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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초에 부닥친 이재용의 실리콘밸리식 혁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서 국민연금의 찬성표를 받는 대가로 최순실씨 모녀, 미르·K스포츠재단 등에 200억원 이상을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2일 서울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서 국민연금의 찬성표를 받는 대가로 최순실씨 모녀, 미르·K스포츠재단 등에 200억원 이상을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2일 서울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삼성이 1938년 창립 이후 최대 시련을 맞고 있다.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최고 수뇌부의 리더십 공백 위기에 봉착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 중인 특별검찰은 이르면 15일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 부회장뿐 아니라 미래전략실장인 최지성 부회장, 미래전략실 차장인 장충기 사장 등 그룹 최고경영진도 사법처리 위기에 몰리고 있어 삼성의 장래가 시계(視界) 제로의 상태에 빠졌다.

삼성 내부에선 이 부회장이 구속기소될 경우 자체적으로 추진한 경영혁신 작업에 제동이 걸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삼성은 이 부회장 주도로 이사회 권한 강화와 주주 중심 정책을 통한 경영의 투명성·책임성 강화를 추진해 왔다. 이른바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뉴 삼성’ 플랜이다. 이를 위해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등기임원을 맡기도 했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지주회사로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도 어려워질 수 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미래전략실 해체와 대형 인수합병(M&A) 등 그룹의 기본 틀을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를 실행할 주체와 동력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올해 사업계획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연말 사장단과 임원 인사,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시상식, 조직 개편, 최고경영자(CEO) 세미나 등 주요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올해 투자와 채용 등 기본적인 경영 계획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매년 12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경기도 용인연수원에 최지성 부회장 주재로 미래전략실 팀장과 각 계열사 사장이 모여 경영 전략을 수립하던 사장단 워크숍도 이번 사태로 열지 못했다.

사업 측면에서도 환경은 녹록지 않다. 지난해 11월 80억 달러(약 9조4000억원)에 사들이기로 한 전자장비업체 하만 인수 작업부터 암초를 만났다. 지난 3일 하만 소액주주들은 디네시 팔리월 CEO를 비롯한 하만 이사진을 대상으로 너무 싼값에 팔았다며 집단소송을 냈다. 바이오 사업 확대를 위한 해외 사업 파트너 물색도 제동이 걸릴 위기다. 삼성전자의 프린팅솔루션사업부 매각 등 사업 재편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휼렛패커드(HP) 등 미국 기업들은 뇌물죄 혐의에 민감하다.
국가 경제에 미칠 타격도 적지 않아
삼성은 2008년에도 특검의 이건희 회장 기소에 따른 경영권 공백으로 태양광과 발광다이오드(LED) 등에 대한 투자 시기를 놓친 적이 있다. 2010년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 회장은 두 사업을 ‘5대 신수종사업’에 넣고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이미 선발업체와 격차가 벌어진 뒤였다. 삼성 관계자는 “검찰 조사가 시작된 지난해 11월 이후 이 부회장은 해외 출장에도 나서지 못하고 있다”며 “매출의 90%가 해외에서 발생하는 글로벌 기업의 CEO에게는 치명적인 핸디캡”이라고 말했다.

삼성의 경영 실적이 악화되면 국가 경제에도 타격은 불가피하다. 삼성전자의 2016년 잠정 매출액은 201조5000억원, 영업이익은 29조2200억원이다. 다른 계열사의 실적까지 합할 경우 그룹의 연간 매출은 300조원을 넘는다. 지난해 한국 정부 연간 예산(387조원)의 80%에 육박한다. 국내 고용 인원만 25만 명을 넘는다.

하지만 최근 최순실 사태에 연루된 기업인 수사가 전방위로 이뤄지면서 재벌 해체와 같은 ‘대기업 때리기’ 풍토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수사 과정에서 삼성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내놓은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음에도 모금을 대가로 특혜를 봤다는 일방적 주장과 ‘재벌 손보기’ 구호가 난무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자칫 기업의 경제 활력을 떨어뜨려 투자·고용 감소로 인한 서민경제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우려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기업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위축되면 세금은 누가 내고 수출은 누가 하느냐”며 “특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기업 정서, 포퓰리즘 정책이 난무할까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해외 여건도 삼성과 한국 경제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생산하는 삼성전자 세탁기에 대해 최대 50%에 달하는 반덤핑 관세를 확정했다. 보호무역 기조를 명확히 밝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공식 출범하기도 전인데 통상 압력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중국 정부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를 문제 삼아 한국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아마존이 미국 내 일자리를 10만 개 늘리겠다고 나서고 일본 도요타와 중국 알리바바도 미국 투자 증액을 약속하는 등 트럼프를 향해 앞다퉈 러브콜을 보내는데 이 부회장은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앞서 중국 마윈 알리바바 회장, 일본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 등 글로벌 기업의 CEO들이 잇따라 트럼프 당선인과 회동하며 사업계획을 논의한 것과 대조적이다.
"성과주의에 집착하다 위기 자초" 분석 나와
블룸버그는 “만약 특검 혐의가 사실로 확인되면 수년간 준비돼 온 이 부회장의 승계 작업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삼성으로선 글로벌 시장에서 수십 년간 어렵게 쌓아 올린 이미지가 단번에 추락함과 동시에 경영권에 대한 해외 투자자의 불신까지 받게 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삼성이 이 같은 위기에 몰리게 된 데는 눈앞의 성과에만 집착하는 기업문화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이 부회장은 실용주의를 기반으로 한 실리콘밸리 스타일 혁신 작업을 추구해 왔지만 미래전략실은 여전히 20세기 구조조정본부식 사고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논란이 대표적이다. 이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예나 지금이나 1%가 안 된다. 반면 삼성물산은 2015년 3월 당시 삼성전자 지분을 4.1% 보유 중이었다. 이 회사를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23.2%)인 제일모직(옛 에버랜드)과 합병해 삼성전자 지배력을 높인다는 게 미래전략실의 계산이었다.

결국 2015년 7월 임시주총에서 제일모직 주식 1주당 삼성물산 주식 0.35주를 주는 방식으로 합병안이 통과됐다. 특검은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합병안에 찬성하도록 청와대 등을 통해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은 “합병비율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한 달간의 주가 등을 반영해 결정되는 것”이라며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자본시장법은 ‘계열사 간 합병의 경우 10% 범위에서 할인 또는 할증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일모직을 10% 할인하고 삼성물산을 10% 할증하면 합병비율은 1대 0.42가 된다. 국민연금이 당초 적정 수준이라고 평가한 1대 0.46과 비슷한 수준이다. 익명을 요청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손해를 보는 쪽으로 합병비율을 조정했다면 통합 삼성물산의 지분율은 1%포인트 정도 낮아졌겠지만 특혜 논란은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라며 “최상의 결과만을 고집하는 삼성의 완벽주의가 결과적으로 재앙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병철 창업주 시절부터 삼성은 ‘관리의 삼성’으로 통했다. 미리 정보를 수집해 충분히 사전작업을 하고 일을 벌이는 치밀한 기업문화를 빗댄 말이다. 현재 삼성이 최고 의사결정 3인의 사법처리 위기에 몰린 이유는 삼성식 관리의 부작용이란 분석이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무결점주의, 1등주의가 되레 오너의 사법처리라는 화를 부른 형국”이라며 “삼성은 그때그때 최선책만을 찾았을 뿐 법과 원칙에 기반하지 않은 경영을 해 왔다는 여론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투명성 강화 기대" 삼성전자 주가는 강세

이같은 위기 상황에도 삼성전자의 주가는 지난 12일 주당 194만원으로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13일에는 187만3000원으로 소폭 조정을 받았지만 이건희 회장이 쓰러졌던 2014년 5월 10일(133만5000원)에 비하면 40.2% 올랐다.

D램 공급 부족에 따른 반도체 호황으로 지난해 4분기 추정 영업이익 9조2000억원을 거두는 등 실적 호조 덕이다. 송성엽 브레인자산운용 대표는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으로 짜여진 삼성전자의 포트폴리오는 자사 부품만으로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종합 전자업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탄탄하다”며 “최근 주가 호조는 이번 특검 수사가 단기적으로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투명성이 강화되고 지배구조가 선진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반영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창우·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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