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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레밍의 자살, 청년의 좌절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귀엽고 앙증맞다. 꼬리가 짧은 것만 빼면 꼭 다람쥐를 닮았다. 몸길이 10㎝ 안팎, 무게는 기껏해야 100g. 스칸디나비아 툰드라 지대에 사는 레밍(나그네쥐) 얘기다. 흔한 설치류인 이 동물이 유명세를 탄 건 ‘집단자살’ 때문이다. 주민들은 깎아지른 바닷가 벼랑에서 줄지어 떨어지는 레밍들의 모습을 수백 년간 봐 왔다. 이유를 모르니 자살처럼 보였다. 1958년 월트디즈니의 자연 다큐멘터리 ‘하얀 황야(White Wilderness)’가 이런 이미지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

하지만 잘못된 신화라는 게 밝혀졌다. 레밍은 약 10년마다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모두가 먹을 풀이 없으니 상당수가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다. 그러다 선두가 길을 잘못 들어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물에 빠져 죽는다. 뒤따르던 녀석들도 미처 멈추지 못해 떨어진다.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였던 것이다. 영화 ‘하얀 황야’ 제작진은 레밍을 절벽에서 내던지면서 촬영했다.

레밍의 비극은 생물학자들에게 생태학으로 가는 문을 열어줬다. 생물은 혼자 살지 않는다. 다른 생물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상황이 나빠지면 개체 수를 줄여 생존을 도모한다. 집을 떠나 죽는 레밍이 많아지는 것도 자연의 보이지 않는 조절 장치다. 결국 생태적 공간의 크기가 종의 보존과 번영을 좌우한다.

생태학은 사회학이나 경제학을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인다. ‘창업 생태계’ ‘골목상권 생태계’ 같은 말이 낯설지 않다. ‘삼포’ ‘오포’를 넘어 ‘N포세대’로 진화(혹은 퇴화)하고 있는 청년문제도 생태학과 무관치 않다. 청년들이 왜 결혼을 꺼리고 애 낳기를 두려워할까. 취업이 안 되고, 취업해도 영 불안해서다. 오늘조차 장담할 수 없으니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 생존에 대한 불확실성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본능마저 억누른다. 황량한 벌판에서 풀뿌리로 겨우 연명하는 레밍과 비슷한 처지다. 아르바이트로 사는 인간이라는 ‘호모 알바스’, 편의점에서 일하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편의점 인생’이란 자조가 넘친다.

이런 사회엔 미래가 없다. ‘중동으로 가라’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라도 하라’는 단편적 인식으로 문제를 풀 수도 없다. 성장과 분배, 공정한 기회의 보장을 통해 청년이 살 수 있는 생태적 공간을 마련해 주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래야 청년이라는 종의 멸종과 한국 사회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 취업 독촉이나 ‘노오력’이란 말이 필요 없는 설은 언제나 올까.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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