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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곡선 정점에 선 알파고, 인간이 도달한 자리 올랐을 뿐

문용직의 인공지능 수읽기(중)
프로 정상급이 알파고에 두 점 접히고 승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바둑의 수준이 낮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약자의 핑계가 아니다. 오늘 그 증거를 드리겠다. 그리고 바둑의 한계도 생각해 보겠다. 고맙게도 그 모든 증거를 알파고가 주었다.
 
알파고는 성장의 끝에 왔다
단도직입하겠다. 알파고는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가? 답은 이렇다. 알파고는 거의 다 성장했다. 어떻게 아느냐? 지난 3월의 알파고 바둑과 올 1월의 바둑을 비교해서다. 비교해 보면 알파고의 수준이 성장했다고 하기는 힘들다. 물론 세련되기야 했다. ‘60대 0’인데? 조심해야 한다. 20초 초읽기다. 생사의 현장에서 초읽기에 접하면 아드레날린 수치가 높아진다. 적응보다는 반응에 가깝게 행동해 생사가 유불리의 기준을 압도한다. 그와 달리 알파고는 감정이 없으니 초연하다. 이것이 이번에 불계패 비중이 대단히 높게 나온 이유다. 60대 0을 실력의 경이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다.

인간, 바둑을 알고 싶다. 끝을 보고 싶다. 우주 150억 광년의 끝을 추적하고 싶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만 년 정도 살아서 바둑 공부만 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알파고는 한 달이면 인간이 천 년 공부할 양을 학습한다. 그러니 지난해 3월 이세돌과의 대결 후 10개월이 지난 지금 알파고는 만 년 공부를 했다 할 수 있다. 자그마치 만 년. 알파고는 인간을 대신해 만 년을 시뮬레이션(simulation) 한 것이다. 이 시뮬레이션은 누운 ‘S’자(字) 성장 곡선으로 대표된다. 답은, 알파고가 성장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느냐, 그것에 달려 있다. 알파고는 10개월 이전과 비교해 세련된 것 외엔 거의 성장을 못했다. 이런 사실은 알파고가 성장 곡선의 끝에 다다랐다는 것을 시사한다. 끝에 가까이 갈수록 성장은 거의 멈추기 때문이다.
그래프를 잠시 보자. x축은 시간 축이고, y축은 성장(지식의 성취) 축이다. 초창기엔 지식의 성취가 느리지만 그 과정을 지나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그러고 나선 느려지고 이윽고 정체한다. 우리의 키가 성장하는 성장 곡선을 그린다면, S 곡선을 그린 후 x축엔 ‘나이’를 넣고 y축에는 ‘키’를 넣으면 된다.
 
바둑의 한계는 부족한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지난 1월 17일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가 “알파고가 (이전과 달리) 기보 입력 없이 자체 강화 학습만으로 기력 향상을 시험하고 있다”고 밝힌 것은, 곧 알파고의 성장이 끝에 왔음을 자인한 것이다. 사실 3000년 동안 인간은 바둑의 거의 모든 맥점을 다 밝혀두었으니, 이는 놀랄 일도 아니다.

바둑의 한계와 직결되는 문제일까? 그렇다. 성장 곡선의 끝에 알파고가 위치해 있다. 그러니 앞으로 1년이 가고 10년이 지나도 알파고의 키는 크지 않는다. 알파고의 수준은 박정환이나 커제 등 프로 정상과 비슷하니, 인간 역시 바둑의 정점에 도달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바둑은 19줄 세계.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다고 해서 바둑의 세계가 무한하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귀와 변, 중앙… 그렇게 영역을 가진 바둑은 제한된 세계임이 분명하다.

제한된 세계는 한계 또한 가진다. 언제 바둑이 19줄 너머의 세계를 말해 준 적 있던가? 바둑. 그 세계의 처음과 끝을 보고 있는 우리는 ‘150억 광년의 끝’을 추적했다고 할 수 있다. 자축해도 좋다. 한계를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얻기 힘든 성과다. 미덕의 수준이다. 한계를 부족한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한계는 지평선 너머를 보기 전에 반드시 도달해야 할 정점(頂點)을 말한다.

우리가 도달한 경계는 뛰어난 자리다.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계산, 비교, 직관 같은 것을 계발했지만 몸의 한계를 뛰어넘긴 힘들다. 한참 계산하다 보면 입이 마른다. 직관은 순간적일 뿐이고 비교는 결국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한계를 노정한다. 하지만 알파고에게는 몸이랄 것이 없다. 그래서 그의 수법은 때로 매우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인간에게 탁월함이 없다고는 말 못한다. 천재 우칭위안(吳淸源) 9단의 바둑엔 경이로운 착상이 넘친다. <기보와 해설 참조>
<b>관성을 거부한 우칭위안의 감각</b> 이 기보는 1951년 후지사와 구라노스케(藤澤庫之助) 9단과의 10번기 대국. 흑1은 상용수법. 백2 반발, 흑3 ‘나는 나대로’까지는 누구나 둘 수 있는 수순이다. 백4가 참으로 묘한 착상. 보통은 A나 B에 젖힌다. 그것이 인간. 인간의 관성. 흑 한 점을 에워싸는 것은 본능. 인간의 본능. 하지만 우칭위안의 발상은 참으로 미묘했다. 백4가 관성을 젖혀낸 것이었다. 다음 백C 흑D가 언제나 백의 선수. 그러니 좌변, 좌상귀, 상변에 걸쳐 솟아오른 기운이 피어오르듯 반상을 넓게 이끈다. 품격 높은 착상이다.

관성을 거부한 우칭위안의 감각
이 기보는 1951년 후지사와 구라노스케(藤澤庫之助) 9단과의 10번기 대국. 흑1은 상용수법. 백2 반발, 흑3 ‘나는 나대로’까지는 누구나 둘 수 있는 수순이다. 백4가 참으로 묘한 착상. 보통은 A나 B에 젖힌다. 그것이 인간. 인간의 관성. 흑 한 점을 에워싸는 것은 본능. 인간의 본능. 하지만 우칭위안의 발상은 참으로 미묘했다. 백4가 관성을 젖혀낸 것이었다. 다음 백C 흑D가 언제나 백의 선수. 그러니 좌변, 좌상귀, 상변에 걸쳐 솟아오른 기운이 피어오르듯 반상을 넓게 이끈다. 품격 높은 착상이다.

나으면 낫지, 알파고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그는 패러다임을 창안한 인물. 패러다임은 일종의 문화. 문화를 창조한 인물은 문화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의 별칭이 ‘천의무봉’인 이유다. 우칭위안은 종교에도 전념한 인물. 일본에 건너간 초기엔 자세가 좋지 않아 핀잔도 많이 들었다. 명상을 했다. 기운이 척추를 밀어올려 허리가 꼿꼿해졌다. 자세가 바르다며 신문의 평도 좋아졌다. 몸이 바로잡히면 기운에 휩쓸리지 않기에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감각과 착상이 자유로운 이유다. 그렇다. 우칭위안의 바둑은 경이롭고 알파고의 바둑은 변화가 자재하다. 모두가 바둑의 정점에서 만나는 서로 다른 얼굴이다.
 
다른 세계에 대한 경이는 전혀 다른 것
주의해야 한다. 몇 개 의외의 알파고 수법을 보고서 우리와 다르게 둔다고 판단한다면 큰 착각이다. 1970년대 신경질적으로 섬세했던 ‘면도날’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9단은 린하이펑(林海峰) 9단의 대륙적인 느긋한 수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바둑을 둔다고는 보지 않았다. 오늘 바둑계가 할 일은, 알파고는 우리와 다른 바둑을 두지 않는다는 그 점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둑에서 인간이 찾아낸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자랑스러워할 일이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프로 세계의 재편 등, 여러 가지 정책 수립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관성을 거부한 우칭위안의 감각
이 기보는 1951년 후지사와 구라노스케(藤澤庫之助) 9단과의 10번기 대국. 흑1은 상용수법. 백2 반발, 흑3 ‘나는 나대로’까지는 누구나 둘 수 있는 수순이다. 백4가 참으로 묘한 착상. 보통은 A나 B에 젖힌다. 그것이 인간. 인간의 관성. 흑 한 점을 에워싸는 것은 본능. 인간의 본능. 하지만 우칭위안의 발상은 참으로 미묘했다. 백4가 관성을 젖혀낸 것이었다. 다음 백C 흑D가 언제나 백의 선수. 그러니 좌변, 좌상귀, 상변에 걸쳐 솟아오른 기운이 피어오르듯 반상을 넓게 이끈다. 품격 높은 착상이다.

문용직 전 프로기사 moonro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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