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7인의 작가전] 시뮬라크르 #8. 무채 계열의 빨강 (1)

혁은 더 누워있고 싶었다. 지난밤 아내와의 섹스는 달콤했다. 그대로 잠들었다가 꿈도 없이 이제 막 깬 참이니 아직 그 기분에 취해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벌써 출근했는지 집안 어디에서도 기척이 없었다.
덜 깬 잠의 몽롱함이 가시고 슬슬 시장기가 느껴질 때쯤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요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어쩐 일인지 식탁에 상을 봐 놓고 나갔다. 조금씩 정갈하게 담긴 반찬들이 조각보로 잘 덮여 있고 밥공기와 국그릇 옆의 수저와 저분도 가지런했다. 그 옆으로 아내가 남긴 쪽지도 있었다. 오늘 밤에는 약속이 있어 늦겠지만 내일은 다시 기대해도 좋다면서, 반짝이 스티커를 다섯 개나 붙여 놓았다. 아내도 만족스러웠다는 뜻이었다. 별이 다섯 개, 영화에 평점을 매기듯 아내와 둘만의 사이에 매기는 은밀한 별점이었다.
혁은 아내의 쪽지를 손에 든 채로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마른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낸 시래기 된장국이었다. 구수한 냄새가 훅 끼쳐 올라와 더욱 시장기를 돌게 했다. 혁은 불을 댕기고 쪽지를 잘 펴서 냉장고에 붙였다.
국이 데워질 동안 기다리지 못하고 밥통에서 밥을 퍼서 식탁 앞에 앉았다. 계란말이와 멸치볶음과 베이컨으로 말은 채소 찜으로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콩을 싫어하는 혁의 입맛에 맞게 흑미와 보리를 주로 하여 몇 가지의 잡곡만 넣은 밥에서는 검은빛 윤기가 흘렀다. 혁이 모르게 요리학원이라도 다니는지 아내의 솜씨가 무척 좋아져 있었다. 신혼 때부터 요리는 대부분 혁의 몫이었다.
반 공기쯤의 밥을 더 퍼서 국과 함께 먹었다. 한 사발의 국을 더 떠서 국만 먹었다. 접시에 담긴 반찬까지 남김없이 긁어서 마저 먹었다. 남은 음식을 따로 갈무리할 필요도 없이 그릇들이 말끔해졌다.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가져가 세제를 풀어 닦았다. 뽀득거리도록 헹궈서 식기건조기에 넣고, 건조와 살균 버튼을 한 번씩 눌렀다. 식탁의 얼룩을 닦고 싱크대의 물기도 닦고, 행주를 빨아 전자레인지로 5분간 돌려 잘 펴서 널었다.
내친김에 세탁기도 돌릴까 하여 베란다로 나갔다. 생각보다 빨랫감이 없었지만 저 수위로 놓고 세팅했다. 세탁기의 뚜껑을 닫고 베란다 창을 열었다. 바깥쪽이 얼었는지 잘 열리지 않아 손바닥으로 아래쪽을 탕탕 치면서 열었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가 훅하고 끼쳐들었다.
베란다의 나머지 창들도 전부 열어놓고 거실의 유리문도 활짝 열었다. 부엌 쪽 베란다 창도 열고 침실과 서재, 손님방과 옷방, 창고 등도 모두 열어 공기를 순환시켰다. 방마다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스팀 걸레로 문질러 닦았다. 전용 세제를 풀어 욕실과 변기 청소까지 마치고 따뜻한 물로 샤워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세탁이 다 되어 있었다. 헹굼과 탈수만으로 세팅해놓고 섬유 유연제를 넣었다. 열려 있는 창문들을 전부 닫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혁은 늘 그게 그거인 지상파 방송보다 등장하는 인물도 문화도 낯선 케이블을 더 선호했다. 광고가 많고 본방송보다 재방송이 더 많기는 하지만 덜 꾸며진 듯 어색하면서도 경직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좋았다. 외국의 시골 모텔에 틀어박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지껄여대는 그들만의 문화를 대하고 있는 듯 낯설고 막막해지며 적당히 외로운 기분에 빠져들기도 했다. 여행을 가지 않고도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랄까. 마땅한 채널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사이에 세탁이 다 됐다는 알람이 울렸다. 뉴스 채널에 화면을 고정시키고 소리를 좀 더 키운 다음 베란다로 나갔다.
몇 개 되지 않는 빨래를 탁탁 털어서 널고 돌아와 보니 TV 화면이 하얬다. 혁은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렸다. 어떤 채널도 마찬가지였다. 지상파 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수신 단자는 정상적으로 꽂혀 있었다. 접촉이 불량한가 싶어 뺐다가 다시 꼈다. 마찬가지였다. 각 가정으로 송신하는 중계 박스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혁은 인터폰을 들고 경비실을 호출했다. 경비실이 비었는지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TV의 전원을 끄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빨래에 넣었던 섬유 유연제 냄새가 열린 거실 문을 통해 베란다로부터 상큼하게 실려 들어왔다. 집안일 뒤의 기분 좋은 나른함이 온몸을 감쌌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밥을 먹고, 집안일을 하고 낮잠을 자면서 시간 감각을 잃었다. 아내는 늦는다고 쪽지를 남겼으니 저녁도 혼자 해결해야 했다.
혁은 산책도 할 겸 스토어로 슬슬 나가보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마땅한 영화가 있으면 한 편 보고, 간단하게 장을 봐 와서 내일 아침은 오랜만에 혁이 준비하기로 했다.
가볍게 걷는 듯 뛰는 듯 스토어로 가는 길에 영화관에서 아내와 그 엄마와 함께 만난 적 있는 예라라는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그쪽으로 다가가 아는 체를 했다. 멀리서 본 느낌대로 제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드는 아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저씨.”
 
“어디 가는 길이니?”
 
“아니오.”
 
“그런데 왜 거기 혼자 앉아 있니?”
 
“엄마가 없어졌어요.”
 
“엄마가?”
 
“자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없어졌어요.”
 
“잠깐 나가셨겠지. 곧 해가 질 텐데, 금방 오시지 않을까?”
 
“버스도 안 와요.”
 
“응?”
 
“여기 정류장에 버스가 안 와요.”
 
“외진 곳이라 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을 거야.”
 
“오후 내내, 한 대도 안 왔어요.”

 
정말 오래 앉아 있었던 듯 아이는 어깨를 움츠리며 떨었다.
혁은 난감했다. 고개를 떨구고 제 발끝만 쳐다보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아는 척을 했는가 싶어 후회도 일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모른 척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었다. 지능이 떨어지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일 수도 있었다. 거꾸로 아이 엄마가 아이를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이 어디니? 데려다줄까?”
 
여전히 어깨를 떨며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저녁은 먹었니?”
 
다시 한 번 고개만 저었다.
 
“아저씨 지금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
 
아이가 혁을 쳐다봤다.
 
“배고프니?”
 
아이는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거렸다.
혁은 일단 데려가서 몸을 좀 녹이게 하고, 밥을 먹이면서 찬찬히 물어보기로 했다. 집은 어디인지, 전화번호는 어떻게 되는지. 번호를 알아내면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 하든가, 집까지 데려다주든가, 정 안되면 아내에게라도 알려서 의논해 볼 작정이었다.
혁은 아이를 데리고 스토어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배가 많이 고팠었는지 아이는 제 앞에 나온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서야 사실은 아침부터 내내 굶었다면서 배시시 웃었다. 혁은 아직 반도 넘게 남은 자신의 몫을 덜어 아이에게 주었다. 그것마저 급하게 먹어대는 걸 보고 지배인을 불러 몇 가지를 더 주문했다.
 
“아저씨, 그 옷 참 잘 어울려요.”
 
“이 옷?”
 

혁은 베이지색 면바지에 보라색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다. 작년에 아내가 뉴욕으로 출장을 갔다가 거기 백화점에서 사 온 옷이었다. 한동안 잘 입고 다녔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보이지 않다가, 얼마 전에 옷장 구석에 걸려 있는 것을 혁이 찾아냈다.
 
“지금쯤 엄마가 돌아오셨을까?”
 
아이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전화 걸어볼까?”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 휴대폰 번호 몰라?”
 
“생각이 안 나요.”
 
“집 전화번호는?”
 
“그것도요.”
 
“그럼, 집은? 찾아갈 수 있겠어?”

 
그때 마침 아이 엄마가 헐레벌떡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혁은 얼른 일어나서 “여기요!”하고 부르며 손짓했다. 아이도 제 엄마를 보자 얼굴이 환해졌다가 이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역시나 꽤나 애를 태우며 찾아다녔던 모양이었다. 그 엄마도 아이를 감싸 안고 함께 울었다. 미안하다고,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또 했다. 혁은 엉거주춤 앉지도 바로 서지도 못한 채로 모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혁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고는 두 모녀가 나갔다. 혁은 그제야 가뿐해지고 또 뿌듯해졌다. 천천히 식사를 마저 하고 레스토랑을 나오며 아이 엄마가 식사비를 모두 지불했다는 것을 알았다. 혁은 어쩐지 겸연쩍었다. 그래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내에게 오늘 일들을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는 게, 혁은 무엇보다 즐거웠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마트로 내려가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왔다. 장 봐온 것들을 깨끗이 손질해서 일회용 팩에 넣어 용도에 맞게 냉장실과 냉동실에 정리해 넣었다. TV를 켜봤지만 여전히 화면이 파랬다.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비어있었던 경비실을 떠올리며 내일 다시 경비실에 물어보든 A/S를 신청하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같은 층 같은 라인인 옆집에라도 물어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아무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어느 쪽으로든 내일 아침에나 확인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아내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늦겠다는 아내의 말은 어쩌면 밤을 새울 수도 있다는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혁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놨다. 일 때문에 바쁜 사람에게 괜한 통화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내 없이 잠자리에 드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닌데 새삼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 오랜만에 아내를 안았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혁은 거실에서 졸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다가 옆에 와 눕는 아내의 기척을 느꼈다. 잠결에 아내 쪽으로 돌아누워 어깨를 안았다. 어디서 무얼 하다 들어왔는지 아내의 몸에는 아직도 찬기가 배어 있었다. 혁은 잠결에도 아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엷게 흐느끼는 아내의 기척이 느껴져 놀라 일어나려 했지만,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한데다 외출까지 했다가 돌아와 피곤했는지 좀처럼 정신이 들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가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아내가 다녀간 흔적은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벌써 출근한 것인지 혁이 꿈을 꾼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식빵과 잼으로 아침을 먹었다. 원두를 갈아서 핸드드립으로 내려 마시고 그릇들을 씻어 놓고 TV를 켰다. 어제의 말썽은 농담이었다는 듯 채널마다 화질도 선명했다. 그 많은 채널 중에서도 마땅히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찾지 못해 TV를 끄고 서재로 갔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글은커녕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게 언제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컴퓨터를 켜고 부팅이 되는 동안 책장에서 낯익은 책 한 권을 빼어들었다. 무심코 페이지를 후르르 넘겨봤다. 제목과 표지 그림이 있어서 책이라 여겼는데 안에는 내용이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책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기획 노트였다. 따로 구입했을 리는 없고, 서비스로 딸려 온 것일 터였다. 본품을 찾아봤다. 아무리 찾아봐도 같은 표지의 책이 눈에 띄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빌려주었거나 따로 구입한 것일 수도 있었다. 다른 책을 빼들고 책상 앞에 앉아 펼쳐보니 그것 역시 빈 노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엔 서너 칸 건너의 다른 책을 꺼내 펼쳤다.
혁은 몇 권의 책을 더 꺼내 후르르 넘겨봤다. 모두 다 빈 노트였다. 혹시나 싶어 책상 바로 옆 서가에 꽂힌 책을 빼들고 조심스럽게 펼쳤다. 페이지마다 활자가 빡빡하게 박혀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상 앞에 앉았다. 다른 책들도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펼쳐 보면 빡빡하게 활자들이 디자인도 예쁘게 잘 인쇄되어 있을 것 같았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길었다.
 

작가 소개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소설창작학과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나무젓가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제2회 EBS 라디오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단편소설집 『붉은 나무젓가락』, 장편소설 『수목원』,
그림동화 『옥상에 텃밭이 생겼어요』
옴니버스 에세이집『가족이 힘이다』『수업』『가족, 당신이 고맙습니다』등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