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그후 30년 <상> 미완의 민주주의

‘광장 민주주의’ 30년 전과 후
보도 → 여론 분노 → 참여 과정 닮아
SNS시대, 정보 확산 훨씬 빨라져

“시위대 뒤에서 총을 쏘는데 나만 맞지 않고 빠져나와요. 도망치고 싶다는 심리가 꿈에 반영됐던 거죠. 그런 공포증에 계속 시달렸던 것 같아요.”
80년대 학생운동으로 대학생활을 보낸 하일동(50)씨의 기억이다. 전두환 정권의 일상화된 폭력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박종철의 죽음 이후 6월 항쟁 전까지 대규모 학생운동이 없었던 것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 앞에 학생들이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다시 불을 지핀 건 소수의 용기였다. 그해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했고 이후 종교계·지식인·문화계의 참여가 잇따랐다.
2016년엔 삶에 지친 시민들의 무관심을 넘어서야 했다. “늘 업무에 치이고 대출금은 많은데 정치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습니다”는 직장인 서인석(39)씨의 말처럼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였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80년대 정치는 엄혹했지만 생존문제는 안정적이었다. 지금은 형식적 민주주의는 지켜지고 있지만 생존은 30년 전보다 불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시민의 삶에 묻혀 있던 시민들도 몰상식에 가까운 권력의 행태에 분노가 폭발했다. 손 교수는 “정치적 무관심이 비정상적인 정부를 만들었다는 반성과 부지불식간에 피해를 입었다는 분노가 시민들을 광장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광장의 시곗바늘도 빨라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데는 5개월,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 기준으로는 한 달이 걸렸다. 촛불집회는 ‘비선 실세’ 의혹이 태블릿PC로 구체화되자 5일 만에 불붙었다. 87년엔 언론 보도가 교수·종교인·학생회 등의 의미 부여 시간을 거친 뒤 시민사회로 확산됐다. 정해구 교수는 “디지털 시대는 ‘오피니언 리딩’이라는 의미 부여 단계를 단축시켰다. 시민들은 SNS에서 실시간으로 의견을 나누고 ‘다수의 상식’을 광장의 질서와 원칙으로 만들어냈다”고 분석했다.
◆특별취재팀=한영익·윤정민·김민관·윤재영 기자 hany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