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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이 만난 사람]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진실을 감추려다 정권 몰락했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특종 보도한 신성호 교수
사망 다음 날 중앙일보서 특종
경찰, 박종철군 고문해 숨지자
변사 처리하려다 보도 후 부검

‘87년 체제’- . 이제 너무나 익숙해진, 개헌 요구까지 나오는 바로 그 체제다. 그러나 그 시작은 감동적인 역사의 전환이었다. 군인들이 주도하던 국정을 끝냈다. 박정희 시대에서 전두환 정부로 이어지던.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전두환 정부까지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총을 쥔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87년 체제는 그런 사이비 민주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87년 체제가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온 국민이 들고 일어섰다. 6월 항쟁에 불을 지른 것이 그해 1월 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다. 30주기다. 이 사건은 사망 다음날인 15일 석간 중앙일보 보도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 그 기사를 쓴 신성호(61) 기자는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다. 최근 그가 『특종 1987』이란 책을 내 30년간 감춰 온 취재 비화를 털어놓았다.

“너무 흥분하고 떨려서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았어요.”

그는 처음 이홍규(80) 대검 공안4과장으로부터 관련 정보를 들었을 때를 회상하며 다시 한번 긴장감에 전율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처음 보도한 신성호 성균관대 교수는 18일 “처음부터 진실을 공개했다면 한꺼번에 매를 맞았을 텐데 감추려다, 축소하려다 국민의 분노가 더 커졌다”고 말했다. [사진 김상선 기자]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처음 보도한 신성호 성균관대 교수는 18일 “처음부터 진실을 공개했다면 한꺼번에 매를 맞았을 텐데 감추려다, 축소하려다 국민의 분노가 더 커졌다”고 말했다. [사진 김상선 기자]

87년 1월 15일. 그는 오전 7시30분부터 당시 서소문에 있던 대검찰청과 서울지방검찰청을 돌아다니며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 취재하고 있었다. 10시가 조금 못 돼 10층에 있던 공안4과장실에 들렀다. 책상에 서서 서류를 보고 있던 이홍규 과장은 신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이 과장은 대뜸 “경찰 큰일났습니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더 이상 말을 안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경계를 풀기 위해 마치 아는 것처럼 ‘그러게 말입니다’ 하며 맞장구를 쳤죠.”

그러자 이 과장은 몇 마디 더 던졌다.

(이)“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신)“아침에 경찰 출입하는 기자에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이)“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는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

신 교수는 가슴이 뛰었다. 더 이상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다른 곳에서 보완취재하기로 하고 그 방을 나왔다.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문을 잠그고 그때 들은 이야기를 취재수첩에 메모했어요. 그리고 바로 신문사로 전화를 했죠. ‘남영동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한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두석 사회부장이 깜짝 놀라서 ‘뭐?’ 하며 고함을 질렀어요. 엄청난 일이었거든요. 그때부터 내무부 치안본부(현 경찰청)와 서울대 출입기자도 보완취재를 시작했어요.”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중이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첫 보도한 1987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 지면.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중이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첫 보도한 1987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 지면.

이홍규씨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도저히 안 되겠다. 일부러 흘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믿을 만한 신 기자를 만나 말하게 됐다’고 했던데.
“나중에 만나서 물어 보니 ‘화가 났다. 이건 아니다. 어떻게 조사하면서 학생을 죽여놓고 이걸 덮으려고 하느냐.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으로서 이건 아니다. 화가 나 있는데 신 기자가 들어왔다’고 말씀하셨어요.”
이홍규 검사는 그 뒤 자주 보셨나요.
“그분은 검사가 아니고 일반직 공무원입니다. 그 뒤에도 계속 봤죠. 봤지만 단 한 번도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두 분이 따로 만나도….
“당시 이분이 첫 취재원이라고 드러나면 옷을 벗기고 구속했을지도 모릅니다. 권위주의 정부였기 때문에. 취재원 보호를 위해 둘이 만나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6월 항쟁 불붙여 직선제 끌어내
워터게이트사건 키운 닉슨처럼
거짓말로 은폐하는 게 더 문제
 
언제 공개하기로 하신 겁니까.
“2012년 제가 고려대에서 박사논문을 쓸 때입니다. 25년이 흘렀고, 또 그분 건강이 안 좋으셔서 생전에 동의를 받아야 밝힐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또 그 몇 년 전(2005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딥스로트’(내부 제보자)였던 마크펠트 전 FBI 부국장도 스스로 고백했고….”
그분도 그러자고 하셨나요.
“처음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신문에 실리는 게 아니다. 논문에 쓰겠다’고 했더니 승낙하셨어요.”
박종철이란 이름은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 이진강 중수부 1과장에게 ‘죽은 서울대생을 고문한 것 아니에요?’ 했더니 ‘쇼크사라고 보고했으니까 조사해봐야지’ 하는 거예요. 이어서 서울지검 공안부 학원담당 김재기 검사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물었어요. ‘죽은 서울대생 이름이 뭐죠?’ 그랬더니 ‘언어학과 3학년 박종○’라고 확인해 줬어요. 그걸 들고 서울대 출입기자였던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언어학과 학적부를 뒤져 ‘박종철’을 찾아냈어요. 인쇄 중이던 윤전기를 세우고 기사를 집어넣었습니다. 12시가 넘어서야 허상천 부산주재 기자가 누나 은숙(당시 24)씨로부터 ‘부모님이 경찰로부터 동생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 서울 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경쟁 언론사에서 난리가 났겠네요.
“기자들이 초판만 보고, 3시쯤 배달된 2판 신문은 잘 안 봤습니다. 외신들이 먼저 중앙일보를 인용해 ‘긴급기사(urgent)’로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어느 신문사 외신부에서 사회부에 알려 그때부터 취재하느라 비상이 걸렸죠.”
당국에선 확인을 안 해줬죠.
“최초로 발표한 게 그날 저녁 6시쯤입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박종철이 간밤에 술을 많이 마셨다며 물을 달라고 하더니 조사 과정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면서 쓰러져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표현은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됐죠.”
협박받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건 없었습니다. 보안사에서 이두석 사회부장을 불러 경복궁 앞 다방에 기다리게 하고는 한참 뒤에 그냥 가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간에 입장이 바뀐 거죠. 치안본부장이 사회부장에게 전화해서 ‘단순 변사다. 오보에 책임져라. 기사 빼라’고 요구했고, 문화공보부 조정관이 편집국장에게 전화해 욕설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진실은 묻히면 스스로 자라나
기사 넣고 빼던 보도지침 시대
언론 통제할 수 있다 착각해
 
언론자유가 위축됐던 시기네요.
“그 당시 국정원·경찰·문화공보부에 언론사 담당이 있어 기사를 넣어라 빼라 조정하고, 기사의 크기까지 지정하는 ‘보도지침’을 내리고 할 때죠.”
숨기려던 게 이 보도로 들통이 났네요.
“기사가 보도된 그 시점에 경찰에서는 아버지에게 거짓말로 위로금 9500만원을 주고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보도가 하루만 지체됐으면 화장을 해 의문사로 남았을 수 있습니다. 기사가 터지니 부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경찰만 축소한 게 아니라고 아는데.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저에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일이 커지니 모두 자기에게 포대기를 씌웠다고.”
이번에 출간한 『특종 1987』에서 에밀 졸라의 말 “진실은 묻혀버리지 않는다. 진실은 지하에 묻히면 스스로 자라난다. 마침내 자라난 진실은 무서운 폭발력을 얻는다”를 인용했던데, 이 사건도 숨기려 한 게 문제를 더 키운 것 아닌가요.
“처음부터 진실을 공개했다면 한꺼번에 매를 맞았을 텐데, 감추려고, 축소하려고 하다 국민의 분노가 더 커진 거죠. 당시 사회부에 전화 많이 왔습니다. 특히 엄마들이 전화해서 말없이 울기만 하다 끊는 경우도 있었고….”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사건 자체보다 은폐·축소하려는 정권의 인식이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닮았네요.
“당시 정권이 언론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거죠.”

그는 “요즘 후배 기자들이 인터넷에 너무 의존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요즘은 검색하면 다 나오니 좋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아쉬운 게 발로 뛰는 게 부족합니다. 발로 뛰는 취재, 현장 확인 취재는 인터넷으로 대체할 수 없거든요.”
 
[S BOX] 고문한 경관 2명 구속, 내무장관·치안본부장 경질
박종철군의 고문치사는 5공 체제를 무너뜨렸다. 민주화 열망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87년 1월 14일 오전 11시쯤 박군이 물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 15일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경찰은 가혹행위를 숨겼다. 17일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기자들에게 “물고문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19일 경찰도 고문을 인정하고 경관 2명을 구속했다. 21일 내무장관과 치안본부장을 경질했다. 26일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특별미사를 열었다. 김 추기경은 지금 하느님이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신다고 했다. 또 그는 경찰 발표를 카인의 대답이라고 말했다.

2월 7일 추도회, 3월 3일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다.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호헌(護憲) 담화’를 발표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사건 진상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21일 검찰은 고문 가담 경찰이 3명 더 있다고 발표했다. 26일 전면개각을 단행했다. 27일 검찰이 은폐 조작 재수사에 착수했다.

6월 9일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10일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민정당은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전국적인 시위와 촛불집회가 계속돼 6·26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졌다. 29일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글=김진국 칼럼니스트 kim.jinkook@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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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