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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시뮬라크르 #9. 무채 계열의 빨강 (2)

미리 개발해 놓은 프로그램을 서버와 연결하는 형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서버의 기능이 업그레이드됐다. 부재중일 때에도 사용자가 이용하던 패턴에 따라 자동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탑재되고, 스마트폰을 위한 애플리케이션도 출시됐다. 아바타들도 정교하게 진화했다. 짐작대로 카멜은 이 일을 꽤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이 모든 일들이 몇 주 만에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세영도 처음에는 데스크톱에만 설치했던 프로그램을 노트북에도 깔았다. 이동 중에도 스마트폰을 거치대에 끼워놓고 외출모드로 접속하여 남편을 깨웠다. 화면이 작아서 답답하기는 했지만 차가 밀리는 도로 위에서도 혼자 움직이는 남편을 볼 수 있어 즐거웠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열어 놓은 앱을 화면에서 숨겼지만, 모기업 회장 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들러 그녀가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작품 목록을 받을 때도 남편은 혼자 깨어 움직이고 있었다.
 
세영은 갤러리에서 나오자마자 폰으로 목록을 찍어 회사로 전송했다. 실소유주들을 파악하라고 지시하고 정보 수집을 위해 세영도 따로 은밀하게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느라 훌쩍 점심때를 넘겼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들고 회사로 들어오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서버를 띄웠다. 폰의 앱을 닫음과 동시에 노트북으로 로그인했다. 현관 앞 모드였다.
남편이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반기면서도 비밀번호는 잊었느냐고 놀리는 몸짓이 다정했다.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하고 들렀다고 말하자 남편은 그러잖아도 배가 고팠던 참이라면서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세영이 갤러리에 있을 때 폰 안에서 남편이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세영도 샌드위치의 포장을 풀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대화창에 <와아, 맛있겠다>하고 입력했다. 남편의 표정이 더없이 흐뭇해 보였다. 세영은 한쪽 손으로는 샌드위치를 들고 한쪽 손으로만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해 자신의 아바타를 식탁 앞에 앉혔다. 그리고 남편과 수다를 떨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회의 시간이 다 되어 남편에게는 회사에 다시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부재중 자동모드로 변환했다. 화면 속에서는 남편이 현관 밖까지 나와 세영을 배웅하는 것으로 처리됐다.
회의를 진행하며 프로그램 서버 창을 조그맣게 줄여놓고 남편을 산책시켰다. 잠깐 이야기가 길어져서 회의에 몰두하다 보니 남편이 또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본사와 통화하다가 세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수화기 저편에서 잠시 침묵하며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옆에 있는 직원이 커피를 쏟아 웃었다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남편이 산속의 약수터에서 초로의 한 사내를 만나고 있었다. 언젠가 독일에 본사를 둔 브랜드의 트레이닝복 두 벌을 사 와서, 한 벌은 남편에게 선물하고 한 벌은 최 화백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남편이 만난 초로의 사내가 바로 그 트레이닝복을 입은 최 화백이었다. 카멜에게 보낸 자료 중에는 셋이서 함께 찍은 사진이 끼어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일 것이다. 세영은 항상 표정도 없이 굳어 있는 카멜의 숨겨진 유머가 즐거웠다.
수화기를 놓고 펜을 들어 서류를 보면서 노트북을 힐끔거리다가 작게 줄여 놨던 창을 전체 화면으로 확대했다. 남편이 돌확의 가장자리에 낀 살얼음을 깨서 손을 씻고 손의 물기를 털어 바지에 닦았다. 그 손으로 물을 받아 마시고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남은 물기를 탁탁 털어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반면 최 화백은 점퍼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손과 입을 닦았다. 남편이 먼저 최 화백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쪽 아랫마을에 사시나 봐요?”
 
최 화백이 남편을 쳐다봤다.
 
“저는 저 산을 넘어왔거든요.”
 
남편의 말과 동시에 세영은 얼른 접속을 끊었다. 끊고 나서야 남편의 방향을 설정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접속하려 하는데 손에 쥔 마우스가 자꾸만 어긋난 포인트를 찍었다. 서버와 연결되는 시간도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화면 속의 남편은 접속을 끊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혼자 샘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 최 화백과 함께 어떤 노인과 노파가 걸려 있었다. 그들은 샘터 쪽을 힐끔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세영은 얼른 <집으로>로 설정을 변경하고 프로그램을 정상 종료시켰다.
물을 마시기 전에 손을 씻고 물기를 털어낸 뒤 바지에 문질러 닦고, 입가의 물기를 손으로 훔쳐내 다시 바지에 닦아버리는 일련의 행동들은 세영이 무척이나 싫어했던 남편의 버릇이었다. 남편은 집에서 컵에다 물을 마실 때도 항상 같은 행동을 했다. 손이 닿는 곳에 바로 냅킨이 있고 주방 수건도 늘 제자리에 걸려있는데도 손으로 입을 닦고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서도 일단 손의 물기를 털어 바지에 닦고 나서야 수건을 사용해 얼굴을 닦았다. 어릴 때부터 수건은 항상 깨끗이 써야 한다고 말하던 양어머니에게 잘 보이려다 생긴 버릇이라고 했다. 집안 곳곳에 수건을 걸어두는 것으로 그 버릇을 고치는 데 거의 삼 년이 걸렸다. 남편의 아이템으로 유난히 수건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도 남편의 트레이닝복 주머니에는 양쪽으로 각각 한 장씩의 휴대용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세영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저 안의 남편은 정말 아바타일 뿐일까? 혹시 그의 영혼이 심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쩌면 남자들은 다 그런 버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카멜이나 아바타를 관리하는 직원들 중 누군가의 버릇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버릇을 자신도 모르게 프로그래밍해 놓았을 것이다.
세영은 서버에 접속해 있는 시간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내내 접속하지 않았다.
생각난 김에 한동안 들르지 못했던 최 화백에게 들러보기로 했다. 남편과의 실생활 게임에 빠져 한동안 일에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이제라도 정신을 좀 차리자고, 세영은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퇴근길에 먼저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서 전화해 보니, 웬일로 최 화백이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어있었다.
 
“전화 받으시라고 할까?”
 
“아니에요, 주무시게 두세요. 그냥 한 번 찾아뵈려 했어요. 따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늦게라도 일어나실지 모르는데……”
 
“내일이나 모레쯤 들를게요.”
 
“그렇게만 전해?”
 
“네, 그렇게 전해주세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와서도 세영은 일찍 자려고 했다. 하지만 초저녁부터 혼자 있으려니 빈집의 적막이 실감되어 쓸쓸했다. 어둠 속에 누워 뒤척이다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홀로 잠든 남편을 보자 묘하게 슬픔이 솟구쳤다. 별것도 아닌 일로 하루 종일 잠만 재운 것 같아 미안해졌다.
세영은 귀가 모드로 남편을 깨웠다.
오랜만에 같이 스토어로 나가서 식사하고 아이템을 쇼핑하고 짧은 영화도 한 편 봤다. 스토어 너머의 강가까지 산책을 갔다 돌아와서 카멜이 부부 아바타들을 위해 만들어 봤다면서 특별히 따로 넣어 준 섹스 모드를 시험해 봤다. 화면을 잡는 각도나 크기도 그렇고, 아바타들의 다양한 체위나 효과음 등 기대했던 것보다 생생해서 만족스러웠다. 시험 모드가 끝나자 남편을 재우고 모니터를 켜 둔 채로 세영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전에 없이 늦잠까지 자 버렸다. 남편에게 출근 인사를 할 시간도 없어 외출모드로 메모만 남겨놓고 나왔다. 여느 때처럼 출근길의 자동차 안에서 남편을 깨우려고 보니 <아침밥>이라는 버튼이 생성되어 있었다. 지난밤만 해도 볼 수 없었던 기능인데 밤새 업그레이드된 모양이었다. 호기심에 그것을 먼저 터치해 봤다. 주방으로 화면이 바뀌며 식탁에 반찬들이 차려졌다. 가스레인지 위에도 국이 담긴 냄비가 생기고 전기밥솥의 꼭지에서도 뜨거운 김이 새어 나왔다. 카멜의 아이디어인지 다른 직원의 아이디어인지, 아침밥은 남자들의 로망인가, 세영은 피식 웃고는 안방 화면으로 들어가 부재중으로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이제 빈집에서 혼자 일어나도 어리둥절해 하지 않았다.
남편은 하루 종일 나른하게 시간을 보냈다. 집안일을 하고 낮잠도 자면서 예전처럼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내고 있었다. 서재까지 완벽하게 꾸며지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기능들의 놀라운 발전에 비해 오히려 전자책 사이트의 콘텐츠를 채우는 일의 진행이 더뎠다. 전자책으로 출판되어 있는 것은 구입해 오면 됐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새로 제작해야 했다. 예상했던 대로 저작권이나 출판권 문제가 걸려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
세영은 회사에서 나와 저녁식사 장소로 이동하면서도 남편을 계속 지켜봤다. 지난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비롯하여 입선권에 든 신인들을 불러 함께 하기로 한자리였다. 아직 이름이 나기 전에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하는 것이라 그들의 면면을 잘 살펴야 했다.
 
교통상황을 감안하여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했더니 십분 가량 일찍 도착했다. 젊은 친구들과의 자리인데 먼저 들어가 앉아있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주차장에서 이십 분쯤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세영은 남편에게도 맛있는 걸 먹이고, 이왕이면 혼자 스토어에 가서 물건도 사게 하고 영화도 보게 하고 싶었다.
스토어로 가던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를 쳐다보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이내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화면에 곧 버스 정류장이 나타나고 거기 혼자 앉아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예라였다. 세영은 예라 엄마가 근처에 있나 하고 화면의 배율을 줄여 근방을 살폈다. 어디에도 예라 엄마는 없었다.
남편이 예라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남편의 음성은 지원되는데 예라의 음성이 지원되지 않았다. 자막 모드로 돌려봐도 마찬가지였다. 세영은 남편의 말로 예라가 혼자 깨어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른 폰에 저장되어 있는 예라 엄마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라 엄마는 예라 아빠와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가 있다고 했다. 아침에 접속했다가 갑자기 예라 아빠가 들어오는 바람에 재빨리 접속을 끊는다는 게 그만 모드 변환을 안 시킨 모양이라고, 지금 예라 상태는 어떠냐고 물었다. 일단 남편이 저녁을 먹이기 위해 스토어로 데리고 가는 걸로 처리했는데, 다행히 예라가 순순히 따라오고 있다고 전했다. 예라 엄마는 또 울먹이기 시작했다. 무슨 수든 내봐야겠다면서 황급히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남편이 예라와 함께 13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혼자 깨어있었다면 점심도 굶었을 터였다. 역시나 예라는 음식들이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세영이 남편을 통해 음식을 더 주문하고도 한참 지난 후에야 예라 엄마가 나타났다. 그제야 예라 쪽의 음성이 지원되고 자막도 지원됐다. 예라 엄마는 예라를 안고 울었다. 남편에게도 고맙다고 말하며 울었다.
예라 엄마가 예라를 데리고 나가고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방금 화면에서 사라진 예라 엄마였다. 예라 아빠에게는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대고 먼저 들어왔다고, 예라는 지금 무사히 다시 재웠다고 말하며 흐느꼈다. 그녀는 예라 아빠에게 들킬까 봐서 폰으로는 아예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 울음 끝이 질겼다.
그러느라 예정 시간보다 사십 분이나 늦어버렸다. 세영은 자동차에서 내려 매무새를 고치고 약속 장소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또 예라 엄마인가 싶어 짜증이 났다. 받지 않을까 하다가 상대를 확인해 보니 최 화백이었다. 어제 전화로 오늘이나 내일쯤 들른다고 했었던 걸 잊고 있었다. 최 화백은 시간이 되면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세영은 일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되고 내일쯤 가겠다고 했다.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선생님?”
 
“아니야, 그냥. 알았어. 그럼 일 봐.”
 
“내일 뵐게요.”
 
“그래, 끊어.”

 
오랜만에 만나는 젊은 열기가 싱그러웠다. 그림에 대한 열정과 패기도 만만치 않았지만 놀기도 참 잘들 놀았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던 10여 년 전에 만난 젊은이들과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른 모습들이었다. 그때는 신인이라고 해도 세영보다 조금 어리거나 또래들이었다. 그래도 국제적 에이전시 소속의 세영을 어려워하고는 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나를 사가시오, 당신에게 손해되지는 않을 것이오, 하는 식의 치기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밉지 않았다.
식사하면서 곁들인 맥주에 발동이 걸려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취기가 올라 다들 클럽으로 몰려갔다. 얼결에 세영도 휩쓸려갔다. 부딪히고 비벼오는 젊고 단단한 몸들에 세영은 당황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벽 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세영의 명함을 받아든 젊은이들은 내일이나 모레쯤 각각 제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 올 것이다. 모여 있을 때의 치기 따위는 죄다 갖다 버리고 무척이나 공손한 개인이 되어서는.
 
세영은 집으로 돌아와 1인용 소파를 책상 앞으로 끌고 와 앉았다. 옷을 벗고 얇은 담요만 두른 채 섹스 모드로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뒤척이다가 몸을 돌려 안기만 할 뿐 섹스 모드가 작동되지 않았다. 마우스로 여러 번 클릭하다가 마우스를 던지듯 놓아버렸다. 시험 모드라 해도 처음부터 잘 좀 만들 것이지 이게 뭔가 싶었다. 세영은 뒤척이며 끌어안기만 하는 남편 곁에 자신의 아바타를 누이고 부드러운 담요에 덮인 제 몸을 만졌다. 클럽에서 부딪혀 오던 젊고 단단한 몸들을 상상했다. 그들과의 밤을 상상했다. 어떻게 해도 달뜬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았다.
부회장과의 밤이 문득 그리워졌다. 남산 자락에 위치한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내려다보는 야경도 그리워졌다. 등 뒤로 와서 안던 그의 단단한 가슴과 팔과 다리가, 아니 뼈와 살과 체온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괜찮지 않을까.
세영은 자신의 아바타를 끌어안은 채로 깊이 잠든 남편을 바라보며 조금 울다가 접속을 끊고 나와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작가 소개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소설창작학과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나무젓가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제2회 EBS 라디오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단편소설집 『붉은 나무젓가락』, 장편소설 『수목원』,
그림동화 『옥상에 텃밭이 생겼어요』
옴니버스 에세이집『가족이 힘이다』『수업』『가족, 당신이 고맙습니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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