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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손글씨, 또 다른 나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가슴이 철렁한다. 내 남자 친구의 책갈피에서 낯선 여자의 글씨를 발견하는 것은 그 둘의 다정한 사진을 보는 것보다 더 잔혹하다. 그 글씨는 그녀의 체온과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재의 자리에 필체로 제 존재를 알리는 신호, 그것이 손글씨다. 최근 젊은 세대에서 손글씨가 인기다. ‘육필’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없는 ‘손글씨’라는 말이 왜 그들 사이에 유행할까.

지난주 가수 비(정지훈)가 배우 김태희와 결혼했다. 이들이 더 아름답게 비치는 것은 비가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결혼을 알리는 손편지다. 그 편지에서 비는 제 연인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적는다. 월드스타의 결혼에 한류 팬들은 뜨겁게 축하했다. 해외 팬들은 그 편지로 한국 남자의 손길로 촘촘히 쓰인 한글이 사랑스러운 형태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어느새 손글씨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사회적 시선에 예민한 연예인들부터 손글씨가 대세다. 비와 김태희처럼 손으로 쓴 편지로 결혼을 알리는 경우가 흔해졌다. 잘못을 사과할 때도 손글씨는 진실돼 보인다. 예전에는 연예인이 물의를 일으키면 소속사들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당사자가 손글씨로 쓴 사과문을 SNS에 올리는 게 공식처럼 됐다. 직접적인 데다, 그래서 따뜻한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필기구도 화려하게 부활했단다. 디지털·모바일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현대인이 많아졌다. 최근 반복적인 업무와 딱딱한 디지털 인쇄체에 지쳐 손글씨를 쓰거나 그림에 색을 직접 칠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힐링족이 늘어나는 중이다. 그 바람을 타고 100만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필기구에 대한 수요도 커졌다. 얼마 전 읽어 본 신문기사에 따르면 연필과 샤프, 지우개 등 필기구 판매량이 전년 대비 80%나 증가했다고 한다.

복고풍 만년필에 대한 수요는 놀랍다. 독일 몽블랑사는 매년 판매액이 늘어난다고 자랑한다. 국내 만년필 생산 업체들도 손글씨·캘리그래피의 바람을 타고 만년필 매출이 20%나 늘었다. 디지털 세대에게 손글씨와 필사가 새로운 놀이가 되기도 한다. 젊은 세대의 이용자가 많은 인스타그램의 경우 손글씨란 주제어로 올라온 사진이 90여만 장에 이르는 모양이다. 흠모하는 시인을 공유하는 동호회 사람들은 그 시인의 시를 베껴 써서 그들의 홈페이지에 자랑한다.

나의 하루는 붓에 먹을 적셔 쓰고 그리는 일로 시작한다. 내가 주로 쓰는 붓은 동양화 붓이다. 그것은 서양화의 붓과 달리 털이 곱고 너무나 부드럽다. 하지만 그 붓이 나의 손과 만나면 단단한 뼈보다 강직하고 칼날처럼 예리해진다. 나뿐만 아니라 동양화를 훈련한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 유연한 털로 바위를 뚫는 정보다 더 강하고 날카로운 힘을 매번 느낄 것이다. 그것도 붓자루의 맨 위를 가볍게 잡고 손목과 팔꿈치에 아무런 받침 없이 일정한 속도로 그어 가는, 그 흐름에 온 정신과 몸을 내맡긴다. 나의 스승님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면서 단 한 자의 글씨라도 매일 써 보라 권하셨다. 심신의 단련에 이만한 것이 없다.

그림은 대개 드로잉·회화·그래픽으로 그 형식을 분류한다. 드로잉은 선으로 표현되고 회화는 칠로, 그리고 그래픽은 도식으로 표현된다. 이들은 또한 유아가 성장 과정에서 그 표현을 알아 가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 중 드로잉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본능적인 몸짓의 표현에 해당한다. 획을 드러내는 글씨, 휘갈긴 낙서, 빙판을 가르는 스케이트의 경로 등은 사람의 몸짓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원초적 행위다.

손글씨는 드로잉처럼 가공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 글씨를 쓴 사람 고유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체이자 그가 존재하는 굳건한 증명이 된다. 손글씨는 또 하나의 나인 셈이다. 돌아보면 나도 혹여 나의 손글씨 때문에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었을까.

전수경 화가

◆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동 대학원 미술이론 석사, 미술학 박사 과정 수료. 한국미술신예작가상, 마카오 민정총서 초대전 외 12회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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