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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10. 이 맑고 시린 공기는 누구의 것입니까? (2)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다. 꽃과 열매와 바람과 공기도 절기 따라 바뀌었다. 매창의 삶은 달라진 게 없었다. 계절과 풍경의 변화만으로 무엇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에게 이 세상은 두부모처럼 똑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전에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조차 잊었다. 모든 게 헝클어지고 뒤섞였다. 전쟁이 앗아간 것은 물질만이 아니었다. 누가 나이고 누가 당신이고 무엇이 현재이고 무엇이 과거인지 확언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그 속에서도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하루가 왔다. 목숨은 제 길을 톺아 앞으로 나아갔다.
매일 하던 일들을 성심으로 하는 것, 그녀는 그것에만 마음을 썼다. 머리를 빗는 일, 얼굴을 매만지는 일,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사방탁자의 먼지를 닦는 일, 마당의 꽃에 물을 주는 일, 마당을 거니는 일, 시를 외우거나 붓글씨를 쓰는 일이 두 배나 힘이 들었다. 술을 팔고, 거문고 연주를 팔고, 이야기를 파는 일도 자신이 성심을 다해야 하는 일이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는데도 흉년은 두 해째 이어졌다. 계사년과 갑오년의 흉년 중에 남자가 여자를, 어른이 아이를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남의 얘기로 끝나지 않을까 봐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곡식도 땔나무도 없었다. 벌판이나 산의 들짐승, 날짐승은 씨가 말랐다. 논의 알곡들은 인간이 죄다 주워 먹었으니 짐승들 먹을 게 없었다. 굶주려 기운 빠진 짐승은 인간의 손에 쉽게 잡혔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양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백성들의 삶은 가뜩이나 허덕이는데 토목공사를 일으켜 민가 수천 채를 헐어서 인경, 경덕 두 궁궐을 화려하게 꾸몄다. 그 핑계로 관리들도 기와나 물품을 가로채 사치스러운 저택을 짓는 데 골몰했다. 새 임금은 궁 안에 은 수백 궤를 감추어두고 왕위가 위태로우면 중국에 뇌물을 바쳐 왕위를 되찾으려 한다는 풍문도 들렸다. 풍문과 사실의 경계가 모호했다. 백성들의 불안이 사실을 뭉뚱그렸고 풍문을 부풀렸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전쟁을 막지 못한 당사자들 중에 반성하는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권력의 본성인가. 이익되는 일은 앞에 나서고 책임질 일에는 뒤로 물러섰다. 사대부란 자들은 자신의 안위에만 집중했다. 베풀어야 하는 지위임에도 오직 자신이 가질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는 일의 부도덕함에 둔감했다.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고 위로를 건넬 줄 아는 몇몇은 더러운 세상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그 경멸은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바람에 날아온 것은 나쁜 소식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이 묻혀온 풀씨들은 봄이 되자 싹을 피웠다. 자잘한 꽃들이 들판을 희고 붉고 노랗게 물들였다. 논과 밭을 덮은 자운영은 다홍색 이불을 깔아놓은 신방 같았다. 희망이라 불러도 좋을 만치 고왔다. 열 살짜리 여자애처럼 앙증맞은 자운영 꽃은 곧 갈아엎어져 거름이 될 것이다. 측간의 두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개들도 바쁘게 돌아다녔다. 허리를 굽힌 농부들의 손놀림은 부산했다. 흙투성이 옷과 땀이 얼룩진 얼굴에 햇살이 비쳤다. 바삐 움직이는 농부의 몸에서는 흙냄새와 땀 냄새가 달게 났다. 잠깐씩 허리를 펴고 자신이 사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낮은 지붕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전쟁은 그들에게 평범한 일상의 고마움을 가르쳐주었다. 이 정도 사는 것도 어디냐 싶어 보리를 거두는 손길이 분주했다. 솔잎, 소나무껍질, 느릅나무껍질, 도토리, 칡뿌리, 쑥 등 구황에 먹을거리를 구해오는 것은 여자와 어린애 몫이었다. 그중에서도 솔잎을 제일로 쳤다. 솔잎을 쪄서 말려 가루로 만든 다음 콩가루에 섞어서 죽을 쑤어 먹었다. 콩가루를 섞지 않고 먹었다가는 변비에 걸리기 십상이다. 아침마다 아이들은 똥구멍이 찢어진다고 빽빽 울어댔다. 곡식 대신 나무껍질 같은 걸 많이 먹으면 부황이 들기 때문에 소금을 함께 먹어서 독소를 풀어주었다.
남자들은 광 밑바닥에 숨겨둔 종자들을 꺼내고 뒷간의 두엄을 뒤집었다. 곰삭은 두엄에서 밥 냄새만큼 푸짐한 냄새가 났다. 이따금씩 봄비가 내리고 나면 풀들은 부쩍 자랐고 날은 푹해졌다. 매창도 마당의 잡초를 뽑고 좁혀진 빗물 도랑을 넓혔다. 찬모와 함께 뒤뜰에 채마밭을 가꾸었다. 호박과 아욱과 가지를 심었다. 매창은 가지 꽃의 보랏빛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둥실 열리는 가지에 비하면 그 꽃은 얼마나 우아한가. 매창은 해마다 빼놓지 않고 가지를 꼭 심었다. 여름에 가지를 따다가 쪄서 쪽쪽 찢어 냉채를 만들기에 앞서 늦봄부터 그녀는 꽃이 언제 피나 아침마다 들여다보았다.
여름에 푹푹 솟아오르는 뜨거운 땅김을 쏘이며 엎드려서 김을 매는 사람들의 얼굴은 일상을 되찾았다는 안도와 추수의 기대로 밝았다. 전에는 그것이 감사의 대상인지도 몰랐다. 전쟁을 겪고 나서 씨를 뿌리고 알곡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알게 되었다. 산천이 전쟁의 폐허 속에 버려져도, 끼니를 이을 수 없게 궁핍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었으니. 다 같이 겪고 다 같이 지나가야 하는 환난이었다. 지금 유희경의 안위만이 매창의 두려움이고 닥친 고통이었다. 그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물을 사람도 알 만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제 목숨 부지하기도 간당간당한 때였다.
 
‘그는 무사할까? 평생 붓을 잡던 손으로 활을 잡고 창과 칼을 잡는단 말인가. 사랑을 속삭이고 속살을 더듬던 손으로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시를 읊던 입으로 병사들에게 호령하고 고함친단 말인가.’
 
매창은 자다가도 화약 터지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곤 하였다. 그럴 때면 유희경이 걱정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꿈속에서 그는 물소 뿔로 만든 화살촉을 징표로 가지고 왔다. 이상하게 어떤 표정이었는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화살촉을 내미는 손만 또렷했다. 상처하나 핏자국 하나 없이 새하얗고 깨끗한 손이었다. 꿈속에 잡아본 손조차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화살촉을 노리개로 만들어 가슴에 달았다. 괴이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이 꿈이라 해도 참 기묘한 장면이었다.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손님을 맞는 일은 몸에 익은 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허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부러 그녀를 떠보는 손님들 앞에서는 조용히 거문고를 탔다. 거문고 소리에 소동이 가라앉을 때도 있고 역심이 나서 더 괴롭히려 드는 패들도 있었다. 처음 기생이 되었을 때도 매창은 주눅이 들거나 기가 죽지 않았다. 배반이 낭자하고 계집 사내 할 것 없이 상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난잡한 술자리도 그녀는 즐거이 참여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즐겁게 하지 않으면 더 견디기 어려울 터이니. 그렇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음탕한 농담 정도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저고리를 벗은 채 거문고를 타라는 요구는 끝내 거부했다. 고름을 잡아당겨 뜯어도 움쩍도 하지 않았다.
옛날에 관기로 있을 때부터 그녀의 고집은 유명했다. 선배 기생에게 종아리를 맞고 욕을 먹어도 버텼다. 사흘을 굶어 눈이 쑥 들어간 검불 같은 형상을 보고 다들 혀를 차며 그녀의 생고집에 치를 떨었다. 결국 그녀가 이겼다.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싸움이다. 그녀의 재주가 워낙 남다르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사내들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재주는 인간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구하기도 했다. 선배나 동료 기생들의 충고는 삼엄했다.
 
“네가 아무리 잘났어도 여자는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건 알아둬야 한다. 기생에게 남자는 다섯 가지 중 하나야. 어떤 놈이든 이 중 하나로 걸려들게 되어 있어. 첫째는 불쌍하여 동점심이 드는 남자인 애부, 둘째는 돈 많고 풍채 좋아 인기 있는 남자인 정부, 그다음은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잘 만나지 못하는 남자인 미망이 있지. 그때가 제일 정신을 차려야 할 때야. 넷째는 여자를 지성으로 섬기는 남자인 화간이 있고 마지막으로 기생에 빠져 생사 구별도 못하는 바보 남자인 치애가 있어. 나한테 어떤 남자가 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그 남자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만 생각하면 되니까. 신기하게도 어떤 놈이든 우리한테 필요한 것 한 가지는 만족시켜 주거든. 사랑에 깊이 빠지지만 않으면 나름 재미도 있단다. 그걸 알면서도 제대로 가는 계집이 적으니 그게 문제야. 하지만 어쩌겠냐. 그것도 다 제가 타고난 팔자인 것을.”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선배 기생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매창에게는 아는 것을 뽐내는 사대부들이 필요했다. 그녀가 목말라하는 지식은 그들에게서 나왔다. 짐승의 몸에 붙은 홀씨가 들판에 떨어지듯 그녀를 찾아오는 사대부들의 입에서는 이곳이 아닌 저곳의 소식이 풀려나왔다. 정보의 부스러기들을 모아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윤곽과 사건의 실체가 어렴풋이 잡혔다.
매창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노래하는 연모의 시들은 결국 양반들의 애정욕구를 만족시키는 직업상의 의무일 뿐이다. 기생이 읊는 시 속의 사랑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 여기는 남자들의 착각이 기생들에게는 필요했다. 매창 또한 그렇게 했다. 사랑의 대상이 따로 있다는 걸 들키지 않는 것은 도리였고 규율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일지라도 매창은 자신의 입으로 다른 남자의 일을 떠벌리지 않았다. 그러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고을 유지인 정 진사의 친구라는 사람이 곡성에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선친이 내수사에 몸담았던 벼슬아치 집안의 자제답게 풍모도 수려했고 말투도 점잖았다. 처음엔 분위기가 좋았다. 각자 자기가 아는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돌리며 거문고 소리에 취해 웃고 즐겼다. 곡성 사람은 시간이 흐르고 술이 몇 순배 돌고도 매창이 자신의 수작에 응하지 않자 다짜고짜 저고리를 벗어보라고 말했다.
 
“다 늙은 계집의 보잘것없는 몸이 무엇이 볼 게 있겠습니까? 그런 소청이시라면 다른 아리따운 아이를 들여보내 드리지요.”

 
매창은 완곡하게 그의 수작을 물리쳤다. 그에게 창기 노릇을 하는 기생은 따로 있음을 상기시켰다. 매창이 창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골이라면 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계속 어깃장을 놓았다.
 
“볼 게 있는지 없는지 결정할 사람은 나다. 네까짓 게 감히 어디다 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냐?”
 

매창은 얼굴 찌푸리는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매창의 옷고름을 홱 잡아챘다. 그 바람에 옷고름이 찢어지면서 그녀의 속살이 드러났다. 그는 손을 멈칫하면서도 부아가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렸다. 매창은 손으로 앞섶을 여미며 자세를 바로잡더니 그 자리에서 시조창을 한 수 읊었다.
 
취한 손님이 내 저고리를 잡았는데
손님 손길 따라 저고리가 찢어져 버렸네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정까지 찢어지지 않았을까 두렵네
 
“고얀 것! 기생이면 기생답게 굴어야지. 어디서 누굴 가르치려 드는 거냐? 그 잘난 문자 집어치워라!”

 
가만히 시조창을 듣고 있던 남자는 분기와 노기로 얼굴이 새파래졌다. 속으로야 무안했겠지만 계속 고함을 치며 허세를 부렸다. 말 사이사이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딱딱 났다. 매창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떤 일도 그녀를 흔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잘난 척한다는 말 들었으니 외람되지만 한마디 더 보태겠습니다. 논인어주색지외(論人於酒色之外)라고, 공자님께서도 인물을 논함에 있어 주색은 흠으로 말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오늘 일은 주흥에 겨워 술잔이 넘치듯 정이 넘쳐 일어난 일인 줄 아옵니다. 쇤네의 행동을 버릇없다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제 곡조 한 가락 들어주시면 저도 기꺼운 마음으로 노래 한 곡 올리겠사옵니다.”
 
매창은 뜯어진 옷고름을 가다듬고 앉아서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아지길 기다렸다.
 
“그래라, 매창아. 그리고 자네도 여기 정 진사 체면도 있으니 그만 화를 누그러뜨리게.”
 
옆 손님의 한 마디에 성난 손님도 큰기침을 하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매창이 노래를 시작하자 방금 일어난 다툼과 흥겨움과 고약한 심술이 곡조를 따라 다스려지고 있었다. 하나둘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장단을 하기 시작했다. 시주(詩酒)를 즐기러 온 한량답게 불미스러운 일은 금방 잊어버리고 시에 취하고 술에 취했다. 정 진사의 친구 역시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몸을 외로 틀고 매창의 노래를 듣지 않는 척하면서 귀를 열었다. 이후로는 그녀를 향해 음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는 망신살이 뻗치고 싶지 않은 거다. 제 것이 아닌 여색보다 확실히 제 것인 체면을 선택했다. 사내 아닌가. 그것도 술에 취한 사내. 매창은 순식간에 약한 짐승으로 곤두박질치는 사내들을 가엾게 여겼다. 사대부라고, 사모관대 썼다고, 비단옷 입었다고 별다를 게 없었다. 수컷인 바에야 상대가 누구든 자기를 내쳤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유희경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는 것이라 말들 했지만 그녀는 수절을 작심한 적이 없었다. 부러 지어먹지 않고 그저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매창의 소리와 시, 거문고 연주가 남다르다는 것이 먼 동네까지 알려졌다. 오입쟁이나 난봉꾼의 발걸음은 줄고 조용히 주흥을 즐기려는 사대부들로 손님들의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존구자명(存久自明)이라잖는가. 인간의 실체는 언제고 알려지게 되어 있고 인생도 그에 따라 굴러가게 되어 있었다.
매창은 어느 손님이나 친절히 대해주었지만 몸과 마음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는 게 정직한 말이리라. 그들도 사내인지라 흥이 무르익어 육욕을 들이댈 때가 있어도 그동안 떠들어댄 것이 있고 읽어온 글줄이 있으니 아주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노는 물은 노는 사람마다 달랐다. 그래도 여러 사람의 갖가지 성정이 바닥까지 드러나는 술자리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한눈파는 사이에 어디서 불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 섣불리 대거리하는 것도 교언으로 무마하려는 것도 상대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다. 일단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몸을 낮추어야 한다.
서로 안면을 익히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잇는 대감들이 많아도 매창은 사사로이 인맥을 이용하려는 염은 내지 않았다. 물정 모르는 사람이 청을 넣었다가 그녀에게 호되게 당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하루 술자리에서 쌓은 정과 말로써 기생이 제 이익을 도모하려 한다면 이 나라 정사가 어찌 되겠사옵니까? 정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장사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쇤네는 술상을 치우는 순간 인연의 끈을 놓아버린답니다. 훗날 인연이 물 흐르듯 제 갈 길을 찾아가는 대로 내버려 두지요. 제가 어찌 다시 인연의 줄을 팽팽히 당길 의지를 갖겠습니까? 그건 제 뜻도, 그분들의 뜻도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매창의 평소와 다른 냉정하고 매몰찬 대답에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은 매창을 다시 찾지 않았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설사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되었다. 나쁜 상황에서의 말이란 언제든 상대를 공격할 칼을 품고 있었다. 어쨌거나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 아닌가. 매창은 곧 자신의 오만함을 반성했다. 현실을 외면한 객기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밥을 벌어주는 일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덕분에 늘 궁핍을 면하기 어려웠다.
 
‘세상을, 사대부를 우습게 알았다. 그것이 나의 병통이었다. 이용해야 하는 대상을 무시하는 건 어리석다. 우스웠기 때문에 웃었고 싫어서 싫다고 했다. 그런 나를 세상은 자기편에 끼워주지 않았다. 준 대로 받은 것뿐이다. 후회는 없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오직 한 사람만이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나의 한 사람은 너무 멀리 있다. 멀다. 이 말을 소리 내서 말해본다. ㅁ과 ㅓ와 ㄹ의 긴 울림이 정말 멀고 먼 거리를 보여주는 듯 길다. 머얼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이 갈급함도 오래 싸워야 하는 적이다.’
 

유희경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매창은 자신의 가슴속을 남의 것인 양 헤집어보았다. 모순되게도 유희경이 자신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탐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그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는 그녀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준 사람이고, 그 모습 그대로 살도록 해준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녀가 가진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내 것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대신 그를 얻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 거리감이, 이 차가운 진실이 두렵다.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마음의 옹이를 녹이고 세상을 향한 눈을 뜨도록 닫힌 마음을 열어주었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보기 어렵네
 

노래를 부르다가 오랜만에 붓을 잡고 그 시를 종이 위에 써본다. 花笑聲未聽 鳥啼淚難看. ‘花’를 쓸 때는 꽃처럼 웃었다. ‘鳥’를 쓸 때는 문 두드리는 손님이라도 있는 듯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눈과 귀는 언제나 문밖을 향해 있다. 생각이 제아무리 꼿꼿하다 한들 몸은 생각을 따라주지 않았다. 몸의 움직임이 검불처럼 가벼웠다. 말에도 심지가 없어졌다. 건듯건듯 가을걷이한 옥수숫대처럼 버석거렸다. 먹을 가는 손목에도 힘이 빠졌다. 그녀는 시 한 수 쓰고 나서 붓을 내려놓았다. 더는 흥이 나지 않았다. 어찌하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일까? 혼자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그녀의 속내를 살필 줄 아는 새로운 벗이 생겼다.

작가소개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건국대 영문과, 연세대 국제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2014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저서로는 소설집『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포토에세이집『On the road』, 에세이집『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매뉴얼 『소설수업』, 번역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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