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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7년간 지구 두 바퀴 ‘여행 끝판왕’…해적도 무섭지 않아요

한국인 첫 무기항·무원조 요트 세계일주 김승진씨
김승진 선장의 삶터는 바다다. 그가 2015년 세계일주 항해 당시 남극해 인근에서 포즈를 취했다. “마스트(돛대)에 올라가서 보면 인간이 거대한 물방울 위에 존재한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고 했다. [사진 김승진]

김승진 선장의 삶터는 바다다. 그가 2015년 세계일주 항해 당시 남극해 인근에서 포즈를 취했다. “마스트(돛대)에 올라가서 보면 인간이 거대한 물방울 위에 존재한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고 했다. [사진 김승진]

“안녕하세요. 여기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항구도시 메시나입니다. 지난 15일 크로아티아 중부 스플리트에서 출발해 닷새 동안 밤낮 없이 달려왔어요. 다시 새로운 시작입니다.”

목소리가 밝았다. 자신감이 넘쳤다. 지난 크리스마스 직전 국제전화로 만난 김승진(55) 선장이다. “겨울철 지중해는 풍랑이 거친 편입니다. 출항 당시의 설렘과 기대감은 금세 허물어지고 깊은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폭풍을 겪었더니 사람들이 조금씩 여유를 찾고 있어요. 지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새롭게 배워가는 중입니다.”
새해 희망을 찾아 보름 전 출항한 최재원·이미현·김승진·김물길·전명진·홍정우씨(왼쪽부터). [사진 전명진]

새해 희망을 찾아 보름 전 출항한 최재원·이미현·김승진·김물길·전명진·홍정우씨(왼쪽부터). [사진 전명진]

김 선장은 자칭 바닷사람이다. 그냥 바다가 아니다. 요트 하나에 몸을 싣고 태평양·대서양·인도양 등 드넓은 바다를 벗해 왔다. 그것도 40대 후반에 선택한 ‘뱃길’이다. 2014년 충남 당진시 왜목항을 출발해 이듬해 5월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왜목항에 돌아온 ‘209일 4만1900㎞’는 그 절정의 기록이다. 한국인 최초로 무기항·무원조(어느 항구에도 내리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음) 세계일주 기록을 세웠다. 최근 『인생은 혼자 떠나는 모험이다』도 냈다. 파도와 돌풍, 상어와 빙하, 기기 고장과 해적 등 온갖 역경에도 최종 기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한 중년사내의 쇠심줄보다 질긴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가 또 바다로 나섰다. 이번에는 친구들과 함께했다. 스플리트에서 시작해 대서양을 건너고 파나마 운하를 관통한 다음 태평양을 가로질러 왜목항까지 ‘8개월 3만2000㎞’의 대장정이다. 별다른 동력 없이 바람에 몸을 맡기는 건 같지만 지난번과 달리 세계 곳곳을 방문하고, 현지인과 폭넓게 교류할 작정이다. 전화와 e메일로 김 선장의 ‘도전 2017년’을 들었다.
 
이번엔 누가 함께 탔나.
“다큐멘터리 PD·여행작가·요트사업가·사회복지사 등 여섯 명이 함께 출발했다. 나름 이력을 쌓은 여행작가들도 거친 풍랑에 많이 놀란 것 같다. 이번에는 요트가 두 척이다. 다른 넷을 태운 배가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다. 항해 중 동승을 희망하는 일반인의 신청도 받는다. 짧게는 1주, 길게는 한두 달, 총 180여 명이 참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항해의 목적이라면.
“테마가 비전이다. 연령·직업은 다르지만 바다라는 교집합 안에서 저마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다. 지구촌 요트 항해는 낭만이 아니다. 긴 시간, 좁은 공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물을 극도로 아껴 써야 하고 밤에는 전등도 자유롭게 켜지 못한다. 밤에는 두 시간씩 교대로 불침번을 선다. 지구라는 별의 크기를 몸으로 느끼며 삶의 본질을 만나게 될 것이다.”
2010년에도 스플피트가 출항지였다.
“첫 대서양 항해였다. 9월에 떠나 이듬해 4월 부산항에 입항했다. 한국 상선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다가 구출됐던 ‘아덴만 여명작전’과 시기가 겹치기도 했다. 청해부대와 연락했던 게 기억난다. 2013년 3월에는 카리브해 작은 나라 버진아일랜드를 떠나 그해 10월 제주시 도두항에 도착했다. 이번 도전에 성공하면 지난 7년간 지구 두 바퀴를 돌게 된다.”
여럿이 함께해 신경 쓸 일이 많겠다.
“‘요트 항해는 둘보다 셋이 낫고 셋보다 혼자가 낫다’는 말이 있다. 초보 선원들이라 실수가 잦다. 선장은 동료들의 안전과 정신건강까지 책임져야 한다. 흔들리면 안 된다. 심한 파도에 선체가 요동치면 승선원 전원이 일제히 저를 쳐다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대항해시대’의 기치를 내걸었는데.
“지금까지 바다는 민족 이동, 침략과 약탈, 문명 교류의 장소였다. 저는 모험문화산업을 주목한다. 소형 선박 제조, 관광대여업, 수리 및 서비스업, 마리나 시설 설비 및 관리업 등이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하고 있다. 늦었지만 우리의 새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스포츠로서의 가능성이다. 외국에서는 월드컵이나 올림픽처럼 확고하게 자리 잡은 레이스가 많다.”

투자이민 실패 후 요트로 인생 2막
2년 전엔 209일간 4만1900㎞ 기록
이번엔 PD·작가 등 6명과 함께 출항
장거리 항해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김 선장의 일기장.

장거리 항해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김 선장의 일기장.

김 선장은 충북 청주 산골 출신이다. 고2 수학여행 때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동해 푸른 파도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고 했다. 대학 때 스쿠버다이빙 동아리 활동을 했고, 사회에 나와선 다큐멘터리 PD로 일했다. 이후 뉴질랜드에 투자이민을 갔지만 큰 실패를 겪었다. 자살마저 생각할 정도였다.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그때, 바다가 그를 다시 살렸다. 그는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꺼내고 크로아티아에서 중고 요트를 구입했다. 무기항 세계일주를 함께한 ‘아라파니’(순우리말로 바다달팽이)호다. 현재 타고 있는 배의 이름은 ‘타노아’(바람을 타고 빨리 달리는 돛단배)다.
 
만 55세, 체력적 부담은 없나.
“아직은 젊은 것 같다. 하하하! 요트 항해는 체력보다 정신력과 판단력이 중요하다. 평소 체중관리에 집중한다. 허리에 지방이 늘면 식사량을 줄인다. 팔굽혀펴기를 자주 하며 기초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무모하다는 비판도 듣겠다.
“100m 달리기 신기록을 위해 달리는 우사인 볼트, 작은 공 하나를 구멍에 넣으려는 박세리, 그들이 진정 무모한 행위를 하는 것일까. 또 아무도 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것은 어떤가. 모험은 인간의 본능이다. 저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40대 후반에 택한 끝없는 모험
“지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배워
새해 첫날 지중해서 떡국 먹을 것”
막대기 달력.

막대기 달력.

 
가족들의 응원, 주변의 후원이 컸다.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며 훗날 핑계를 대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끝까지 지치지 않고 성취해 가는 게 가족에게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불혹이 돼서야 제 취향을 제대로 알았다.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현재가 즐거워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정년도 없으니 행복하다. 30대로 되돌아간 듯하다. 이만하면 멋진 인생 2막 아닌가.”
대체 요트 항해의 매력이 뭔가.
“여행의 끝판왕이다. 스스로 숙박시설과 이동수단을 갖추고 장소와 길을 자유로이 선택해 갈 수 있다. 이름 모를 무인도의 신비도 경험할 수 있다. 뜻밖의 사고에 대비해 유언도 남겨놓았다. ‘끊임없는 도전을 갈구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누군가 기억해 준다면 가족들도 행복해 할 것 같다.”
우리 삶이 항해다. 새해 인사를 부탁한다.
“지금까지 일반 강연도 180회 정도 했다. 나의 모험이 누군가의 꿈이 되기를 바란다. 며칠 전 메시나항 50마일을 앞둔 곳에서 태풍이 불어왔다. 밤새 핸들을 잡고 추위와 강풍에 시달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다. 앞일을 걱정하지 말자. 인생에 적당한 바람은 없다. 늘 과하거나 부족하다.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다. 무풍(無風)도, 폭풍도 공존한다.”
50대 동년배들에게 용기를 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시대가 바뀌어도 세상살이가 나아졌다고 하는 이는 드물다. 늘 불경기고, 늘 생존경쟁에 시달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선진국에 들어섰다. 긍정 마인드가 중요하다. 시야가 넓어지고, 삶도 매력적으로 바뀐다. 젊은 세대에겐 특히 그렇다.”

‘도전을 갈구하는 사람’ 유언도 준비
“항해도 인생도 폭풍과 무풍의 연속
바다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되겠다”
새싹. 김 선장은 무·메밀 씨앗을 페트병에 길러 새싹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새싹. 김 선장은 무·메밀 씨앗을 페트병에 길러 새싹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아직도 못다한 목표가 있다면.
“새해 첫날을 이탈리아 사르데냐섬에서 맞을 것 같다. 재료는 빈약하지만 떡국 비슷한 걸 끓일 것이다. 오는 8월 대장정을 마치면 2018년 열리는 ‘바르셀로나 월드 레이스’와 2020년 개최되는 ‘방데 글로브’ 무기항 세계일주를 준비할 것이다. 바다에서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되고 싶다. 경비가 많이 들기에 스폰서를 찾아야 한다.”
[S BOX] 파도·강풍에 지쳐 입맛 없을 때 김치가 효자 노릇
“외국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어요. 아껴가며 먹고 있습니다.”

장거리 항해에서 골칫거리 중 하나는 음식이다. 김승진 선장은 역시 한국인이다. 김치 예찬론을 꺼내들었다. 영양과 보관, 활용도에서 김치만 한 게 없다고 했다. 애교 섞인 부탁도 했다. “배추김치를 조금 장만했어요. 가끔씩 찌개를 만들고 국을 끓이며 속을 달래고 있습니다. 김치 후원자가 있으면 환영합니다. 요트에 동승할 계획이라면 꼭 갖다 달라고 광고마저 하고 싶은 심정이죠.”

김 선장은 2년여 전 세계일주에서도 김치의 위력을 실감했다. 파도와 강풍에 지쳐 입맛을 잃을 때 김치가 효자 노릇을 했다. 냉장고가 없어도 장기 보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당시에는 당진시 부녀회원들이 묵은 김치 한 상자를 챙겨주었다. 총 30㎏ 남짓 됐다. 그는 김칫국에 양파를 넣어 발효시킨 양파김치를 직접 담가 먹기도 했다. 7개월 넘게 신김치만 먹다 보니 항해 중 가장 그리운 음식이 생김치에 삼겹살이었다고 돌아봤다.

“이번에는 세계 여러 항구를 들르기 때문에 식재료 수급에 문제는 없습니다. 승선원 모두 요리 솜씨가 뛰어나 각국 음식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인 마트가 있는 곳에서 가능한 한 넉넉하게 김치를 확보하려고 합니다.”(웃음)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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