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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알아서 기어야 하는 대한민국

이철호 논설주간

이철호
논설주간

요즘 따라 시인 유하의 ‘알아서 기는 법’이 자꾸 떠오른다. ‘…고참이 얼굴만 찡그려도 하낫 둘/ 알아서 선착순/…/ 아아 알아서 길 때/ 모든 게 알아서 편리한 세상’.

처절하게 알아서 기는 것도
남을 밟고 우뚝 서기 위한 것
왜 알아서 일어나진 못할까
왜 끝내 지네처럼 기어 다닐까
알아서 박박 기다 보니
무르팍 까지는 줄도 몰랐다


최순실 사태에 연루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렇게 복기했다. “예전에 뇌물은 기업이 비자금을 만들고, 배달 사고를 막기 위해 정권 2인자에게 몰래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딴판이었다. 대외협력 담당 임원이 검은돈이 아니라 회사 공금을, 영수증까지 받아 가며 미르와 K스포츠재단에 넘겼다.” 옛날 정권 2인자들은 익히 알려진 얼굴들이었다. 김대중 때는 권노갑, 이명박 때는 형인 이상득이었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인 최순실은 ‘듣보잡’이었다. 아무리 “내 뒤에 대통령이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선뜻 믿기 어려웠다.

“정권 말기에 청와대 문고리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최순실 쪽이 ‘다음 수석회의나 국무회의 때 이런저런 표현을 넣어 주겠다’고 장담하면 며칠 뒤 박근혜 대통령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어요. 놀라 자빠질 일이죠.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에 목을 맨 것도 당연하죠. 가장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이었으니까요.” 대기업들은 알아서 기기 시작했다. ‘통밥’을 재면서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작정하고 조아리는 머리는 무겁지 않았으며, 최씨에게 돈을 건넨 뒤에야 편안해졌다.

박 대통령은 연설문과 인사권을 넘겨 주었고, 최순실은 이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사방으로 촉수를 뻗어 약점 잡힌 기업마다 ‘삥’을 뜯어냈다. 롯데에서 70억원을 챙겼다가 검찰이 롯데를 압수수색할 조짐을 보이자 열흘 만에 급히 돈을 돌려주었다. 정작 가장 만만한 한전이나 농협 같은 공기업은 아예 접촉조차 하지 않았다. 혹 나중에 국정감사에서 들통나면 골치 아파진다는 계산 때문이다.
유하의 시는 계속된다. ‘…알아서 기는 것도/…/ 알고 보면, 그토록 처절하게/ 알아서 기는 일도/ 결국 남을 밟고 우뚝 서기 위한 것…’. 이성한 미르 전 사무총장은 “청와대가 예전에는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통령보다 최순실이 더 높았다”고 증언했다. 그제 차은택도 헌법재판소 증인신문에서 “최씨 예언대로 몇몇 재단이 생겨나고, 딱 그 시점에 대통령까지 나타났다. 저는 이 부분에서 소름이 끼쳤다”고 말했다. 어디 이들뿐이랴. 안종범·김종·정호성도 남들보다 한발 앞서 알아서 긴 덕분에 남을 밟고 우뚝 서지 않았던가. 이제 수갑을 찬 뒤에야 “대통령이 시켜서 했다”고 변명하지만….

유하의 시는 이어진다. ‘그러나 알아서 기는 법을 익히다 보면/ 왜 알아서 일어나진 못할까/ 왜 다들 끝내 지네처럼 기어 다니는 것일까’.

알아서 기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했다.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의 최경락 경위는 “우리 회사(경찰)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 이런 결정을 한다. 너무 힘들었고 이제 좀 편안히 쉬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청와대에서 쫓겨난 김영한 민정수석은 술만 마시다 급성 간암으로 숨졌다. 그의 모친은 “박 대통령과 김기춘, 우병우가 내 아들을 죽였다”고 울부짖는다. 문체부의 노태강 전 국장도 박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으로 찍혀 수없이 핍박당한 인물이다. 그는 지난주 인터뷰에서 초·중학생 두 딸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아빠는 공무원인데, 높은 사람하고 의견이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아빠 생각을 굽히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다른 곳으로 간 것이지 절대 잘못한 일은 없다.” 눈물 나는 일이다. 알아서 기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사정없이 짓밟혔다.

유하의 시는 끝을 이렇게 맺는다. ‘나도 지금까지 얼떨결에/ 알아서 박박 기다 보니/ 무르팍 까지는 줄도 몰랐다…’. 그나마 이 땅에서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이따금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 게 다행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영장을 기각시킨 조의연 판사는 잔인한 신상털기와 인신공격을 당했다. 그럼에도 오로지 증거와 법리만 살피며 법치주의를 지켜 냈다. 안희정 충남지사도 대선주자 가운데 유일하게 조 판사의 영장 기각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은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정말 살기 험난한 시대다. 알아서 기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제 역할을 하거나 제 목소리를 내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나는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1970년대로 후퇴시켰다는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200년 이상 퇴행시켜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 게 아닐까 싶다. 환관(문고리 3인방)과 아전(비선실세), “지당하옵십니다”라고 외치는 간신들로 둘러싸인 봉건 왕조시대를 살아 온 것처럼 말이다. 박박 기다 보니 어느새 우리 모두 지네가 되었고 무르팍까지 까졌다. 참 ‘나쁜’ 대통령 밑에서 힘들게 살아온 세월인 듯싶다.

이철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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