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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잿빛 한국 경제, 돌파구는 ‘셀프 리셋’ 뿐

외환위기 20년
1997년 12월 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와 임창열 부총리(가운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구제금융 협상을 타결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중앙포토]

1997년 12월 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와 임창열 부총리(가운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구제금융 협상을 타결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중앙포토]

1997년11월16일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한 태국발 비행기. 중년의 외국인 남성이 일반 승객과 섞여 항공기 트랩에서 서서히 내려왔다. 그는 입국수속을 밟은 뒤 마중나온 한국인 남성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당시 그를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과 일주일 뒤 그는 모든 한국인이 아는 존재가 된다. 미셸 캉드쉬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였다.

IMF 체제는 타의에 의한 구조조정
시련 거치며 재도약할 계기 마련
20년 지난 한국 경제 위기 되풀이
지속적 체질개선 못 이뤘기 때문
“변하지 않으면 변화 강요당해
새 정부서 틀 짜 새로 시작해야”

경제위기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IMF’는 이렇게 꼭 20년 전, 외환위기의 절정기에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쓰나미처럼 일거에 국민을 휩쓸어버렸다. 오랫동안 위기를 모른 채 승승장구하던 한국 경제가 메가톤급 시련에 봉착했던 순간이다. 캉드쉬가 은밀하게 한국을 찾은 지 5일 뒤인 11월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피할 수 없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김대중 정부의 첫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IMF체제’ 초기 위기극복 작업을 지휘했던 이규성 전 장관은 『코리안미러클4: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라는 책에서 크게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한국경제와 기업의 구조적 취약성 ▶준비 없는 상황에서 대외개방 확대 ▶해외로부터 과도한 단기자금 차입 ▶아시아 통화위기로 대표되는 당시 국제금융체제의 불안정성이다.
자료: 통계청·한국은행

자료: 통계청·한국은행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구조적 취약성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와 기업은 고도성장 30년의 적폐가 누적돼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다. 기업은 성장의 단물에 취해 남의 돈을 빌려 백화점식·문어발식 외형성장을 하는데 전력투구했다. 과잉·중복투자는 일상이었고, 재무구조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97년 제조업체들의 부채비율은 평균 396%에 달했다. 이 전 장관은 “정경유착의 보편화로 ‘대마불사’나 ‘은행불패’ 등 도적적 해이도 만연해 있었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채 경제의 취약성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IMF체제’는 춥고 쓰라렸다. 강도높은 IMF의 구조조정 요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기업과 은행들이 속속 무너졌고, 직장인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1997년 한해에 무너진 기업만 30대 기업 8개를 포함해 총 1만7000여 개였다. 연 7~8%를 쉽게 넘나들던 경제성장률은 1998년 -5.5%로 추락했다. 동화은행 등 5개 은행이 퇴출됐고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은 외국계 펀드에 팔렸다. 실직자가 늘어났고 청년은 취업을 못해 발을 굴러야 했다. 1998년 2월 실업률은 8.8%, 청년실업률은 14.5%까지 치솟았다.
자료: 통계청·한국은행

자료: 통계청·한국은행

하지만 위기는 기회였다. 외환위기는 민관이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한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경제대책조정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위기 극복의 총대를 멨고, 국민은 세계를 놀라게 한 ‘금모으기 운동’으로 화답했다. 경제지표와 수치들은 빠른 시간 내에 회복됐다. 한국은 2001년 8월 차입금을 전액 상환해 IMF체제를 종료시켰다. 예상보다 빠른 ‘조기 졸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이었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지만 외환위기 기간에 이뤄진 일련의 개혁은 한국 경제를 완전히 리셋시켰다. 그 덕택에 한국 경제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자양분을 얻었다. 캉드쉬 총재가 “외환위기는 위장된 축복”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한국 경제는 타율에 의해 단행한 구조조정의 과실만 따먹었을 뿐 이후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IMF체제 졸업 당시 경제수장이었던 진념 전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시스템이나 체질을 바꾸는 건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꾸준히 이뤄져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외환위기 이후에도 상시 구조조정 체제로 간다는 목표 하에 법과 체제를 정비했는데 이것이 이후 잘 이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시 구조조정에 실패한 결과가 20년이 지난 현재의 한국 경제다. ‘축복’은 사라졌고 상황은 암울하다. 저성장이 만성화하면서 경제성장률은 4분기 연속 0%대를 면치 못하고 있고 올해는 연간 2%대 사수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청년실업률은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기업들의 성장지체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하다. 수출은 6년 만에 5000억 달러 아래로 떨어졌고, 내수도 ‘소비절벽’을 우려해야 할 정도다. 13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는 미국 금리상승기와 맞물려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 탄핵소추까지 겹쳐 ‘리더십’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기도 민망한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제위기 재발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20년 전보다 현재 상황이 더 나쁘다”고 진단했다. 김 원장은 “그 때는 외환 유동성 만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인 과잉생산·과잉공급으로 수요가 줄고 기업 이익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상황”이라며 “한국은 가계부채 문제까지 겹쳐 올해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새로운 리셋의 발판을 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시대적 과제 해결 의지를 담은 박근혜 정부 핵심공약, 즉 저출산·고령화 정책, 복지국가 전환 정책, 경제 민주화 등이 성장주도형 경제정책에 밀려 이미 폐기된 상태”라며 “새 정부에서 새로운 틀을 마련해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념 전 부총리는“외환위기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우리가 적정한 때에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변화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며 “소통과 배려라는 큰 리더십을 바탕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해결 과제들을 명쾌하게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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