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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김영희 묻고 에펠만 전 동독 국방장관 답하다 “베를린 장벽 붕괴 때 군 사령관이 탱크 출동 명령 거부”

통일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제가 군의 통합이다. 독일 통일 당시 동독군 병력은 9만여 명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동독 인민군 군인들의 독일연방군 편입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러나 남북 통일의 경우 북한 정규군 병력 120만 명의 무장해제나 통일한국군 편입이 독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려운 문제다. 거기다 북한군은 핵탄두와 미사일까지 갖고 있다. 그래서 통일이라는 것을 준비한다면, 언젠가 통일의 날이 온다면 북한 인민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사전에 충분히 연구하고 치밀한 시나리오까지 짜 놓을 필요가 있겠다. 한국과 독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독군의 독일연방군 편입과 편입에서 제외된 동독 군인들의 처리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이 될 것이다. 그 난제를 직접 다룬 라이너 에펠만 전 동독 국방장관을 김영희 대기자가 만났다.

독일 통일 당시 동독군 9만 명
시위 진압, 정변에 동원 안 돼
연방군 편입 순조롭게 마무리
그래도 고위직 등 절반은 배제
동독의 마지막 국방장관을 지낸 라이너 에펠만은 “동독군이 통일 과정에서 정변에 동원되지 않아 연방군 편입이 가능했다”며 “고위직, 정보기관 협력자 등 분명한 배제 기준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사진 김춘식 기자]

동독의 마지막 국방장관을 지낸 라이너 에펠만은 “동독군이 통일 과정에서 정변에 동원되지 않아 연방군 편입이 가능했다”며 “고위직, 정보기관 협력자 등 분명한 배제 기준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사진 김춘식 기자]

 
김영희 대기자=독일이나 한국이나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해결 과제는 양측의 군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겁니다. 독일의 과정은 어떠했습니까.
라이너 에펠만=동독군이 독일연방군에 편입이 가능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9일 이후 동독에서 군사정변(Putsch)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군사정변으로 치달을 뻔한 상황이 있긴 했었습니다.
대기자=동독군(NVA) 수뇌부에서 군사정변을 논의했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언제 누가 그걸 시도했습니까.
에펠만=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1월 9~10일 즈음입니다. 제 전전임(前前任) 국방장관 하인츠 케슬러에 의해서죠. 케슬러는 당시 비무장 탱크를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보내 그곳에서 시위하는 시민들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해당 부대에는 이미 그런 명령이 곧 하달될 거라고 예고된 상태였고, 부대원들은 최종 명령이 내려질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케슬러는 혼자 모든 책임을 안고 가긴 싫었기 때문에 군 수뇌와 장시간 논의했습니다. 그때 동독 인민군 총사령관 요아힘 골드바흐가 결단을 내려 불복종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결론이 나지 않는 토론 끝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이 명령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대기자=골드바흐가 용감하게 불복종한 것도 있지만 당시 동독 인민군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지 못한 것은 동독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이 동독군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아닙니까. 당시 20~22개 사단의 소련군이 동독에 주둔하면서 사실상 동독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에펠만=저는 케슬러 당시 국방장관과 동독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보리스 스네트코프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러나 소련이 동독의 동맹국으로서 공동작전을 하면 지시를 내리긴 했습니다. 진정 다행인 건 당시 소련군 탱크가 직접 출동하지 않았다는 점이지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철폐하면서 소련군은 내정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였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동독 지도부가 요청을 했다면 소련도 군 부대를 출동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주동독 소련군 총사령관 스네트코프는 상당히 강경한 매파였습니다. 만약 동독이 출동을 요청했다면 고르바초프의 불개입 원칙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출동했을 겁니다. 당시 서기장이 에리히 호네커가 아니었다는 것도 다행입니다. 호네커였다면 소련군에 출동 요청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호네커의 후임 에곤 크렌츠는 달랐습니다. 크렌츠는 출세욕이 강해 상부의 지시를 잘 따랐습니다. 사회통일당(SED) 서기장이 된 후에는 크렘린 말고는 더 이상 그에게 지시를 내릴 사람이 없었지요.
대기자=참으로 흥미로운 정보입니다. 통일 후 동·서독 군의 통합 과정에 직접 관여하셨는데,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1990년 4월 당시만 해도 동독군 병력이 17만 명이었지만 점점 줄어 통일 당시엔 9만 명이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에펠만=‘이런 기준에 맞아야 연방군에 편입될 수 있다’는 기준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이런 기준에 맞지 않으면 편입이 안 된다’는 네거티브 기준은 있었지요.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국방장관과 저는 서로 여러 합의를 이뤘는데, 우선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의회가 인민군을 해체하는 수순을 밟고, 그 이후에 군인들이 개별적으로 원하는 경우 연방군에 편입을 신청하도록 했습니다. 과도기를 두기 위해서였죠. 기준은 이렇습니다. 첫째, 슈타지(Stasi·동독 국가보안부) 협력자면 안 된다. 둘째, 55세 이상 고령이면 안 된다. 셋째, 장군·대령 등 고위급은 안 된다. 넷째, 당시 연방군엔 여군이 없었기에 여군도 해당이 안 되지만 간호장교의 경우는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기자=편입을 희망한 동독군의 정확한 숫자를 갖고 계십니까.
에펠만=(가져온 책 『인민군의 역사』를 찾으며) 답을 드리기 위해선 책자를 보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대기자=독일인다우십니다.
에펠만=(웃으며) 신청자 숫자를 기준으로 보면 2만2676명이 장교, 1075명이 부사관, 394명이 간호장교, 2만2579명이 부사관 이하 군인, 2170명이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었습니다.
대기자=그렇게 통일독일의 연방군에 편입된 전 NVA 군인들이 받은 교육 중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연방군의 기본철학인 ‘내적 지휘(innere Fuehrung)’를 배웠다는 건데요. 이 ‘내적 지휘’라는 게 뭡니까.
에펠만=동·서독을 막론하고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일군은 국제조약에 위배되는 행위를 많이 했지요. 약탈과 성폭행 등등. 그들이 제2차 세계대전 후 귀환하자 자녀나 손주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 행동을 했느냐’고요. 그들은 이렇게 답했지요. ‘우리는 절대 복종을 서약했다. 선서를 위반할 경우 총살을 당했다. 그게 두려워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동독 인민군은 전통적인 독일군의 절대 복종의 개념을 그대로 계승해 흡수했습니다. 그러나 연방군의 경우엔 ‘복종의 원칙’이라는 것을 도입합니다. 그 원칙에 따르면 군인 개인도 인간이며, 자신의 의지가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보호해야 합니다. 따라서 만약 어떤 군인이 타인의 인간 존엄성이나 인권을 해치라는 명령을 받을 때 그에겐 불복종의 권리가 주어집니다. 동시에 그런 명령을 하달한 상관을 신고하도록 했습니다. 그게 내적 지휘의 개념입니다. 저도 동독 인민군에 입대할 때 절대 복종 선서를 해야 했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제 신념과는 달랐죠. 그래서 선서를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8개월 동안 영창 신세를 졌습니다. 내적 지휘의 또 다른 개념은 군인이 상시 전투대기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군인도 규정된 업무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 끝나면 퇴근해도 된다는 거죠. 모든 군인을 동등한 눈높이에서 보고,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복무 기간 감안해 계급 낮추고
보수도 20년 동안 서서히 올려
북한 정규군만 120만 명 달해
독일보다 정교한 대비 필요

 
대기자=내적 지휘란 결국 ‘불복종의 원칙’ 같은 개념이군요. 동독군이 편입되는 과정의 행정 조치는 어땠습니까. 남북 통일 과정에서도 중요한 일이라서 묻습니다.
에펠만=슈톨텐베르크 장관과 제가 내렸던 세 가지 결정은 동독 인민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첫째가 봉급 문제였는데, 서독연방군 소속 군인은 공무원의 지위를 가졌는데 동독엔 공무원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연방군에 편입된 인민군에게 어느 수준의 봉급을 줘야 하는지가 문제였습니다. 모든 인민군 출신 군인에게 공무원 지위를 부여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공기업 근무에 해당하는 지위를 부여했고 서독 수준의 64%로 책정했습니다. 그게 2007년 말 정도엔 서독 수준의 100%로 올라갔습니다. 둘째가 계급 문제였는데, 동독의 경우 승진에 필요한 복무 기간이 연방군보다 훨씬 더 짧았기 때문에 연방군에 맞춰 계급을 한두 단계 정도 낮췄습니다.
대기자=베를린 장벽 붕괴 후 통일될 때까지 동독 지도부는 처음엔 계약공동체(Vertragsgemeinschaft), 그러고는 국가연합(Confederation)을 제안했습니다. 통일보다는 50%나 70%만의 동독 체제라도 유지하고 싶었던 겁니까.
에펠만=통일과 관련해 두 독일의 입장이 달랐던 게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 변동에 따라 그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전후 당시엔 나라가 분단됐다는 점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느꼈고 통일은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라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서독 헌법에도 국가 통일이 적시됐고, 동독의 새로운 국가에도 ‘조국 통일은 우리의 염원’이라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독일은 사회적 배경과 상황 등 다양한 부분을 고려한 통일을 원하게 됩니다. 동독은 통일 뒤에도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고 여겼지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10개월 전인 89년 1월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당시 호네커 서기장이 서독 기자와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분단이 지속될 거라고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합니다. “50년, 100년은 갈 겁니다.” 하지만 국가연합을 통한 통일 주장이 나오게 된 건 동독의 상황이 달라지면서입니다. 동독을 탈출하는 주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기 때문이지요. 동독 지도층이 그럼에도 사회주의를 고수해야 한다고 여긴 건 소련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대기자=90년 3월 18일 동독 총선거 후 출범한 과도정부의 로타어 데메지에르 총리도 그해 8월까지는 은근히 통일보다는 동독 제체의 유지를 원했던 것 아닙니까.
에펠만=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총선거 투표율이 96%였는데 약 85%의 유권자가 신속한 통일을 공약으로 내건 데메지에르의 정당연합(Allianz)에 투표했습니다. 만약 데메지에르가 국가연합 방안을 주장했다면 유권자들은 표를 주지 않았을 겁니다.
대기자=통일되고 25년이 지난 지금도 장관께서는 동·서독 간 사회 격차에 대해 충분한 고찰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동·서독인 간에 사회 통합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에펠만=독일 통일 당시 저는 46세였습니다. 제가 93세가 되면 통일 후 47년을 산 셈이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산 기간이 그제야 더 길어지는 셈이지요. 저의 사고방식, 행동방식 등 모든 부분에 46년간 살아온 동독이 내재돼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독 시절을 빨리 잊어버리려고 했습니다. 나쁜 기억 때문이지요. 그러나 잊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통일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결정을 내렸고 경제적으로 좋은 결과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대 인간의 만남과 공존에선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들이 돌출합니다. 서독 출신 부모의 18세 자녀와 동독 출신 부모의 18세 자녀는 취미며 부모에 대한 불만, 패션 등에서 비슷한 점이 더 많을 겁니다. 그러나 저처럼 긴 세월을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는 한 낯선 상황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일 뿐입니다.
대기자=독일인들은 깊이 사유하는 철학적인 민족이라 통합의 문제도 철학적으로 잘 풀어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펠만=독일 통일에 대해 진정한 관심이 느껴지는 인터뷰였습니다. 대기자의 『베를린 장벽의 서사』 독일어판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대기자=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라이너 에펠만은…
라이너 에펠만은 1943년생으로 인문고교 졸업 후 64년까지 지붕수리공과 미장이 노동을 했다. 그 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89년 민주궐기(Demokratischer Aufbruch) 창설에 참가하고 중앙원탁회의 대변인을 지냈다. 동독 최후의 모드로 정권 무임소장관, 90년 3·18 총선에서 인민의회 진출 후 로타어 데메지에르 총리의 과도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내면서 동독 인민군의 해체와 연방군 편입을 처리했다.

글=김영희 대기자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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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