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천유런 “24세 쑨원 부인, 미국 남부 대갓집 딸 같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15>
1 1919년 쑨원의 천거로 남방의 혁명정부를 대표해 베르사유 회담에 참가한 천유런(앞줄 오른쪽 둘째) 은 이듬해에 열린 국제연맹 창설에도 중국 대표로 참석했다. 1920년 1월 제네바.

1 1919년 쑨원의 천거로 남방의 혁명정부를 대표해 베르사유 회담에 참가한 천유런(앞줄 오른쪽 둘째) 은 이듬해에 열린 국제연맹 창설에도 중국 대표로 참석했다. 1920년 1월 제네바.

 

천유런, 쑨원의 총통직 사직에 당황
시자오지의 대외관계 전담 비서 거쳐
영자신문 기자 돼 쑨원 비판하기도
“나는 쑨원 이해하는 극소수 중 하나”

혁명으로 탄생한 중화민국의 군사력은 형편없었다. 임시 대총통에 추대된 쑨원은 북양신군(北洋新軍) 설립자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상대가 못됐다.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쑨원은 외국만 떠돌던 사람이다. 통치 경험이 전혀 없다. 당장 총통 직에서 내려와라. 거부하면 국가에 엄청난 재앙만 초래할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군 통솔과 정부기관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쑨원은 “공화제를 옹호한다”는 위안스카이의 보장을 수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중국 혁명 끝났다며 일자리 찾아 나서
짐도 미처 풀지 못한 천유런은 쑨원의 총통직 사직에 당황했다. 중국 혁명도 종지부를 찍었다며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우롄더가 위안스카이 정부의 교통부장 시자오지(施肇基·시조기)를 소개했다. 코넬(Cornell)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시자오지는 천유런을 첫눈에 알아봤다. 대외관계 전담 비서로 기용했다.
 
중년에 들어선 천유런은 우롄더에게 호소했다. “내 앞날이 낙관적이지 못하다. 경력이 보잘것없고 나이도 많다. 중국의 고귀한 집안 출신들은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미국의 일류대학을 나오고 친척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내가 변호사였다는 것을 알자 대놓고 무시한다. 돈만 주면 지옥에 떨어진 사람도 데려올 수 있다고 큰소리쳐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혁명은커녕 평생 말단 관리 노릇이나 할 것 같다. 나보다 우수한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다.”
 
천유런은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하와이 출신 화교가 세운 신문사를 찾아갔다.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외교부에서 운영하는 영자신문사가 기자를 모집하자 응모했다. 발행인이 지원 이유를 묻자 간단히 대답했다. “중국은 가난하고 약한 나라다. 외교는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다. 중국 외교는 외국의 이익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 영자신문들을 보니 영어가 엉망이다. 그런 문장으로는 외국인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월급은 없어도 된다. 생활은 곤란해도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영국 대사로 나가게 된 시자오지가 천유런을 만류했다. “나와 함께 런던으로 가자. 영국인에게 중국 문제를 설득시킬 사람은 너밖에 없다. 중국이 안정되면 그때 돌아오자.” 천유런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중국이 이렇게 복잡한 나라인 줄 몰랐다. 얽힌 것 푸는 재미를 느끼고 싶다.”
 
베이징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화려한 문필로 명성을 떨쳤지만 투옥과 경제난에 시달렸다. 쑨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쑨원은 선교사가 됐으면 좋았을 사람이다. 설교와 선전에 뛰어나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혁명을 촉발시켰다. 강연을 통해 모금한 돈으로 여러 차례의 거사 자금을 지원한 것이 공헌이라면 공헌이었다. 혁명이 성공하자 장점이 단점으로 변했다. 뛰어난 언변은 치국(治國)에 도움이 못됐다. 군사력이나 관료사회에 기반도 없는 사람이 군벌들에게 농락당하는 민국(民國)을 구해야 한다며 큰소리만 쳤다. 과장이 심하다 보니 ‘대포’라며 조롱당해 싸다.” 위안스카이 타도에 실패한 쑨원은 중국을 떠났다. 망명지 일본에서 쑹칭링(宋慶齡·송경령)과 결혼했다. 소식을 접한 천유런은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다.


2 중국인의 뇌리에는 천유런의 이 모습이 박혀 있다. [사진=김명호 제공]

2 중국인의 뇌리에는 천유런의 이 모습이 박혀 있다. [사진=김명호 제공]

“쑨원, 군벌들 베이징 접수에 분노”
위안스카이가 죽자 쑨원은 쑹칭링과 함께 귀국했다. 천유런은 혁명성인 장징장(張靜江·장정강)을 통해 상하이에 있는 쑨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쑨원이 천유런을 직접 영접했다. 천유런이 기록을 남겼다. “5관(五官)이 단정했다. 서구의 세련된 신사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기구한 길을 선택한, 24세의 젊은 부인은 미국 남부의 대갓집 딸 같았다. 쑨원은 “대군벌 위안스카이가 죽자 조무래기 군벌들이 창궐했다”며 중국의 현실을 원망했다.
 
천유런은 쑨원 방문 소감을 신문사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프랑스에 유학 중인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쑨원은 군벌들이 번갈아 가며 베이징을 접수하고 쫓겨나는 것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총통은 자신이 맡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중화민국은 자신의 아들이나 진배없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제 손으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군벌들이 지배하는 북양정부를 소멸시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 중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구열강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군벌과 별 차이 없는 사람이라며 쑨원에게 관심이 없다. 무슨 일이건 군벌정부와 협상했다.”
 
마지막 내용이 인상적이다. “중국의 혁명가 중, 극소수만이 쑨원을 이해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나도 그런 소수 중 한 사람이 됐다.” <계속>
 
 
 김명호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