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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블랙리스트와 “문화 융성”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

예술은 모든 클리셰에 대한 도전
창조의 근원인 예술가를 중심에 놓아야

단국대 교수·영문학

블랙리스트로 온 세상이 소요(騷擾)하다. 청와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온 것으로 알려진 블랙리스트에는 무려 9473명이나 되는 예술가의 이름이 올라 있다. 단지 특정 사안에서 정부와 입장을 달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예술가가 검열과 억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배제의 목록’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언급돼 온 고은 시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작가인 한강을 포함해 배우 송강호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예술인들이 수두룩하다. 그동안 현 정부가 입만 열면 외쳐 온 "통합”과 "문화 융성”이 거짓말이었거나, 그들만의 무리 짓기, 그들만의 ‘문화 리그’ 만들기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이 ‘유아적 파시즘’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모든 형태의 규범·공리(公理)·상투성에 대한 ‘의심’이고 도전이며, 불가능한 것과 도달할 수 없는 것의 실현을 꿈꾼다. 절대성과 완전성에 대한 이와 같은 탐구야말로 예술의 성격이고 운명이다. 이 때문에 예술은 종종 사회와 불화하고, 예술인들은 ‘불온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랭보의 시에 “논리적인 봉기들(révolts logiques)”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예술은 때로 논리조차도 거부하는 ‘문화적’ 봉기의 구성물이다.

흔히들 예술에서 ‘창조’의 가치를 찾아내는데, 예술적 창조야말로 이와 같은 반(反)규범, 반(反)상투성, 반(反)공리라는 문화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 나라가 예술을 존중한다면 예술의 본질인 이와 같은 저항성, 즉 선의의 ‘삐딱함’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격려가 필수적이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창조’와 관련된 모든 기획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 문화가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어느새 ‘산업’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의 들러리였던 문화가 이제는 엄청난 재화이자 막강한 사회·정치적 영향력의 보고(寶庫)가 돼버린 것이다. 정부가 ‘문화 융성’을 국정과제로 내세운 것도 바로 이런 맥락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문화의 핵심적 주체가 바로 예술이며 예술가들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거부하고 있다. 블랙리스트를 통해 ‘문화 융성’의 핵심 주체인 다수 예술가들을 배제하고 도대체 무슨 문화 융성을 하겠다는 것인가.

주체들이 빠진 한국의 ‘문화 융성’의 마당은, 행정 관료들과 주변부 문화 ‘산업의 역군들’, 즉 관광·레저·스포츠·게임·엔터테인먼트·광고·카지노 등을 둘러싼 돈벌이와 권력 싸움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하면 이런 의미의 ‘문화산업’은 개인의 여가 시간을 착취하고 상품화하며 문화 욕구를 소비 욕구로 조작한다. 그것은 문화의 외피를 쓴 돈벌이일 뿐이다.

문화 융성을 하려면 창조의 근원인 예술가들을 동심원의 중심에 놓고 출발해야 한다. 데이비드 스로스비(호주 매쿼리대 석좌교수)는 소위 ‘창조 산업’이 제대로 가동되려면 “산업 동심원의 가장 안쪽에 독창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영화·음악·문학 등 문화예술이 자리를 잡아야 하며, 창조 산업이 다른 분야에 파급 효과를 미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핵들이 잘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블랙리스트는 이 문화 동심원의 핵을 향한 공격이고 배제이므로 스스로 창조 산업, 창조 경제의 ‘엔진(동력)’을 삭제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핵심을 죽이는 것은 콘텐트를 죽이는 일이고, 이 텅 빈 자리에 중앙·지역 단위의 행정 관료들과 돈벌이에 눈먼 자본가들이 까마귀 떼처럼 몰려들 때, 문화는 융성이 아니라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다. 최근의 사태가 최순실 주변의 한 인물을 ‘문화계의 황태자’로 만든 것이 바로 이런 예다.

규범 중심의 사회는 모든 새로운 발상과 표현에 대해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미안하게도(?) 예술은 모든 클리셰(cliché)에 대한 도전이고 파괴다. 영원히 효력을 갖는 형식이란 없다. 브레히트의 말마따나 “현실은 변하고 새로운 문제들이 부상한다. 따라서 현실을 담는 그릇도 변해야 하는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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