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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짜리 성취감 중독

CULTURE TALK : 뽑기 시대의 도래 
 
드디어 ‘손맛’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인형뽑기방, 어림잡아 다섯 차례쯤 드나든 끝에 맘에 드는 무민 인형을 하나 ‘득템’ 했다. 크기가 꽤 큰 편인 무민 인형은 한번 도전하는 데 1000원, 올 때마다 약 5000원씩을 지출했으니 인형에 들인 총 게임비는 음…. 
 
"그 돈으로 인형을 하나 사지 그래"라는 지적질은 하지 마시길. 집게 삼발이가 어렵사리 들어올린 무민 인형을 움푹 파인 구멍에 내려놓았을 때, 나도 모르게 “악” 탄성이 터져나왔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성취감이었다. 
 
가게에 비치된 투명 비닐봉투에 인형을 넣어 신나게 흔들며 돌아오는 길, 나처럼 ‘인형 봉다리’를 든 사람들과 여러 번 마주쳤다. 추위에 몸을 딱 붙이고 걸어가는 20대 커플도, 등산복을 입은 40대 아저씨도 있다. 서너개의 인형을 뽑은 승자들 답게, 표정이 밝다. 요즘 서울 홍대나 신촌, 대학로, 노량진 등은 물론 지방 대학가 등에는 한 집 건너 하나씩 인형뽑기방이 들어서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게임물관리위원회에 따르면 가게 이름에 ‘뽑기’가 들어간 업체 수는 지난해 2월 전국 21곳에서 올해 1월 말 1164곳으로 1년 사이 50배 이상 늘었다 한다. 다른 이름을 쓰는 곳까지 합하면, 실제 인형뽑기방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왜 지금 인형뽑기가 인기일까. 의아하던 마음은 동네 분식집이 며칠만에 인형뽑기방으로 변신하는 걸 보며 알았다. 내부 인테리어 공사고 뭐고 없고, 그냥 뽑기 기계 예닐곱 개를 들여놓으니 개업준비 끝. 뽑기방은 일단 불황기에 소자본으로 창업이 가능한 대표적인 업종으로 뽑힌다. 뽑기방의 원조는 역시 캐릭터의 왕국 일본인데, 일본에서도 90년대 중반 이후 장기 불황을 겪으며 인형은 물론 작은 장난감이나 열쇠 고리 등이 들어있는 캡슐을 뽑는 기계가 들어선 ‘가챠(ガチャ)샵’이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가챠샵’은 캡슐 뽑기 기계 손잡이를 돌릴 때 나는 소리 ‘가챠가챠(ガチャガチャ·찰칵찰칵)’에서 나온 이름.

 
창업이 쉽다고는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따르는 법이다. 요즘 10~20대들에게 인형뽑기는 몇천원으로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가성비 높은 놀이’다. 입시도 취업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 네모난 상자 안에 든 인형을 뽑아올리는 작은 성공이 일상의 만족감을 대신 채워준다. 여기에 어린 시절 문방구 앞에서 했던 인형뽑기 놀이에 추억을 가진 3040 ‘키덜트’들이 합세했다. 
 
인형뽑기 열풍은 비싼 물건을 구입하는 게 아니라 문구류나 저렴한 생필품 등에 2~3만원을 마음껏 쓰며 소비의 기쁨을 느끼는 젊은이들의 ‘탕진잼’ 트렌드와도 통한다. “요즘 대학생이 진짜 돈이 많고 여유롭고 자기 취향의 여가를 찾는 삶을 살았다면 천원짜리 인형뽑기방에서 가짜 포켓몬을 뽑는 게 아니라 정품 인형을 사모으거나 보드, 스키를 타거나 악기를 하고 그랬겠지요”라는 트위터 글은 수천번 넘게 리트윗되며 공감을 얻었다. 

 
어찌보면 슬픈 현상이지만, '기왕 시작했으니 제대로 붙어보자'는 자세는 기운차기도 하다. 유튜브 등에는 ‘쌓아올리기’ ‘내려찍기’ ‘자세 바꾸기’ 등 인형뽑기의 기술을 실제 영상과 함께 알려주는 콘텐트가 그득하다. 서로 다른 인형만 수집한다거나, 똑같은 캐릭터에 집중하는 등 나름의 ‘콜렉션’을 완성해 SNS에 뽐내는 사람도 많다. 인형뽑기가 도박만큼 중독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인형뽑기는 단순한 요행이 아니다. 제대로 된 전략을 갖고 체계적으로 도전하면 가성비 좋은 쇼핑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인형뽑기 열풍이 얼마나 갈 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사회의 어떤 단면이 궁금하다면, 근처 인형뽑기방에 한번 들러보시길. 인형 중에도 1등급으로 꼽히는 피카추가 담긴 기계 앞에서 대학생 서너명이 “오오” 흥분하고 있다. 앞선 도전자들이 인형을 출구 근처에 쌓아놓더니, 마지막 주자가 집게발로 한 마리의 피카추를 출구로 쓱 밀어넣는다. 피카추가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순간, 학생들은 물론이고 옆에서 지켜보던 나같은 손님들까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왠지 뭉클해졌다. 옆에 있는 누군가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 1000원짜리 인형뽑기 기계 앞이 아니라면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라서일까.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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