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삶의 향기] 쇼는 이제 그만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선거철이 다가오니 다시 ‘쇼쇼쇼’의 시대가 됐다. ‘민생 현실’에서 사라졌던 철새 떼가 또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랜 명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정치’와 ‘일상’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정치가 만든 시스템이 우리의 모든 일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사의 최종 결정자인 정치인들의 역할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들의 몇 마디, 혹은 합의와 거부가 압도적 다수 국민의 삶을 ‘대신’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대의권(代議權)’을 주는 것은 국민이니 그들은 국민에게 ‘아부’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정치인들의 ‘아부’에는 다양한 형식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선거철을 앞두고 각종 ‘쇼’를 하는 것이다. ‘쇼’란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평소에 하는 일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다. 쇼는 가짜이기 때문에 누추하고, 비(非)현실이다. 쇼는 그러나 평소에 그들이 하지 않거나 못 하는 짓의 허구적 재현이라는 점에서 그들도 모르게 그들의 유토피아를 누설한다. 말하자면 쇼는 (선거철이 아닌) 평소에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의 ‘연출’인 것이다.

소위 ‘민생 행보’라는 이름으로 평소엔 들여다보지도 않던 쪽방촌에 들러 생계의 끝자락에서 허덕이는 빈민들을 들러리로 세우고 사진을 찍어대는 정치인들은 얼마나 가련한가. 전통시장에 가서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는 500원짜리 어묵을 물고 서민 흉내를 내는 대선후보는 얼마나 누추한가. 자신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군 복무도 하지 않은 채 선거 때만 되면 우르르 군대로 몰려가 안보 운운하는 정치인들은 얼마나 가소로운가. 이런 쇼들은 대체로 정치 후진국에서 벌어지므로 한국 정치의 초라한 후진성을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지표다. 그런 쇼들이 아직도 먹힌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후진 정치인들과 그런 쇼에 감읍하는 후진 우중(愚衆)이 만들어내는 합작품에 공분(公憤)을 일으키는 주체들은 그래도 살아 있는 시민의식의 소유자인 다중(多衆)이다.

정치인들의 쇼는 그 자체가 정치적 ‘기호(記號 sign)’들이다. 이런 기호들이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것들이 정확히 정치적 유토피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쇼에 동원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체제의 주변인들, 사회적 약자들이다. 양로원, 전통시장, 달동네, 군대, 고아원, 공장, 가난한 농촌의 ‘하위 주체(subaltern)’들이 이들 쇼의 주요 타깃이다. 이는 이 하위 주체들이야말로 우리 체제가 관심과 가치의 중심에 놓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정치의 유토피아는 이들의 삶을 개선하고, 이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미개한 정치인들은 쇼를 통해 자신과 그들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이들’과 ‘그들’은 다른 존재다. ‘이들’은 부와 권력의 최상위층에 있는 자이고 ‘그들’은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이 서로 다른 주체들의 ‘인위적’ ‘일시적’ 동일시는 그런 의미에서 나쁜 ‘은유’이며, 현실을 기만하는 이미지다. 왜냐하면 ‘이들’의 진짜 목적은 ‘그들’을 위한 체제의 변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수많은 선거가 증명하듯이 선거만 끝나면 ‘이들’은 ‘그들’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정치적 유토피아를 아는 자들의 이 정치적 배반이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축적해 왔다. ‘이들’의 쇼가 더 큰 문제인 것은 이것이 ‘그들’을 정치적 소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들’에게 ‘그들’의 ‘인권’은 없다. 다만 ‘사물’에 불과한 가난하고도 무력한 사회적 약자들이 선거철만 되면 ‘동일시의 이미지들’로 동원된다.

이런 은유가 진실하려면 이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진정한 ‘동질성’ ‘친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생산돼야 한다. 양자 사이에 유사성·동질성이 생성되지 않을 때 그것은 가짜 은유이거나 ‘죽은 은유’다. 죽은 은유가 사람을, 정치를 살릴 수 없다. 민생 행보가 살아 있는 은유가 되려면 선거철이 아니라 평소에 이뤄져야 한다. 그러니 이제 쇼는 그만.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