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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일의 직격 인터뷰] ‘뒷광대’ 노릇 할 각오 없으면 문화예술 공직 때려치워라

문화예술계 대부 이종덕이 보는 국정 농단 사태
1974년 소련의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한 정명훈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귀국길 김포공항~서울시청 카퍼레이드에 많은 시민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그때까지 오픈카 하면 큰 국제 스포츠대회 금메달리스트나 타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오픈카를 급히 마련하는 수완을 발휘한 이가 문화공보부 젊은 사무관 이종덕이었다. 평소 형님처럼 따르던 장기영(작고) 한국일보 사장에게 부탁해 미스코리아 대회용으로 쓰던 오픈카를 빌린 것이다.

행정가와 경영자로 반세기 넘게 활약한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산증인, 이종덕(82)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팔순을 넘긴 연령이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12개 정기 모임을 주도할 정도로 건강과 열정이 넘쳐 보였다. 만남도 그 모임의 하나인 예장로터리클럽의 17일 조찬강연 행사 직후에 이뤄졌다. 블랙리스트 파문을 비롯한 작금의 문화예술 국정 농단이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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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앞광대’에 봉사하는 존재
권력 맛봤으면 최순실처럼 됐을 것
주인 노릇 하려면 공무원 그만둬야
‘No’라고 해 물러난 후배들 갸륵해
이종덕 원장은 “창조적 작업을 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상대하려면 문체부 공무원은 뭔가 좀 달라야 한다. 다른 부처보다 자신을 숨기고 더욱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우상조 기자]

이종덕 원장은 “창조적 작업을 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상대하려면 문체부 공무원은 뭔가 좀 달라야 한다. 다른 부처보다 자신을 숨기고 더욱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우상조 기자]

직접 뵈니 ‘영원한 현역’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낭만파 클럽’을 비롯해 문화예술계 모임을 많을 때는 20가지 넘게 운영했다. 요즘은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 줄였는데 그래도 정기 모임만 12개는 되는 것 같다. 오늘 예장로터리 조찬모임을 비롯해 광화문문화포럼, 탄천문화포럼, 허행초모임 등이 굵직굵직한 것들이다. 문화예술인뿐만 아니라 각계의 문화예술 애호가들까지 회원이 총 수백 명은 된다.”
‘뒷광대’임을 자처해 왔다. 무슨 뜻인가.
“ 배우가 ‘앞광대’라면 무대 뒤에서 얼굴 없이 묵묵히 땀 흘리는 사람들이 ‘뒷광대’다. 나 같은 문화 공무원이나 공연예술 경영자들이 할 일이 바로 뒷광대다. 자신을 비우고 문화예술인과 애호가들에게 봉사하겠다고 생각해야지, 스스로 주인공으로 나서고 싶은 사람은 이쪽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다. 참으로 많은 배우·음악가·제작자와 더불어 일해 왔다. 스타가 된 사람들은 새처럼 창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나를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그런 게 서운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숱한 무대를 만들었고 무대 또한 나를 만들었다. 내 인생은 무대 인생이었고, 무대 인생은 내 인생 무대였다.”
요즘 사기가 떨어진 문화예술 분야 공무원들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 같다.
“실세다 뭐다 하는 존재에 우리는 어느새 너무 민감해졌다. 출세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도 늘어난 것 같다. 나눔과 봉사의 철학은 다른 말로 하면 불의나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소신 있게 일하는 것, 권력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예술가들을 도와준 다음에 최대한 물러나 있으려 했다. 그게 그들을 살리고 그 이전에 나를 살리는 길이다. 문화예술 행정가와 경영자의 길은 화려하지 않다는 점을 늘 되새기고 실천하려고 애썼다.”
1963년부터 20년간의 문화공보부 공무원 시절을 지금과 비교한다면.
“문화예술 행정의 기틀을 닦는 시기여서 그랬는지 공직자의 본분을 의식하고 사명감을 불태우는 관료가 많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론 이런 일이 있었다. 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직전에 경남 진해 벚꽃놀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우연히 박정희 대통령 부처 바로 옆자리에 합석해 꽤 장시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전통문화를 해외에 제대로 알리라고 대통령이 지시했는데, 대통령이 일개 젊은 사무관과 머리를 맞대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장면을 주변에서 목격한 각계 고위 인사들은 ‘이종덕이 문화부 실세’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흐뭇하긴커녕 겁이 더럭 났다. 이승만 정권 시절 큰 스캔들이었던 ‘가짜 이강석 사기 사건’이 떠올랐다. 내가 그때 힘깨나 있는 듯 거들먹거렸으면 오늘날 최순실처럼 됐을 것이다.”

‘문체부=낙하산 부처’ 오명 벗어야
정명훈 카퍼레이드 가장 기억 남아
진보·보수 정권 20년 두루 일해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구시대 잔재

 
요즘 국정 농단 사건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쑥대밭이 됐다. 선배로서 착잡하겠다.
“‘문공회’라고 나이 든 문공부 왕년 간부들 모임이 있는데 가 보면 참담한 분위기가 되곤 한다. 탄식하다 눈물짓는 이도 있다. 요컨대 상관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여기면 들이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꼭 맞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시절에는 어린 사무관만 해도 나름의 오기가 있었다. 가령 장관이 갑자기 사무관들을 모아 오찬이라도 하자고 하면 “선약이 있어 못 간다”고 버티는 이들이 있었다. 5공화국 때는 개인적으로 공개석상에서 장관한테 못마땅한 것을 따지기도 했다. 당연히 괘씸죄에 걸렸겠지만.(웃음)”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체육·관광·미디어 네 가지 큰 분야를 한데 묶어 놓은 부처다. 그래서 일개 독립 부처로서 정체성과 주인의식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문화와 체육을 따로 떼어 냈으면 하는 바람이 문화예술인과 체육인 양쪽 진영에 다 있다. 문체부가 국정 농단의 집중 표적이 된 데는 이런 조직 체계의 특성과 어수선한 분위기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80년대 문화공보부만 해도 안정감이 있었다. 하지만 체육·관광이 들어와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보니 아무래도 조직이 산만해졌다. 무엇보다 문체부를 가볍게 보는 시각이 생겼다. 누구나 들어와 할 수 있는 분야라고 만만하게 보이는 빌미를 제공했다. 정권을 잡은 사람 입장에서 공신들을 쉽사리 내려보낼 만한 곳으로 간주됐다. 외부 출신 장차관이 가장 많은 곳이 문체부다. 예전에는 문공부가 재무부나 내무부 같은 힘 있는 부처보다 인기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 후 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게임산업도 관장하고 프로젝트·산하단체가 많아져 인기가 올라갔다. 그런 마당에 이런 수난을 당하는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낙하산 인사나 부정청탁·외압을 감시하는 눈이 많아졌다. 하기에 따라 문체부가 거듭날 수 있는 호기다.”
문화예술인의 자세도 중요할 것 같다.
“문체부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도 문제지만 영합하는 공무원, 또 그 틈에서 잇속 차리기나 매명에 몰두하는 문화예술인도 반성해야 한다.”
문화예술 산업이나 행정이 외부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선순환적 생태계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납세자의 공복(公僕)이란 생각을 투철하게 가지면 된다. 우리 때는 불의와 외압에 맞서는 관료의 기백 같은 것이 있었다. 이명박 정권 때 문체부 산하 한 공공단체의 기관장 후보에 1순위로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결과는 탈락이었다. 청와대에 있는 후배가 “들러리인 줄 모르셨느냐. 왜 응했느냐”고 나중에 안타까워하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두 가지가 실망스러웠다. 문체부 산하 기관장 인선을 문체부가 하지 않고 청와대가 한 것이 그렇고,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후배가 1순위로 올라간 후보를 시켜야 한다고 소신 있게 진언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이게 우리나라 공직사회 수준인가 싶었다.”
진보·보수 정권 20년을 거치는 동안 부침 없이 공연예술계 요직을 두루 하셨는데.
“내가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일 때 DJ 정권이 들어섰는데 보수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이라 요즘 같으면 중도 하차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임기를 마쳤다. 그리고 DJ 정권에서 민영화 세종문화회관의 초대 사장도 했다. 이후 보수 정권인 이명박·박근혜 시절에서도 중요한 일들을 했다. 비결은 정치 쪽은 기웃거리지 않고 문화에 대한 열의와 전문성으로 승부한 덕분이라 생각한다. 세종문화회관 사장 시절에는 힘깨나 쓰는 여당 국회의원한테서 인사 청탁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거부했다. 그러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정치 바람을 타지 않은 덕분이다.”
블랙리스트 파문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치자 이념에 맞지 않는 문화예술계 인사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반복되고 있다. 이런 일을 구조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는지. 문화예술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남북한 대치 상황에서 종북 세력까지 용인하기는 어렵다. 문화예술계에서도 그런 극단적인 인사가 있다면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또 이념이 다르다고 명단까지 작성해 정부 지원에서 차별을 두는 것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거다. 김대중·노무현 시절에도 민예총 쪽의 진보 편향이 있었다. 보수 정권 들어서는 시계추처럼 그 반대의 움직임이 반복되고 있다. 요즘 블랙리스트도 그 연장선상이다. 부산영화제도 그렇고 광주비엔날레도 그렇고 특정 영화, 특정 화가 그림의 이념과 시각이 문제된다고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건 하책에 속한다. 작품의 가치는 청와대나 문체부·부산시가 정하는 게 아니라 문화예술 공론과 비평의 시장에서 판가름 내야 한다.”
청탁금지법, 이른바 김영란법이 문화예술계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법 시행 후 많은 분야에서 적응해 가고 있지만 공연예술계는 적응하기 가장 힘들다. 작품 제작에 피해가 크고 이는 종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주름살을 준다. 기업이 공연표를 단체구매해 직원이나 고객에게 나눠주는 일, 문화복지나 문화접대는 활성화돼야 한다. 그동안 커 가던 기업 메세나 시장도 줄게 생겼다. 특히 순수예술은 선진국도 자생력이 매우 떨어지는 분야다. 문화예술 현장을 알아야 할 문화 담당 공무원들도 의심받을까 봐 공연 현장 방문을 꺼린다. 독지가와 문화예술계를 갈라놓는 폐단이 크다. 법을 발의할 때 공직자 부패 방지를 겨냥했지 문화예술계를 규제하려고 한 것은 아닐 거다. 상식선에서, 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조정이 되어야 한다.”
공무원 재직 기간(20년)보다 더 오랜 30여 년을 예술경영 쪽에 종사했다. 우리나라의 예술경영 수준은 어디에 와 있는지. 숙제는 무엇인지.
“70년대까지 예술행정이 주도했다면 80년대 이후 민간 예술경영이라는 분야가 싹텄다. 요즘엔 대학에 관련 학과가 생기고 관련 산업도 두터워졌다. 문화예술 학자뿐만 아니라 공무원들도 예술경영에 관한 저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제 로봇과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문화예술이 미래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으려면 변신해야 할 것이다.”
 
‘공연계의 대부’ 이종덕은…
오운(梧雲) 이종덕(李鍾德)은 별명이 많다. 국내 문화예술계 인맥을 거의 꿰고 있다고 해서 ‘거미줄 네트워크’라고 한다. 김동호(80)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과 함께 우리나라 문화예술 행정의 초석을 다진 ‘문화행정가 1세대’로 꼽힌다. 간판 국공립 극장들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경영자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1호 공연예술 CEO’라는 칭호도 있다. 그의 주변엔 늘 문화예술인들로 북적인다. 경복고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채 1기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63년 공보부에서 문화예술과 연을 맺었다. 20년간의 문공부 공무원 생활을 접고 8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로 예술단체에 발을 디딘 이래 서울예술단 이사장(94),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95),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95), 세종문화회관 사장(99), 성남아트센터 초대 사장(2004), 충무아트홀 사장(2011), KBS교향악단 이사장(2012) 등을 지냈다. 저서로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 『공연의 탄생』이 있다.
글=홍승일 논설위원
사진=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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