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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경제사]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가 이민자 배척으로 돌아서

[비주얼 경제사] 미국 이민사
한 사내가 나무판자로 만든 구조물 위를 건너오고 있다. 옆의 굵은 나무둥치에 밧줄이 묶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박한 배에서 내려 뭍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의 앞을 다섯 인물이 가로막고 있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는 손짓을 보낸다. 이들은 누구일까? 배에서 내린 사내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림 1 조지프 케플러, ‘돌아보기’, 『퍽(Puck)』, 1893년.

그림 1 조지프 케플러, ‘돌아보기’, 『퍽(Puck)』, 1893년.

 
상륙을 원하는 사내는 많은 짐을 어깨에 메고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있다. 전형적인 가난한 이민자의 모습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다섯 명의 중년 신사는 값비싼 코트에 실크햇을 쓴 말끔한 차림이다. 부유한 주민들이 가난한 이민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광경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중년 신사들의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다. 소박하다 못해 남루한 젊은이들의 형상이다. 바로 중년 신사들의 젊은 날 모습이다.
 
이들도 한때는 가난한 이민자였던 것이다. 비슷한 처지였던 자신의 과거를 잊고 새로운 이민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현상을 이 만평은 풍자하고 있다. 작가는 이 그림에 ‘돌아보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과 아버지에게 열렸던 다리를 신입자에게는 닫을 것이다’라고 설명을 달았다.
 
그림 1이 제작된 시점은 1890년대로, 미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의 행렬이 한창 길어지던 때였다. 한 해에 이민자의 수가 100만 명을 넘기도 했다. 전체 인구의 15% 가까이가 이민자였던 시절이다. 또한 이 시기는 이민자의 구성에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 때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영국·아일랜드·독일 등 유럽 북서부 출신이 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1870년대까지도 이 구(舊)이민자의 비중이 전체 이민자의 75%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1880년대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폴란드·러시아·그리스 등 유럽 남동부 출신 이민자가 급증했다. 이들 신(新)이민자의 비중은 1890년대에 51%를 차지하더니 1900년대에는 70%를 넘어섰다. 구이민자, 특히 가장 일찍 이민 와서 경제적 기반을 닦고 사회적 지위를 얻은 영국계 앵글로색슨 집단은 신이민자의 급증에 불안을 느꼈다. 자신들이 그간 쌓아온 질서와 가치가 큰 영향을 받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그림 1은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만평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국가로 출발했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일반 이민자와 함께 계약 노동자와 유배형을 받은 죄수도 유입됐고, 이민자의 출신 국가도 점차 다양화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인 이민자들은 동부 식민지 주들을 형성했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뤘고, 인디언들을 폭력적으로 쫓아내면서 서부로 확장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민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림 2 존 캐머런, ‘추루부스코 전투, 1847년 8월 20일’, 1847년.

그림 2 존 캐머런, ‘추루부스코 전투, 1847년 8월 20일’, 1847년.


멕시코로 이민 갔다 전쟁 통해 흡수
처음에는 미국인이 이민자 입장에 있었다. 멕시코의 영토였던 텍사스에는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1821년부터 멕시코 정부는 미국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거주하도록 허락했다. 미국 거주민은 꾸준히 늘어 1836년에는 2만5000 명으로 텍사스 인구의 84%나 됐다. 이들은 이 해에 멕시코와 무력 충돌하여 텍사스를 독립된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그리고는 미국의 일부로 편입되겠다고 주장했다. 1844년부터 미국은 텍사스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로 마음먹었고 마침내 1846년에 멕시코와 전쟁을 개시했다.
 
그림 2는 미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퇴각하는 멕시코 군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런 양상은 전쟁기간 내내 반복됐다. 2년 후 전쟁은 과달루페이달고조약의 체결과 새 국경선의 획정으로 마무리됐다. 패전한 멕시코는 영토의 절반을 상실하는 굴욕을 맞았다. 반대로 승전국 미국은 텍사스와 더불어 오늘날의 캘리포니아·네바다·유타·애리조나, 그리고 뉴멕시코와 콜로라도의 일부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를 얻었다. 영토 획득과 더불어 미국은 멕시코에게 1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푼돈이나 다름없는 대금 지불은 미국이 토지를 강탈한 것이 아니라 구입한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기초가 됐다.
 
미국은 점차 이민자의 관점이 아니라 이민 통제자의 관점을 갖게 됐다. 한편으로는 경제 발전에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이민에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부류의 이민자만을 받기 바랐다. 이미 건국 때부터 흑인 노예들은 시민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자유 백인’만이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인종적·신분적 장벽이 구축됐다.
 
1845년부터는 아일랜드에서 감자기근이 발생해 연평균 25만 명의 아일랜드 사람들이 미국 동부로 들어왔다. 미국 사회의 주류층인 앵글로색슨신교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들은 이들에게 거부감을 갖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인들이 가톨릭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종교적 장벽이 세워진 것이다.
 
한편 미국의 서부 지역으로는 중국인들의 입국이 뜨거운 이슈가 됐다. 1850년대를 전후해서 일자리를 찾아 입국하는 중국인 쿨리(coolie, 苦力)의 수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인들의 저임금 노동이 미국을 지탱해오던 백인 자유노동과 흑인 노예제를 잠식할 것이라는 우려가 백인 사회에 퍼졌고 이것이 증오와 경멸의 형태로 표출됐다.

그림 3 조지프 케플러, ‘동시대의 큰 공포, 문제 해결’, 1860년대.

그림 3 조지프 케플러, ‘동시대의 큰 공포, 문제 해결’, 1860년대.

150년 전엔 중국인, 이젠 멕시코인에 장벽
그림 3은 이미 1860년대에 아일랜드인과 중국인에 대해 미국인의 거부감이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윗줄 그림을 보면 동부에서 서부로 걸어 나가는 아일랜드 이민자와 서부에서 동부로 향해가는 중국 이민자들이 미국을 의인화한 엉클 샘을 양쪽에서 삼키고 있다. 미국적 가치와 제도를 이민자들이 삼켜버릴 것이라는 두려움과 반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아랫줄 그림에서 엉클 샘은 완전히 먹혀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후 중국인이 아일랜드인마저도 삼켜버림으로써 사태가 종결된다.
 
작가는 아일랜드인보다 중국인이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느꼈던 모양이다. 아직 중국인이 아일랜드인보다 훨씬 적은 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종적 편견이 작용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중국인에 대한 이런 인종적 반감은 1882년 중국인 이민금지법이 제정됨으로써 공식화됐다. 이 이민법에 따라 중국인이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기가 지극히 힘들어졌다. 결국 1882년 4만 명이던 중국인 이민자는 1885년에는 겨우 23명에 불과하게 됐다.
 
189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 유럽 남동부 출신의 신이민자는 중국인과는 매우 다른 상황을 가져왔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신교도가 아니라 가톨릭·유대교·정교회 등으로 다양했다. 비록 대다수가 백인이긴 했지만 미국의 주류층은 자신들보다 이들이 인종적·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겼다. 신이민자에게는 범죄·빈곤·질병·사회주의에 오염된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자연스럽게 신이민자의 유입을 규제하는 법률 제정이 뒤따랐다. 문자해독 능력을 테스트해 입국 여부를 결정한 1917년 이민법이 대표적이었다. 1924년 국적별로 이민자 수에 제한을 두는 이민할당법도 마찬가지 효과를 가졌다. 이렇듯 미국의 이민정책은 주류층이 ‘진짜 미국’, ‘바람직한 미국’이란 관념에 기초해 만들어낸 제도이었다. 1965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은 이민자를 더 이상 국적별로 할당하지 않는 정책을 시작했다. 이후 인종·종교·국적은 이민 허용의 기준으로서 점차 약화됐다. 그만큼 미국의 정체성은 다문화국가를 향해 나아갔다.


21세기에 미국 이민 정책은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종교적 자유를 찾아 이민 온 청교도들이 건국 기반을 닦았던 나라 미국은 이제 종교와 국적의 장벽을 쌓겠다는 대통령을 뽑아놨다. 텍사스가 멕시코 영토던 시절에 이민자로서 살았던 미국인들은 이제 멕시코와의 국경에 엄청난 장벽을 쌓겠다는 정책과 마주하고 있다. 흑인·아일랜드인·중국인·남동유럽인 이민자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강요했던 역사는 완전하게 소멸한 게 아니었나 보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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