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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 돕던 열정, 손쉬운 소통 길 열다


[이노베이터, 세상을 뒤집다]

음성 메시지 전달 장치 발명에 몰두
전선 통한 음파 전달 아이디어 얻어
지식·장비 부족에도 끈질기게 추진

금속선 이용해서 소리를 멀리 전송
전화 직계 조상 ‘음파 전송기’ 개발
19세기 가장 성공한 벤처 신화 써

전화기 발명한 벨
1892년 미국 뉴욕과 시카고 사이에 개설된 첫 장거리 전화의 개통식에서 벨이 통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1892년 미국 뉴욕과 시카고 사이에 개설된 첫 장거리 전화의 개통식에서 벨이 통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과학자·발명가·엔지니어로서 1876년 개발한 최초의 실용적인 전화기에 대한 특허권을 확보한 인물이다. 그가 발명한 전화기는 세계 최초로 상용화됐으며 지금 모든 전화기는 여기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독특한 것은 벨이 처음부터 전기·기계·물리 등의 분야에서 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청각장애인 발성의 연구와 훈련에 종사하다가 전화기를 발명하게 됐다. 청각장애인 교육·훈련은 일종의 가업이었다. 소리를 내는 발성학 분야의 초기 개척자인 조부 알렉산더 벨(1790~1865)은 영국 런던, 부친 알렉산더 멜빌 벨(1819~1905)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숙부인 데이비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청각장애인을 훈련시켰다.
벨


벨의 어머니 엘리자 그레이스는 청각장애인이었다. 12살 때부터 청각이 서서히 손상돼 가까이에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면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벨은 그런 어머니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수화를 배웠다. 청각 기능이 약간 남아있는 어머니와 대화하기 위해 보다 분명한 발성으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벨의 진로 결정에 깊은 영향을 줬다. 청력과 소리에 대한 관심은 관련 도구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인류 소통의 도구인 전화기 연구의 원동력이었다.
 
청각장애 관심 갖다 전화기 발명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벨은 고향의 에든버러대와 런던의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공부한 뒤 부친을 따라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부친은 런던대 교수로 청각장애인 발성을 가르치다가 1870년 신대륙으로 떠났다. 벨은 이듬해 보스턴 청각장애인학교의 교사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와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의 청각장애인학교에서 잇따라 초청받는 인기 강사가 됐다. 시간만 나면 개인실험실에서 청각장애인을 돕기 위한 음성 메시지 전달기구의 발명에 매달렸다.

1872년 10월 보스턴에 ‘음성 생리 및 발성 기술학교’를 세워 청각장애 학생들에게 발성을 개인 교습하다가 보스턴대의 음성 생리학 및 발성학 교수를 맡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 수업과 개인교습을 하고 밤에는 음성학 관련 실험과 연구, 그리고 음성 기구의 발명에 몰두했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돼 심각한 두통에 시달리자 1873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개인교습과 발명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벨은 부모가 중요한 후원자인 조지 샌더스라는 6세 소년과 마벨 허바드라는 15세 소녀만 제자로 남겼다. 샌더스의 아버지 토머스 샌더스는 부유한 기업인으로 벨에게 음향기기 발명용 실험실을 제공했으며 변호사인 허바드의 아버지 가디너 허바드는 자금을 지원했다.

벨은 1874년 음향기기 실험 중 소리의 떨림을 재를 묻힌 유리에 기록하다 문득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해 음파를 표시하고 전선을 통해 이를 전달하는 전기 장치를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하지만 과학과 관련한 교육을 받거나 관련 분야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현시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소리의 떨림을 전보선을 통해 전송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허바드와 샌더스에게 말하자 이들은 자신의 부모에게 이를 다시 전했다. 이를 들은 부모들은 흥분했다. 마침 그해 전보회사인 웨스턴 유니언의 윌리엄 오턴 회장이 새로운 전선을 설치하지 않고도 다용량의 전보를 동시에 보내는 방법을 개발하는 계약을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엘리샤 그레이와 맺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벨의 연구가 전보 전송의 효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투자를 결정했다. 특허담당 변호사인 앤서니 폴락도 연결해줬다.
 
“위대한 발명의 조짐이 있다”
1875년 벨과 폴락은 저명 과학자인 조지프 헨리 스미소니언협회 회장을 만나 전보선을 통해 인간의 음성을 전송하는 방법의 가능성과 가치를 물어봤다. 설명을 들은 헨리는 그 가치를 대번에 알아보고 “위대한 발명의 조짐이 있다”고 평가했다. 벨이 관련한 전기·기계 지식 부족으로 발명이 힘들다고 하자 헨리는 “구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감명받은 벨은 용기를 얻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지식과 장비 부족을 탓하지 않고 작업을 끈기있게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벨의 기술적인 고민은 기계 전문가이자 전기실험도구 디자이너인 토머스 왓슨을 만나면서 서서히 풀려나갔다. 벨이 왓슨을 실험실 조수로 채용해 구체적인 연구와 실험을 진행하면서 음성 전달장치 발명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자금과 인력 확보와 함께 의지가 발명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려주는 사례다.
1 벨 가족의 1885년 무렵 사진. 왼쪽부터 큰딸 엘지, 부인 마벨, 작은딸 마리안 그리고 벨. 2 1875년 개발돼 이듬해 특허를 얻은 첫 전화기.[중앙포토]

1 벨 가족의 1885년 무렵 사진. 왼쪽부터 큰딸 엘지, 부인 마벨, 작은딸 마리안 그리고 벨. 2 1875년 개발돼 이듬해 특허를 얻은 첫 전화기.[중앙포토]


실험 중 두 사람은 우연히 떨림판을 잡아당기면 여기에 연결된 금속선을 통해 소리가 전달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를 바탕으로 벨은 전보를 보내듯 금속선을 이용해 소리를 멀리 전송할 수 있는 ‘음파 전송기’를 1875년 발명해 특허를 신청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전화기의 직계 조상이다. 이 과정에서 벨은 투자자인 토머스 샌더스, 가디너 허버드와 지분 분할까지 합의를 마쳤다.

벨의 변호사는 1876년 2월 14일 미국 특허청에 전화기 특허를 신청했다. 소리의 파동을 전기 파동으로 바꿔 전선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곳에 전달한 뒤 이를 재생하는 장치였다. 다른 방식으로 전화기를 개발한 엘리샤 그레이가 특허를 신청하기 2시간 전이었다. 벨은 같은 해 3월 7일 특허번호 1744675번으로 전화기 특허를 등록했다. 등록 사흘 뒤인 1876년 3월 10일 벨은 자신의 전화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여러 사람 앞에 처음으로 시연했다. 벨이 수신기에 대고 “미스터 왓슨, 이쪽으로 와 봐요. 좀 봅시다”라고 말하자 목소리의 떨림이 물속에 들어있는 바늘을 떨게 해 전기저항을 만들었으며 이는 근처 다른 방에 있던 왓슨이 들고 있던 수신기에 또렷하게 전달됐다. 전화기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6㎞ 떨어진 전보국으로 음성 전송 성공
벨은 1876년 8월 3일과 그 다음날에 걸쳐 대중들이 보는 가운데 자신의 집에서 6㎞ 떨어진 전보국으로 음성을 전송하는 실험에도 성공했다. 책을 읽는 소리, 노래하는 소리 등이 전보선을 통해 실시간으로 선명하게 전달됐다. 전화기가 거리에 상관없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실험이었다. 이후 벨과 투자자들은 전화기의 상업적 활용에 나섰다.
 
벨과 투자자 허바드, 샌더스는 전화기 특허권을 전보회사인 웨스턴 유니언에 10만 달러를 받고 팔려고 했다. 하지만 오턴 회장은 “전화기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지금 2500만 달러를 줘도 싸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며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했다. 그 2년 동안 벨과 투자자들은 전화사업을 거대한 ‘신수종’ 산업으로 키웠다. 특허를 팔 생각 따윈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혁명적인 과학기술 발명품인 전화기 사업이 날로 번창해 벨은 물론 투자자들도 모두 백만장자가 됐기 때문이다. 벨의 전화 사업은 19세기에 가장 성공한 ‘벤처산업’의 하나로 평가된다. 돈벌이를 넘어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 메가트렌드 비즈니스였다.

벨은 이듬해인 1877년 ‘벨전화사’를 설립했다. 1879년에는 웨스턴 유니온이 보유하고 있던 에디슨의 탄소 송화기 특허권을 구입해 통화품질을 끌어올렸다. 전화기가 다른 기술과 융합함으로써 더욱 강해진 셈이다. 특허 취득 10년 뒤인 1886년 미국 고객이 15만 명을 넘어섰고 1892년에는 뉴욕-시카고 간 장거리 전화선이 개통됐다.
벨은 1885년 벨전화사의 자회사로 AT&T(미국전화전신사)를 설립했는데 1899년 12월 31일 이 회사가 모기업인 벨전화사를 합병하면서 전화사업의 중심이 됐다. AT&T는 미국과 캐나다 정부와 협상해 전화사업에 정부가 개입하는 대신 사업 독점권을 얻었다. 이런 통신사업 독점 체제를 ‘벨 시스템’으로 부른다. 독점 기간 동안 AT&T는 세계 최대 통신회사로 군림했다. 독점제도는 1982년까지 계속됐다.
 
다양한 분야 관심 가진 ‘19세기 르네상스맨’
벨은 1877년 벨전화사를 설립한 지 며칠 뒤 자신이 발성을 가르쳤던 제자 마벨 허바드(1857~1923)와 결혼했다. 어머니에 이어 부인도 청각장애인이었다. 벨전화사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투자자인 가디너 허바드는 장인이 됐다. 영국 국적이던 벨은 1882년 미국으로 귀화했다. 하지만, 미국은 물론 태어난 영국, 생활한 캐나다 모두에서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벨은 미국에서 기회를 잡았고, 미국은 이민자 벨을 통해 거대 통신산업을 선도하게 됐다.
 
벨은 전화기 발명 이후에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며 발명 작업을 계속했다. 청력계·항공·대체연료·해수담수화·빙산탐지기·금속탐지기·호흡보조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와 발명을 쉬지 않았다. 광범위한 분야에서 수많은 특허를 얻었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며 발명을 실행한 ‘19세기 르네상스맨’이었다. 전자기를 이용한 기록장치도 연구했는데 만일 성공했다면 인류는 테이프 레코더와 하드디스크, 플로피디스크의 탄생을 100년 정도 당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초기 형태의 에어컨도 만들어 집에서 직접 사용했다. 연료 고갈과 공해에 대비해 가축 분뇨 등에서 나오는 메탄 가스 등을 모아서 대체연료로 사용하는 방법도 연구한 선각자였다. 집열판으로 태양열을 모아서 하는 친환경 난방시스템을 구상하기도 했다. 기술벤처로 성공한 기업인인 일런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의 삶과 거의 100년의 시차를 두고도 서로 상당히 닮았다. 인류 복지향상에 대한 꿈, 과학에 대한 열정, 번득이는 혁신 아이디어가 넘친 이노베이터의 삶이었다.
 
1922년 8월 2일 세상을 뜬 벨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인류에게 ‘장거리 대화’라는 선물을 준 그를 기리기 위해 북미 대륙의 모든 전화는 통화를 일시 중단했다. 한 명의 혁신가·과학자에 대한 인류의 감사와 슬픔의 표시였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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