아있는 작은 한옥, 오래된 것이 주는 포근함 등이다. 속도보다 방향을 생각하며 변화하는 동네가 되었으면 한다.”(박지현)
 
 
‘익선다다’는 아직은 먹을거리에 치우쳐 있는 익선동 상권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올해 안에 한옥 라운지바와 한옥 서점, 만화방 등을 열 계획이다. 그 작업이 끝나면 “당분간 숨을 고르며 익선동이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힘쓸 생각”이라고 했다. 벌써 익선동의 ‘젠트리피케이션’(낙후 지역에 상업 자본이 유입되면서 땅값과 임대료가 상승해 기존 상인이 다른 곳으로 쫓겨나는 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데, 젊은 상인들이 걱정 없이 장사를 할 수 있도록 공동으로 한옥을 매입하는 투자 프로그램 등도 진행 중이다. 익선동을 시작으로 서울의 오래된 골목들을 지키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이들은 “익선동 한옥이 허물어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도시 개발의 새로운 모범 사례가 되었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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