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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15

시오는 극장으로 걸어올 때부터 명확하지 않은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묘한 흥분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를테면, 범구와 극장은 하나의 덩어리 같다는 느낌. 스크린에서 헐떡거리던 남녀의 모습에 몇 번이나 범구와 자신이 이입된 것이다. 범구와 아무런 행위 없이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시오는 뛸 듯이 기뻤다. 뜨거운 모래, 해수욕장, 비릿한 바다에 수차례 적신 수영복을 입은 것처럼 속옷이 축축했다.
 
"저기…. 뒤에 나간 것 같아요. 그 스웨터."
 
"네? 어디요??
 
꿈과 상상 속에서는 이미 굉장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단어로 관심을 표현하는 게 범구에 대한 최대의 호의적인 표현이었다.
 
조금 더 늦게 간판이 떨어졌다면, 극장 주변은 핏빛이 됐을 것이다. 시오는 놀라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큰 사고가 없었다. 똘똘해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어둠 속에서 간판 속의 헐벗은 여자의 나신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본 것이 전부였다. 거리로 인파가 쏟아진 것은 사람들이 오늘 날씨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시오가 극장으로 온 이유는 어떤 욕구에 이끌렸던 걸까. 
 
범구는 10여 분 전에 극장 안의 사람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냈다. 지금은 시오와 둘뿐이다. 마음만 극장 주변을 맴돌던 시오가 몸까지 범구의 영역으로 흡수됐다. 현장을 마무리하기 위해 '내부 수리 중' 안내판을 걸러 범구는 내려갔고, 이상할 정도로 한참이 지난 후에 올라왔다.
 
"저녁 먹으러 갈까요?"
 
범구는 차분한 악필이었다. 범구가 내려가 있는 동안 시오는 범구의 매표소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범구의 손이 여러 번 닿은 스케치북에 어떤 그림이 있을까 상상도 해보았고 인원수를 체크해둔 장부의 글씨체도 눈에 담아둔다. 범구의 모든 흔적을 자신도 모르는 새 욕망의 근육에 새기고 있었다. 범구 속으로 점점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천천히 들고 있던 가방을 어깨에 메고 범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범구의 표정은 뭔가 석연치 않아 보였다. 시오가 천천히 나오자 범구는 매표소 안을 확인하고 전원 버튼을 내렸다. 그때 갑자기 극장의 모든 전원이 나가버렸고 사방이 순식간에 컴컴해져 버렸다.
 
"헉! 뭐예요?"
 
"잠시만요. 또 이러네. 건물이 오래돼서 가끔 전기가 이래요."
 
범구는 전원 버튼을 계속 껐다 켰다 만지작거렸고, 씩씩거리며 1층 상품권 매장 주인이 순식간에 뛰어 올라왔다.
 
"에이 씨팔. 영업 끝날라믄 아직 멀었잖아. 월세는 다 받아 처잡숫고 말이야! 돌겠네. 진짜."
 
"확인 좀 해볼게요. 번번이 죄송합니다."
 
범구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이야기했다. 시오는 갑자기 닥친 상황에 막막했다. 범구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아마도 누전이 빈번했던 모양이다.
 
상품권 남자는 몇 번 더 욕설을 뱉고는 밑으로 내려갔고, 범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전기를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내려가 있을래요? 아... 바람이 좀 차던데. 추워서 걱정이네요. 아니면 다음에 저녁 할까요?"
 
그대로 가버리기엔 시오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늘 같은 둘만의 기회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다릴게요. 입구가 보이니까 무섭진 않을 것 같아요."
 
"휴우. 하필 오늘 이럴 게 뭐지. 그래요. 그럼 금방 올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범구의 발소리는 사라졌다. 바깥에선 화난 듯한 차 지나는 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가 쉴 새 없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한다. 종일 이곳에 앉아 범구는 무슨 생각을 할까. 해가 지자 바람이 심하게 불고 쌀쌀했다. 어디선가 브레이크 소리가 끼익하고 들리자 여기저기서 클랙슨 소리가 불규칙한 호흡처럼 가빴다. 매표소 안은 깜깜했고 바깥과 격리된 듯했다. 바깥으로 나갈까 했지만, 창문이 없는 극장 복도는 어두웠다. 시오는 어둠에 파묻혀 범구가 앉아 있던 의자를 흔들며 끼익 끼익 소리를 듣고 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지만, 배터리엔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불이 켜져 있던 매표소를 상상하며 천천히 음악이 흘러나오던 시디플레이어를 더듬어 본다. 자주 누르는 버튼은 글씨가 반쯤 지워져 있었다.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본다. 테이블을 쓰다듬으니 눈으로 보이지 않던 손길의 흔적이 느껴졌다. 스케치북까지 손을 뻗어 사용한 페이지가 몇 장일까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누굴 그렸을까.
 
매표소 문을 열고 나가자 바람에 머리가 날렸다. 범구의 흔적 덕분에 차분해졌던 마음에 살짝 작은 칼날이 선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몰아붙이자 벽에 붙어있던 벌거벗은 여자들의 포스터가 미친 나뭇잎처럼 흔들렸고, 스산한 분위기에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범구가 올라간 곳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가볼까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쾅! 뒤에 있던 매표소 문이 닫혔다. 주위는 온통 어둡다. 겁이 나 소름이 돋았다. 계단 벽을 붙잡고 소리가 쉴 새 없이 출렁거리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바깥 소음과 빛에 몸을 옮겼더니 잠시 짧은 꿈을 꾼 것 같았다. 거리에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의 사람들이 바쁘게 걷고 있었다. 극장의 불빛은 아직도 어두웠고 감감무소식이었다. 범구가 걱정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간 주변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품권 상점과 수제화 상점, 미용실 앞을 천천히 오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항상 극장으로 바로 들어갔던 터라 자세히 바라보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법사 고장, 무속 장단, 장고….’ 저건 뭐지? 3층 유리창에 붙어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민요, 산타령’이라는 글씨는 벗겨져 자국만 남아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 상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속 장단이라는 단어가 왠지 으스스했다.

건물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 건물과 틈이 있었고 바닥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버린 깡통, 헬스클럽 찌라시, 종이컵, 먼지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틈새를 보니 뭔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저런 곳에 누가 글씨를 썼지? 쓴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글씨였다.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개년들
씹팔 아 서 돈 버는 년들 신음
소리가
바깥 에 다 들린ㄷ ㅏ
 
 
어렸을 때 봤던 낙서 생각이 나 정신이 멍해졌다.
아직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시오는 그 낙서를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혀 낙서가 있는 곳까지 끌려갔던 것과 하얀 벽에 검은색 글씨로 적혀있던 낙서, 언니의 조롱하는 듯한 얼굴, 저지르지도 않은 짓을 모함당했던 기억이 나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낙서를 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꼭 쥔 주먹의 손가락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디 있어요. 금방 온다고 했으면서.'
 
그때 극장 간판에 불이 켜졌다.
 
빨리 범구를 만나고 싶었다. 시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범구를 찾으려고 서둘러 올라갔다. 범구는 매표소에 없었다. 시오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매표소를 지나 3층으로 가려는 순간 좀 전에 보았던 정체 모를 ‘무속장단’ 이란 글자가 떠올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다시 극장이 어두워졌다. “악!” 하고 시오는 소리를 지르며 계단에 주저앉았다.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거기 있어요?”
 
시오는 범구의 발자국 소리인 것 같아 소리 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낙서를 한 사람이 아닐까. 과연 누굴까. 어릴 적 공터에 낙서한 사람이 여기까지 날 따라온 건 아닐까. 머릿속에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창문이 없었고 3층에는 아무런 불빛도 없었다. 얼굴 없는 바람의 정령이 건물 안을 휘젓는 듯했다. '구두 발자국?' 어두운 곳에서 듣는 발소리는 범구보다 훨씬 큰 사람 같았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앞에서 거대한 듯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놀랐겠어요. 손을 보고 내려오는데, 다시 전기가 나갔네요. 다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오늘은 먼저 갈래요? 입구로 바래다줄게요.”
 
시오는 너무 놀라 말을 하는 범구를 끌어안았다.
 
“잠깐만요. 아... 너무 놀라서... .”
 
시오가 누군가를 필요로 했을 때 곁에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혼자 있던 시간을 범구의 따뜻한 품이 모두 감싸 안는 듯했다. 시오는 한참을 범구에게 안겨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범구는 움직이지 않았다. 범구의 체취와 천천히 시오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미세하게 들리는 범구의 심장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 그리고 범구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했다.
 
"같이 올라갈게요. 그게 낫겠어요."
 
범구는 천천히 손을 올려 시오의 얼굴을 만졌다. 손이 얼마나 따뜻한지 차가워진 시오의 얼굴은 범구의 손길이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움직였다. 볼을 쓰다듬고 턱을 지나 다시 시오의 이마와 오뚝한 코를 부드럽게 더듬었다. 온 신경이 따뜻한 깃털처럼 느껴져 범구의 손가락에 감각이 집중됐다. 가쁜 호흡 소리가 둘의 귓가에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입술을 손가락이 스칠 때는 지난 꿈과 예민해진 표피의 감각이 뒤섞여 이상한 욕망에 휩싸였다. 범구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범구의 욕망에 순응할 것만 같았다. 범구는 손길을 멈췄다.
 
"미안해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어쩐다. 오늘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범구는 시오의 팔을 다시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계단이 보이지 않아 시오는 발을 헛디뎠다. 넘어질 뻔했지만 범구가 시오를 두 팔로 부둥켜안았다.
 
“아, 미안해요. 걷기 힘들어서.”
 
시오는 벽에 기대어 섰다. 범구와 손을 맞잡은 상태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빛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부축해줄게요. 걱정 말아요.”
 
시오 안에 있던 어린 아기가 범구에게 칭얼대는 걸 시오도 느꼈다. 범구의 손을 꼭 붙잡고 이야기했다.
 
"극장 옆에 누가 낙서를 해놨던데...“
 
"음... 낙서요?."
 
범구의 저음이 어두운 계단에 울려 퍼졌다. 범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시오는 그저 어깨를 감싼 범구의 품이 따뜻했다. 어둠마저도 평온했다.
다시 시오는 온몸을 범구에게 의존해 한 걸음씩 발을 뗐다. 범구는 매일 오르던 길이었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되는지 얼마만큼 보폭을 떼어야 다음 계단이 나오는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천천히 한 계단씩 오르다 둘은 옥상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안심해요.”
 
옥상에서 희미하게 거리의 불빛이 올라왔다.
 
"여기 자주 올라와요?"
 
시오는 갑자기 경쾌한 소녀라도 된 것처럼 신이 나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종전에 있던 일은 모두 잊은 듯 천진하게 옥상을 둘러봤다.
 
"아마 자주 올라올걸요?"
 
범구는 전선이 많이 엉켜있는 곳으로 성큼 걸어가더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곧이어 복도에 불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좀 전에는 옆 건물 불빛이 반딧불이 같았어요.”
 
“반딧불이 구애에 대해 알아요?”
 
“아, 그냥 반짝이는 게 아닌가 보네.”
 
“황혼에 사랑할 때는 오렌지빛, 짙은 밤에는 초록색이죠. 그리고 다른 종족의 수컷을 같은 종족의 암컷 불빛처럼 흉내 내 잡아먹기도 한다던데. 갑자기 그 얘기하니까 배고프네? 밥 먹으러 갈까요?”
 
범구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옥탑방이 보였다.
 
"누가 살고 있어요?"
 
"아. 아까 말했던 15초요."
 
시오는 이제야 그 뜻을 이해했다.
 
“아까 말한 낙서는 뭔가요?”
 
“아... 어릴 때 누군가 음담패설을 벽에 써놨어요. 제가 무슨 짓을 한 것처럼. 아버지가 발견하시고 많이 혼났어요. 그다음부터 남자들이 무섭고...”
 
“그런데 지금은 성인 영화관에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는 여자가 됐단 말이죠?”
 
시오 웃는다.
 
"저 지금 좀 이상하죠...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지금은 너무 신나고..."
 
범구는 그렇게 말하는 시오를 귀엽게 쳐다보았다. 둘 사이는 한 걸음만 다가서면 서로 안거나 입을 포갤 수 있는 거리였다. 범구는 벤치에 시오의 손을 끌고 가 앉았다.
 
“극장에서 빨리 사라졌던 날에도 비슷한 소리가 들렸어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쪽 본 다음부터 더 자주 꿔요. 돼지가 꿈에서 저를 괴롭혀요. 저 이상하죠?”
 
“왜 더 자주 꿀까...”
 
범구는 조금 겁에 질린 시오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시오는 범구가 계속 얼굴을 주시하자 연한 장밋빛이 되었다. 시오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여자를 안아본 지도 오래되어 한동안 시달리던 나쁜 욕망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조금 더 붉고 깊었다. 종알거리는 시오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시오는 범구의 행동을 지켜보고 싶었다. 전날 꾸었던 작고 귀여운 돼지가 다시 범구의 얼굴로 뒤바뀌는 것 같았다. 공포스럽고 거칠게 치마 속을 헤집던 꿈속의 묘한 흥분감과 범구에게 비틀리고 싶은 이상한 지배욕이 시오를 잡아당겼다.
 
범구는 손가락이 다른 날보다 더 욱신거렸다. 컴컴한 곳에서 같이 있으니 연화의 방에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함부로 욕망을 채우던 몸짓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몇 년 전에 이모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시오는 불이 다시 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주변은 이제 환했다.
 
눈을 맞추던 시오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왜요? 갑자기?"
 
"저 좀 이상해요."
 
"네? 어디요? 또 쓰러질 것 같아요?"
 
"아뇨. 저... 저 지금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시오는 이미 속옷이 흠뻑 젖은 것을 느끼며 범구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이 집에 사는 여학생
이 미래 여관에 남자
와 함께 들어갔고 추
잡한 짓을 했다
신음소리가 너무 커
바깥에서도 다 들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
보지가 벌렁거렸다
 
나도 언젠가 널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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