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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국가의 면역력을 지키는 길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소설가

지난달 5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가정보원을 ‘해외안전정보원’으로 개편하고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은 신설할 경찰 안보수사국에 맡긴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안보 공약이므로 진지한 검토를 받아야 마땅하다.

국가는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반란을 막아 내며 생존한다. 1차 방어선은 국경을 지키는 군대·경비대·세관과 같은 기관들이다. 국경 안으로 침투한 세력과 반란 세력은 경찰이 막는다. 2차 방어선을 뚫을 만큼 교묘하게 위장한 세력은 국정원이나 기무사령부 같은 정보기관들로 이뤄진 3차 방어선이 막는다.

3차 방어선의 주축인 국정원은 생체의 면역체계와 본질적으로 같다. 피부와 점막으로 이뤄진 1차 방어선과 위액이나 항생 단백질들이 친 2차 방어선을 뚫은 병원균과 종양들은 면역체계가 식별해 처치한다. 자연히 면역체계의 핵심 능력은 ‘나(self)’와 ‘남(nonself)’을 변별하는 능력이다. 면역체계가 우리 건강을 지켜 주는 것은 나와 남을 변별하는 능력 덕분이다. 이 능력이 떨어지면 우리 몸이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에이즈나 암 같은 병에 걸린다.

국정원은 외국의 정보기관들이 지속적으로 침투시키는 잘 훈련된 첩자들을 찾아낸다. 선량한 시민들과 위장한 첩자들을 변별할 수 있는 요원이 되려면 뛰어난 자질과 전문적 훈련, 오랜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요원들이 얻은 지식들이 쌓여 단체적 기억(corporate memory)을 이루고 그런 단체적 기억이 정보기관의 능력을 좌우한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미국이 아프게 깨달은 것처럼 유능한 정보기관은 국력이 큰 나라도 단숨에 만들 수 없다. 정보기관의 조직을 자주 바꾸어 단체적 기억을 훼손하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고 위험하다.

국정원의 국내 업무를 떼어 내어 경찰에 맡긴다는 방안은 여러모로 비합리적이다. 경찰은 2차 방어선의 기관이고 국정원의 국내 업무는 3차 방어선의 기능이다. 따라서 그 방안은 국정원의 일체성을 무너뜨리고 단체적 기억을 훼손할 뿐 아니라 경찰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이질적 업무를 맡기는 것이다.
더구나 국정원은 우리 기업들이 보유한 첨단 기술이 불법적으로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다. 국내와 해외에 정보망을 지닌 조직만이 할 수 있는 이 어려운 임무를 통상적 치안 유지가 주 업무인 경찰에 맡기는 방안은 비현실적이다.

외국 첩자들을 제대로 잡으려면 들어오는 첩자들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외국 정보기관들의 움직임도 알아야 한다. 특히 정보기관 자체에 침투한 첩자(mole)들은 정보기관을 외국 정보기관의 좀비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정보기관은 외국 정보기관들에 선제적 작전을 시도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이치다.

이처럼 정보전쟁에선 정보의 수집과 보호가 실질적으로 융합되고 국내와 해외의 구분도 사라졌다. 정보가 모두 디지털화돼 국경조차 사라졌으므로 이제는 정보 활동에 대한 어떤 구획도 비합리적이다. 전통적으로 국내 정보와 해외 정보를 구분한 나라들에서도 정보기구들을 통합하거나 상위 기구를 통해 정보의 교류와 취합을 모색한다. 국내와 해외를 엄격히 구분한 미국에서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다. 정보 활동을 해외와 국내로 일부러 구분하겠다는 방안은 시대착오적이다. 국방부 장관의 휴대전화까지 중국을 경유한 북한의 해킹에 노출되는 상황에서 어디가 해외고 어디가 국내인가?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자유진영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에 정보전에서 완패했다. 코민테른이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국제기구라는 환상에 빠진 영국과 미국의 지식인들이 스스로 소련의 첩자가 됐기 때문이다. 국가 기관의 요소들에 침투한 그들은 중요한 군사 및 과학정보를 소련에 제공했을 뿐 아니라 정책들을 소련의 이익에 맞게 조작했다. 악명 높은 영국의 ‘케임브리지 5인’과 미국의 앨저 히스는 이런 지식인들을 상징한다.

공산주의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자발적 부역자들이 줄어들었다. 대신 금전적 이익을 바라는 첩자가 늘어났다. 그래서 미국의 고급 정보들을 얻기 어려워졌다고 러시아 정보 책임자들이 한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아직도 상당하다. 당연히 국정원의 업무는 많고 요원들은 힘들다.

그런 판에 국정원의 기구를 떼어 내어 반신불수로 만들겠다는 얘기가 나오면 요원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커질 수밖에 없다. 모두 아는 것처럼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떨어뜨린다. 가볍게 내놓는 국정원 개편 얘기는 국가의 면역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정치지도자들은 유념해야 한다.

복거일 소설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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