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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 맨살 노출 강요, 예술혼인가 영화계 악습인가

19일 개봉한 영화 ‘다른 길이 있다’의 홍보 인터뷰에서 주인공 배우가 촬영 에피소드를 말하면서 논란은 시작되었다.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을 찍을 때 그가 마셨던 연기가 진짜 연탄 연기였고 정작 배우 본인은 촬영 당시에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인권과 생명을 무시한 감독의 처사에 질타가 쏟아졌다. 영화사측은 급히 공식 해명서를 내며 사태를 진화했다. 내막을 살펴보니 이것은 논란이라기보다 오해가 낳은 소동에 가까워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대한 배우의 애정이 부른 과장된 무용담이었던 셈인데, 이것이 최근 진일보한 대중의 인권감수성을 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헛소동이 아니다. 그간 영화의 완성도를 핑계로 인권을 간과해 온 영화계의 악습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사건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한 선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쓰는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불사했다. 공사판을 전전했고, 유흥가를 배회했으며, 참치잡이 배까지 타겠다는 걸 겨우 말린 적도 있다. 어느 날 그는 드디어 단편 시나리오 하나를 완성했다. 나는 마침내 현장에 서게 된 선배를 기꺼이 돕기 위해 현장 스태프가 되었다. 잠을 충분히 잘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현장의 우두머리가 된 선배의 요구로 거머리 가득한 구정물에 배우를 입수시키기도 했다. 현장 사방에서 선배의 욕지거리가 울려 퍼졌지만 영화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니 그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촬영 감독이 엄청난 크기의 유리조각을 밟았는데, 선배는 흐르는 피를 보고서도 구급차를 부르는 대신 지체된 스케줄을 걱정했다. 화장실에서 대충 상처를 수습하고 나온 촬영 감독에게 선배는 외쳤다. “대가리 박아!” 그는 좋은 영화를 완성했을까? 나는 그때 거기서 빠져 나왔고 이후로 선배를 만나지 않았다.

닭을 그리기 위해 닭장에서 생활하다 이가 옮아 고생했다는 어느 화가의 일화나 집에 감옥을 만들어 스스로를 감금했다는 어느 소설가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어쩌면 위악적인 자기학대를 이상적 예술혼으로 포장하는 기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그들 자신만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현장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감독의 태도는 배우는 물론 스태프까지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한 모두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불사하겠다는 감독의 생각은 상당히 위험하며 때론 범죄를 부르기도 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촬영 당시 여배우 성폭행 논란이 일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촬영 당시 여배우 성폭행 논란이 일었다.

44년이 지난 작년에서야 공론화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뒷얘기는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강간 장면을 찍는 과정에서 여자 배우가 전혀 모르는 소품을 사용한 것인데, 이에 대한 감독의 해명은 끔찍할 지경이다. ‘남자’인 감독은 그녀가 ‘배우’로서 수치심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서 수치심을 ‘체감’하길 원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영화인가, 성폭력인가? 한국에도 동일선상의 사건들이 제법 있다. 약속에 없던 노출 장면을 여자 배우가 거부하자 감독은 손해배상 운운하며 촬영을 강행했다. 참혹하게도 그때 그 배우는 고등학생이었다. 이것은 영화인가, 학대인가? 노숙자의 삶을 생동감 있게 포착해야 한다며 배우들에게 진짜 노숙자 생활을 강요하거나, 인간의 폭력성을 고발한다는 미명 하에 동물을 줄에 매달아 몽둥이로 가격하고,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돌진하는 기차 앞에 배우를 세우는 식의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일화는 차고 넘친다.

미개했던 한 때의 악습에 불과하다고? 암환자인 아내를 수발하는 남편의 내면을 다룬 불과 몇 년 전의 영화에서 아내 역의 배우는 현장의 강압에 맨 살 전부를 드러내야 했다. 남자 배우에게만 연출정보를 주고 여자 배우는 모르는 상태에서 ‘여자’로서의 당황하는 반응을 끌어내려 한 사례는 겨우 2년 전의 일이다. 지난주에 연예계는 여자배우와 사전 합의 없이 노출 장면이 담긴 ‘무삭제판’을 배포해 법적으로 논쟁이 된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모든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잊을만하면 시시때때로 들리는 영화 현장에서의 노동 착취와 폭행사건 등은 우리로 하여금 영화를 찍고 보는 행위 자체를 회의하게 만든다.

영화를 위해 여자 배우에게 키스를 강요해도 되는가? 고양이를 때려도 되는가?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를 삼일 밤낮 못 자게 해도 되는가? 안 된다. 인권과 생명을 무시하는 행위는 영화만이 아니라 그 무엇을 위해서라도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 영화의 리얼리티는 정교한 가상에서 나온다. 그럴 때라야 영화는 비로소 금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그냥 범죄다. 예술적 차원에서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 어쭙잖은 예술혼은 범죄의 행각과 아주 닮아 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가. 

박우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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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