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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분노의 연속이었던 지난해의 마지막은 ‘가임기 여성 지도’가 마무리했다. 내가 사는 서울 마포구엔 가임기 여성 8만5174명이 거주해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 중 30위를 기록했다는 데이터를 보며 망연했다. 이건 뭐지? 8만5174명에 간신히 포함돼 우리 구가 꽤 높은 순위에 오르는 데 일조했음을 뿌듯해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자, 새해엔 방치해 두었던 가임 능력을 맘껏 발휘해 보리라 결심이라도 해야 하나. 이 뉴스에 달린 극단적인 댓글엔 이런 것도 있었다. “아이 낳을 계획이 없는 나는 살처분이라도 당하게 되는 겁니까?” 깨달았다. 사람을 모욕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구나.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사진). 주인공 다니엘 아저씨도 모욕을 당했다. 평생을 성실한 노동자이자 납세자로 살아온 그는 심장 쇼크로 일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국가에 질병 수당을 청구하지만 “심사 결과가 15점 이상 돼야 하는데 당신은 12점이라 받을 수 없다”며 거부당한다. 항고를 하려 해도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통화를 위해 두 시간의 연결대기음을 기다려야 하고, 관공서 직원들에겐 귀찮은 거렁뱅이 취급을 받는다.

영화는 특별한 사건이라고는 없이 주인공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가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닌”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온 한 명의 시민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인간’이고자 했음을.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도 보조금을 받지 못해 극도의 빈곤 상태에 처한 케이티를 도우려 그는 발벗고 나선다. 하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던 인생의 어떤 고비에서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했을 때 나라는 그들을 외면했다. 구직센터에서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낀 그는 뚜벅뚜벅 걸어 나와 건물 벽에 검은 스프레이로 글을 쓴다. “나, 다이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 날짜를 잡아주길 요구한다. 그리고 그 구린 통화연결음도 바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나는 인간이다’라는 외침이다.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닌”, 권리를 요구하고 누릴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선언이다. 질병 수당은커녕 종교단체에서 주는 500원을 받으려 아픈 몸을 이끌고 새벽부터 줄을 서는 노인들이 즐비한 이 나라에서 다니엘의 외침은 배부른 투정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 새해에는 달라질 수 있기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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