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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무력부장傳(9)] 김영춘, 쿠데타 발각 이후 어떻게 살아났나?

김영춘(1936~생존) 인민무력부장은 군부 내 대표적인 ‘김정일의 남자’였다. 최현·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군부 내에서 김정일을 최고지도자로 만들었다면, 김영춘은 그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김정일을 최고지도자로 안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영춘 총참모장(왼쪽 둘째)이 2005년 10월 노동당 창건 6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영춘,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사진 오른쪽부터) 등과 함께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김영춘 총참모장(왼쪽 둘째)이 2005년 10월 노동당 창건 6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영춘,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사진 오른쪽부터) 등과 함께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김영춘이 일약 스타가 된 것은 1995년 함경북도 청진시 6군단 사건을 진압하면서다. 6군단 사건은 군대 내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지휘관들이 쿠데타를 모의, 발각된 것으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위원은 군대 내 정치·사상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쿠데타를 사전에 감시해야 하는데, 오히려 쿠데타를 모의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장성급을 포함한 군 간부 40여명이 처형됐고 400여명이 숙청됐다.
 
공교롭게도 당시 6군단장은 김영춘이었다. 김영춘은 인민군 작전국장(1986년)으로 일하다 과오를 범하고 지방 여단의 부여단장으로 좌천됐다가 군수동원 총국장(1993년)을 거쳐 6군단장(1994년)으로 부임했다. 군단장이 부대 내에서 쿠데타 모의가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됐다. 당시 정치위원들은 ‘김정일의 남자’인 김영춘을 쿠데타 모의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이들의 쿠데타 모의는 인민군 보위사령부에 발각돼 수포로 끝났고,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던 김영춘은 쿠데타 진압을 도와 1995년 10월 총참모장으로 승진했다.
 
6군단 사건은 고난의 행군 시기(1995~1997)에 군대가 외화벌이에 나서면서 빚어진 사소한 갈등이 쿠데타로 확대·해석되면서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시기에 시범 케이스에 걸려들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중국 국경 인접부대인 6군단은 전 군대가 부러워하는 외화벌이 군단이라 시범 케이스로 안성마춤이었다. 감시 체계가 철두철미한 인민군에서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진실여부는 역사에 남겨두더라도 김영춘은 이 사건으로 기사회생했다. 김영춘은 총참모장(1995~2009)이 된 이후 14년 동안 많은 일이 발생했다. 대포동 1호 발사(1998년), 제1차 연평해전(1999년), 제2차 연평해전(2002년), 대포동 2호 발사 및 제1차 핵실험(2006년)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김영춘이 이 사건들을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총참모장으로서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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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춘이 인민무력부장을 맡은 것은 2009년 2월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후계자로 지명된 지 한 달 뒤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후계자 승계 작업이 빨라지면서 이뤄진 조치였다. 군부 내 ‘넘버 2’인 총참모장은 평양방어사령관을 지낸 이영호에게 넘겨졌다. 야전 지휘관에서 군 행정을 담당하는 인민무력부장을 맡았으니 따분했을 것이다.
 
김영춘은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화 된 이후 주요 행사의 주석단에서 보이지 않았다. 현철해 등과 함께 ‘김정일의 남자’들이 한 물 가는 것으로 받아졌다. 직책은 인민무력부장이지만 뒷방 노인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오른쪽에서 둘째)이 2011년 12월 28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 앞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김정일 운구차량을 호위하고 있다. 김영춘 앞에는 이영호 총참모장이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오른쪽에서 둘째)이 2011년 12월 28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 앞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김정일 운구차량을 호위하고 있다. 김영춘 앞에는 이영호 총참모장이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그러나 김영춘은 김정일 사망(2011년 12월) 때 김정은과 함께 운구차를 호송한 8인 가운데 한 명이 되면서 김정은 시대에도 존재감을 유지하는 듯 했다. 하지만 권력은 나눠 가질 수 없는 법이고 ‘김정일의 시대’에서 ‘김정은의 시대’로 변했다. 김영춘은 2012년 4월 인민무력부장을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게 물려주고 노동당 군사부장으로 물러났다. 한직은 아니지만 김영춘에게는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였다. 이로써 김정일 집권 17년 동안 인민무력부장은 최광-김일철-김영춘 3명으로 끝나는 순간이다.
 
올해로 81세인 김영춘은 지난해 큰 경사를 맞았다. 지난해 4월 김일성 탄생일을 맞아 현철해와 함께 조선인민군 원수 칭호를 수여받았다. 조선인민군에서 원수 칭호를 받은 사람은 현재 김정은을 포함해 3명이 된다. 과거 조선인민군 원수 칭호를 받은 선배는 오진우, 최광, 이을설 등이 있었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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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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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