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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시대의 연극처럼, 알파고시대 프로기사도 살아남는다

문용직의 인공지능 수읽기(하)
#1.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근처에서 어느 고수(高手)와 산책하고 있었다. 길가에 음식점이 있는데, 한 곳엔 사람이 많고 다른 한 곳엔 적었다. 왜 그럴까? 풍수에도 천재적인 그 양반. 뒤로 가봤다. 뒤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귀 기울여보니 음식점 뒤편의 물소리가 저마다 달랐다. 서로 10m도 안 되는 거리. 사람들은 안다. 무의식적으로 안다. 기운에 마음이 흔들려 편한 기운 나오는 음식점으로 걸음이 쏠린다. 물론 이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기운은 풍수의 고수가 본 단편일 뿐이다.

#2.과거 서울 관철동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들었다. “상대 상처에 다시 주먹을 날릴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승부사가 되려면.” 서봉수 명인이 그리 말했는데, 자신은 그런 점에서는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잡초류, 야전 사령관과 같은 별명이 알려주듯이 반상에서 그는 그야말로 승부사의 대명사. 그도 부족하다면?

프로들은 스스로를 일으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세돌 9단이 대국 중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매섭게 응시하는 것이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면도날’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9단은 특히나 유명했다. 한창 때의 그는 귀기(鬼氣) 서린 얼굴로 대국에 임해 누구라도 그의 얼굴을 보면 그만 기세가 꺾이곤 했다.
 
인공지능은 서늘한 바둑을 둔다
얼마 전부터 인터넷에 인공지능으로 의심되는 바둑꾼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다. 국제 대국 사이트 KGS에 등장한 ‘God Moves’도 그 하나. 어느 날 애기가가 질문했다. 지금 바둑 두 는 ‘God Moves’는 인공지능인가? 필자는 잠시 보고 그렇다고 답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기에 기준을 드렸다.

1) 5초마다 착점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정확하고도 예리하며 변화무쌍한 바둑을 인간은 둘 수 없다. 그런 엔진을 인간은 갖지 못한다. 박정환 정도면? 커제라면? 한두 판은 가능하다. 하지만 연속적으로는 불가능하다.

2) 단호하게 변화를 이끌었다. 결단이 빠르고 변화에도 자재했다. 이와 달리 우리 몸은 달리다가 순간적으로 방향을 돌리면 넘어진다. 우리네 바둑도 그런 타성이 있다.

3) 프로들은 돌 소리로 기세를 짐작한다. 형세도 알아본다. 인공지능 바둑이라고 다르지 않다. ‘God Moves’의 착점은 전반적으로 차가웠다.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이 필자의 가슴으로 들어올 때도 있었다.

이상의 세 가지 기준으로 판정했다. 그 후 ‘God Moves’는 인공지능임이 공식적으로 판명되었다. 인간이 그리 두면 수명이 줄어들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 생명의 정의 넓어진다
알파고나 ‘God Moves’의 바둑에서 나오는 기운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것이다. 화개 개울물 소리에서 번져 나오는 기운과 다를 바 없다. 보통 요가나 참선하는 분들이 몸에서 얻는 기(氣)도 그런 것인데, 사람이 얻는 기운은 차갑지 않다.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니다. 달라이 라마가 1990년대 미국을 방문한 이후 하버드대 의대와 티베트 불교 간에 이뤄진 연구가 이런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이에 대한 현대 과학의 연구는 이미 만만찮은 수준까지 왔다. 대승불교의 정점인 유식(唯識)에서 핵심 개념인 경안(輕安)과 전의(轉依)는 의식과 기와 몸의 연관성에 대한 최고 수준의 요약이었다.

인공지능 시대, 생명의 외연은 상상 이상으로 넓어지고 있다. 물리학자 호킹 박사가 벌써 90년대 이런 얘기를 했었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생명체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인공지능을 마주한 바둑, 바둑의 생명력도 시대에 맞추어 폭넓은 기초를 가질 필요가 있다.

알파고나 ‘God Moves’의 바둑은 기운이 냉정하고 서늘하다. 좋을까? 바둑을 감상하면서 애기가들이 서늘한 기운을 받는다면 그리 좋지 않을 수 있다. 몸이 서늘해지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도 그렇지 않은가. 녹음(綠陰)에 오래 머무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 푸른빛 감도는 시린 곳은 피하는 게 좋다.

프로의 바둑도 서늘하다 하겠지만 그래도 따뜻한 체온이 눅여주고 있다. 애기가들은 인공지능의 바둑 세계를 견디기 힘들어할 것이다. 인공지능의 바둑은 필자도 얼마 못 보고 방을 나와 버릴 것이다. 궁금함이 잦아들고 놀라움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사람의 바둑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이제 그동안 세상이 궁금해하던 문제에 답을 드릴 수 있다. 알파고 시대, 프로들은 직업으로 살아남는가? 살아남는다. 근거는 방금 보았다. 기운이 말해주었다.
 
바둑은 적절한 긴장감이 오고 가야 즐겁다
근거는 더 있다. 앞으로 애기가들이 인공지능 바둑을 감상할 때 맛볼 수밖에 없는 현실은 ‘보는 데 힘들다’는 것이다. 적절한 긴장감이 오고 가야 바둑이 즐겁다. 하지만 인공지능 바둑에서는 긴장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고조된다. 앞서 ‘God Moves’의 바둑에서 단호한 수법이 끊임없음을 말했다. 바로 그것이다. 감상에 힘이 들었다. 한때 프로였던 필자가 말이다. 숨 돌릴 겨를을 관전자에게 주지 않는다. 사람은 아무리 잘 두는 바둑이라도 호흡이란 게 있다. 한 차례 전투가 끝나면 잘했든 못했든 한숨 한 번 내쉰다. 인간, 몸 탓으로 승부에는 뒤지지만 온기에는 앞선다.

기보는 우칭위안(吳淸源)이 그의 사형(師兄)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 9단과 둔 바둑이다. 몸이 저리는 정교함이 백9에서 절정을 이룬다. 백1 침입 때부터 미리 봐두었던 맥점으로 알파고를 넘어서는 정교함이다.

온기는 어디에 있는가. 천재로 이름 났던 하시모토는 1924년 베이징에서 14세의 우칭위안을 시험한 이후 1928년 일본에 데려오는 데 헌신한 인물. 우칭위안에게 10번기에서 패배해 기사로서는 치욕까지 당했건만 “우칭위안을 일본에 데려온 일”을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았다. 온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적이고도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에 두고서 저 바둑을 감상할 때 온기는 살아난다. 우리에게 전해진다.

영화가 밀려 와도 연극은 살아남았듯이, 아니 더욱 인간적인 장르가 되었듯이 우리네 바둑도 그럴 것 같다. 역사로 살아남는 바둑은 또한 연극과 마찬가지로 몸으로 하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밀다’ ‘젖히다’ ‘머리를 두드리다’… 이처럼 은유적 표현이 살아 있는 바둑은, 그 생명력을 원시적인 몸의 언어에서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문용직 전 프로기사 moonro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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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