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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미니 서재인 듯, 식물원인 듯…볼일 없어도 찾는 그곳 

| 열린 공간으로 바뀐 화장실

손님 배려 보여주는 ‘영업장 얼굴’
음식도 믿을 만하다는 생각 들게 해
“화장실은 그 시대 여성 인권의 상징”

투명한 유리로 밖에서도 보이게 오픈
입구에 커피 마실 수 있는 작은 도서관
화장실 인테리어에 매장 콘셉트 맞추기도


 
디저트 카페 랩오의 화장실은 유리벽으로 돼 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여성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는 ‘열린 화장실’이 컨셉트이기 때문이다.

디저트 카페 랩오의 화장실은 유리벽으로 돼 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여성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는 ‘열린 화장실’이 컨셉트이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지난해 6월 발생해 우리 사회를 여성혐오(여혐) 이슈로 도배했던 이 사건은 여혐 외에 또 하나의 문제를 더 제기했다. 바로 화장실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한 건물의 남녀 공용화장실에 들렀다가 아무 이유없이 살해당한 피해 여성은 다른 많은 여성들의 근원적인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적지 않은 공중화장실에선 잊을만 하면 몰카에 살인까지 각종 범죄가 발생한다. 그러나 SNS에선 완전히 다른 얼굴의 화장실도 등장한다. 음습한 이미지와 달리 쾌적할 뿐 아니라 심지어 화려하기까지 한 그런 화장실 말이다. 화장실, 그 겉과 속을 살펴봤다.


 
화장실, 세상 밖으로 나오다
디저트 카페 랩오의 화장실 유리문. 흔한 여성용, 남성용 구분 대신 ‘뷰티풀’ ‘핸섬’이라는 안내문구를 사용했다.

디저트 카페 랩오의 화장실 유리문. 흔한 여성용, 남성용 구분 대신 ‘뷰티풀’ ‘핸섬’이라는 안내문구를 사용했다.


도산공원 사거리에 있는 디저트 카페 ‘랩오’는 대표 상품 브라우니만큼이나 유명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더러는 화장실 구경하러 일부러 카페를 찾기도 한다. 과장이 아니다. 직장인 강민경(27)씨는 “SNS에 이곳 화장실 사진이 많이 올라와 궁금해서 와봤다”며 “화려한 패턴의 타일 등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어서인지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예주(27)씨도 “남녀가 공간을 공유하지만 오히려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실제로 은밀한 곳, 감추는 곳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이곳의 남녀 공용 화장실(정확히는 세면대 공간)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어 바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남녀가 한 문을 통해 드나들며 세면 공간을 공유하는 그림은 낯설면서도 재밌다. 전성우 랩오 매니저는 “보통은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데 이곳 손님들은 ‘저기가 정말 화장실 맞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통상 화장실 근처 좌석엔 앉기도 꺼리는데 온 매장 손님이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화장실을 투명하게 만들다니, 대체 무슨 의도일까. 랩오 브랜딩과 인테리어를 담당한 길정민 맥클로드 대표는 “화장실을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며 “레스토랑에 오픈키친 인테리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오픈키친으로 식당 주방은 지저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사라진 것처럼 화장실 세면공간 개방으로 ‘화장실 더러운 일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인식을 바꿀 것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국내에서는 참고할 만한 사례가 없어 미국에서 보았던 개방형 화장실을 참고했다고 한다.

길 대표 생각은 적중했다. 오리온F&B 심수진 대리는 “노출된 구조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해서 그런지 화장실이 청결하게 잘 유지된다”며 “뿐만 아니라 SNS 상에서 자발적인 홍보효과까지 얻고 있다”고 말했다.

랩오 화장실처럼 물리적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더라도 공용 화장실 내부를 들여다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스타그램에서 화장실 관련 해시태그(#화장실에서, #화장실그램, #화장실셀카 등)를 검색하면 수많은 사진이 쏟아진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찍은 #화장실셀카 사진만 2만 5000여 개가 넘는다. 화장실이 드러내고 싶은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나폴리 전통피자를 판매하는 베라의 여자화장실은 나폴리를 상징하는 다양한 오브제로 장식돼 있다.

나폴리 전통피자를 판매하는 베라의 여자화장실은 나폴리를 상징하는 다양한 오브제로 장식돼 있다.


서울호서전문학교 인테리어디자인과 연제승 교수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의 의미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연 교수는 “대화가 잘 풀리지 않거나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때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표현하는 데서 그 맥락을 읽을 수 있듯이 레스토랑·카페 같은 상업공간이 일상적인 만남의 장소로 바뀌면서 화장실도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베라의 남자화장실에는 축구팀 SSC나폴리에서 뛰었던 전설적인 공격수 마라도나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베라의 남자화장실에는 축구팀 SSC나폴리에서 뛰었던 전설적인 공격수 마라도나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레스토랑·카페 인테리어를 주로 해온 허스크 건축&인테리어 남상기 대표 역시 “화장실은 단순히 손님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라 업장의 스타일은 물론 손님에 대한 배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원 민수아(27)씨는 “친구들과 장시간 머물 약속 장소를 고를 때 화장실이 주요 고려 대상”이라며 “화장실이 얼마나 쾌적하고 좋은지를 인터넷에서 미리 찾아본다”고 말했다.



 
여자, 화장실을 중심으로 끌어내다
초록 식물들을 배치해 좁은 공간을 섬세하게 꾸민 라잇비포의 화장실. 문 안쪽에 전면 거울을 달아 갑갑한 느낌을 덜었다.

초록 식물들을 배치해 좁은 공간을 섬세하게 꾸민 라잇비포의 화장실. 문 안쪽에 전면 거울을 달아 갑갑한 느낌을 덜었다.


화장실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지만 여전히 화장실은 화장실이다. 인테리어 작업을 할 때 가장 후미진 곳에, 그리고 가장 마지막 공정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한정된 예산으로 공간을 만들다 보니 화장실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런데 화장실을 제일 앞세워 화장실부터 전체 공간의 콘셉트를 잡은 공간까지 최근 등장했다. 바로 한남동 카페 ‘라잇비포’다. 이재하 사장은 “화장실이 더러운 카페는 절대로 안간다는 주변 여자들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기에 쾌적하고 예쁜 화장실을 1순위로 생각했다”며 “여성이 화장실에서 하는 행동에 초점을 맞춰 인테리어 했다”고 설명했다. 문 안쪽 전신거울, 밝기 조절이 되는 조명 달린 세면대 거울 등이 대표적이다. 초록색 식물은 SNS 인증샷을 노린 장치다.
 
1978년부터 30년간 전세계를 돌며 여자화장실 풍경을 촬영해 온 미국 사진작가 맥시 코헨의 작품들. 코헨은 “여자 화장실이야말로 여성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주장한다. [사진 맥시 코헨 스튜디오]

1978년부터 30년간 전세계를 돌며 여자화장실 풍경을 촬영해 온 미국 사진작가 맥시 코헨의 작품들. 코헨은 “여자 화장실이야말로 여성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주장한다. [사진 맥시 코헨 스튜디오]


사실 트렌드가 바뀌기 전부터 화장실은 여성들에겐 늘 각별한 공간이었다. 30여 년간 다양한 문화권의 여자화장실을 찍어온 미국의 여성 사진작가 맥시 코헨은 “여자화장실에는 그 시대 여성의 자유와 독립에 관한 상징적인 요소가 묻어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에게 화장실이란 안전함을 보장받고 친밀감을 확인하는 상징적인 공간, 그리고 여성 인권이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설명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공포스런 살인사건과 인스타그래머블(자랑하고 싶은)한 공간, 한국 여성의 인권은 이 중간쯤일 것이다.
 
1978년부터 30년간 전세계를 돌며 여자화장실 풍경을 촬영해 온 미국 사진작가 맥시 코헨의 작품들. 코헨은 “여자 화장실이야말로 여성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주장한다. [사진 맥시 코헨 스튜디오]

1978년부터 30년간 전세계를 돌며 여자화장실 풍경을 촬영해 온 미국 사진작가 맥시 코헨의 작품들. 코헨은 “여자 화장실이야말로 여성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주장한다. [사진 맥시 코헨 스튜디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최근 부쩍 여성이 안심할 수 있는 화장실을 만들려고 상업공간 업주들이 신경쓰는 건 1차적으로 매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런 노력이 이어지면 전반적인 사회적 의식 변화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화장실, 화장실을 벗어나다
화장실에 민감한 여성이 늘고, 이 여성들이 식음업장 트렌드를 주도하다보니 화장실로 차별화를 시도하는 곳이 점점 늘어난다. 남상기 대표는 “과거 화장실이 후미진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보니 이를 역으로 활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화장실로 가는 길목을 도서관처럼 꾸미고 파우더룸의 기능을 더한 투썸플레이스 신논현점.

화장실로 가는 길목을 도서관처럼 꾸미고 파우더룸의 기능을 더한 투썸플레이스 신논현점.


투썸플레이스 신논현점은 화장실과 카페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이런 반전을 노린 사례다. ‘RESTROOM’(화장실) 팻말이 달린 입구를 통과하면 커피와 관련한 서적으로 꾸민 라이브러리가 나온다. 여기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다. 카페·도서관·화장실·파우더룸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 공간을 지나야 비로소 진짜 화장실로 들어갈 수 있다.

투썸플레이스를 운영하는 CJ푸드빌의 오흥택 과장은 “요즘 화장실은 단순히 용변보는 공간이 아니다”며 “파우더룸과 대화장소라는 화장실 기능을 확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장실 길목의 작은 도서관은 이 매장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오 과장은 “일반적으로 화장실 바로 앞 테이블은 꺼리는 자리였는데 도서관 안 쪽 자리는 오히려 인기가 좋다”고 말했다.
 
비스트로 루즈의 화장실은 앤티크한 장식장과 소품으로 작은 방처럼 꾸며졌다.

비스트로 루즈의 화장실은 앤티크한 장식장과 소품으로 작은 방처럼 꾸며졌다.


압구정동 이탈리안 레스토랑 ‘비스트로 루즈’의 여자 화장실은 10㎡(3평) 남짓한 좁지 않은 공간에 변기가 딱 하나뿐이다. 원래 칸막이로 나뉘어진 2개의 공간을 합쳐 구석에 양변기를 놓았는데 화장실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꾸며놓았다. 실제로 걸그룹 ‘티아라’가 화보를 촬영할 땐 작은 방처럼 연출됐다. 이곳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았던 디자인룩스 윤재식 대표는 “결국 업장의 수준은 화장실에서 나온다”며 “화장실이 그 자체로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가로수길의 카페 ‘C27’ 화장실도 욕조 등을 없애고 양변기 2개를 놓을 수 있었지만 변기는 하나만 남겨 놓고 파우더룸을 넓혀 쾌적하게 바꿨다. 이용하려면 늘 기다려야 한다는 불만도 있지만 덕분에 ‘화장실 셀카 명소’로 등극했다.



 
정체성, 화장실을 통해 드러나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서울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 형태의 종로 탑클라우드 화장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서울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 형태의 종로 탑클라우드 화장실.


윤재식 대표 말처럼 화장실은 업장 고유의 콘셉트, 그리고 수준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이다. 1999년 문을 연 종로타워 33층의 레스토랑 ‘탑클라우드’는 당시로선 드물게 화장실 인테리어에 엄청 공을 들여 성공한 사례다. 서울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통유리창, 화장실 중심의 원형 세면대는 화장실 같지 않은 화장실로 당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화장실이라기보다는 스카이라운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스카이라운지 형태의 화장실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라는 탑클라우드의 콘셉트를 화장실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전망 좋은 자리에 테이블을 더 놓거나 VIP룸을 둘 수 있었지만 과감하게 화장실을 배치했다. 덕분에 창가 아닌 테이블 등에 앉아 전망을 즐길 수 없는 손님들도 화장실에서 여유 있게 서울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탑클라우드 종로점 배종철 지배인은 “오픈 초기부터 스카이라운지 화장실로 화제가 되었고 이젠 화장실이 탑클라우드의 이미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면서 “화장실 야경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는 손님도 많다”고 말했다.

카페·레스토랑 등 100 여곳의 인테리어를 한 모던크래프트 디자인랩 정동욱 대표는 “과거보다 화장실 인테리어를 신경쓰는 점주가 늘어났다”며 “특히 파인다이닝 등 럭셔리를 추구하는 업장은 임대로 들어간 건물 공용화장실도 자비를 들여 고치는 비율이 70~80%는 된다”고 말했다. 고급스러운 화장실 인테리어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는 얘기다.

길정민 대표는 “화장실 같지 않은 화장실이 좋은 화장실로 여겨지는 것 자체가 아직까지는 화장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앞으로는 ‘화장실 같다’ 의 정의가 바뀔 것”이라고 했다.



글=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사진=장진영·김경록 기자 artjang@joongang.co.kr, 각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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