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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의 지성과 산책] 김형석 “97년 살아보니 더불어 살던 때가 행복했노라”

기자가 전화를 했을 때 그는 강연차 마산에 가 있었다. 주말 오후에나 좀 시간이 난다고 했다. 100세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도 일주일에 1번 이상 대중 강연을 하며 지내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올해 우리 나이로 97세. 기자를 만나 두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목소리에 힘이 빠지지도 않았다. 노익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수필집 『백년을 살아보니』 출간
60∼70년대 김태길·안병욱과 함께
‘철학자 겸 수필가’트로이카 명성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강연
조심조심, 미리미리…삶의 키워드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있게 남아
탄핵 정국, 법보다 양심·윤리가 중요”

60∼70년대 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와 함께 ‘철학자 겸 수필가’ 트로이카 시대를 펼쳤던 그의 이름이 요즘 다시 회자되고 있다. 올 여름 펴낸 수필집 『백년을 살아보니』를 통해서다. 혼탁한 세태 속에 그 연령에도 꼿꼿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수(白壽)를 목전에 두고도 전국을 돌며 주 1회 강연을 하고 있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왔다는 김 교수는 “건강을 타고난 사람보다는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같다”고 장수 비결을 소개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매주 세 번 수영을 한다. [사진 조문규 기자]

백수(白壽)를 목전에 두고도 전국을 돌며 주 1회 강연을 하고 있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왔다는 김 교수는 “건강을 타고난 사람보다는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같다”고 장수 비결을 소개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매주 세 번 수영을 한다. [사진 조문규 기자]

조심조심, 미리미리. 이 두 키워드가 그의 인생과 건강을 관통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20살 넘게나 살 수 있을까’ 하는 주변의 걱정 속에서 자란 그다. “늘 조심스럽게 살아왔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요즘도 그는 강연 준비를 2주일 전에 다 끝내놓는다. 무슨 일이든 미리미리 해놓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그래야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 그렇게 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는 그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920년생 평안남도 대동 출생인데 고향은 어떤 곳인가요.
“대동강 서남쪽 만경대 가까운 곳입니다. 오래전부터 노송이 많이 있고 그 아래 예배당이 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송산리라 했어요. 소나무산이 있는 마을. 교회에서 신망학교를 세웠는데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시골이었지만 자그마한 문화촌이었습니다.”
만경대는 김일성 생가로 알려져 있는데….
“내가 초등학교 5~6학년을 다닌 학교가 김일성도 다녔던 창덕소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만경대가 김일성 생가는 아니에요. 김일성 어머니가 거기서 3∼4㎞ 떨어진 칠골이라는 마을 분인데 만경대에 시집을 와서 김일성을 첫 아들로 낳게 되요. 옛날엔 애를 낳을 땐 처가에 가서 낳았잖아요. 그래서 만경대는 김일성 아버지 집이지 김일성이 거기서 낳지는 않았어요. 김일성 외가는 완전히 기독교 집안입니다. 김일성 외삼촌이 강랑욱 목사라고 유명했던 분입니다. 김일성도 15살 때까지는 교회도 다니고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랐죠.”
김일성 일가와 얽힌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큰외삼촌이 김일성과 같은 해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김일성 어머니가 우리 외가와 같은 강씨였어요. 김일성 어머니가 젖이 적어 우리 외할머니가 대신 먹여주기도 했답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 큰외삼촌과 둘째 외삼촌 두 명이 공산당에 피살됐어요. 그리고 내 친사촌 동생이 반공운동 하다가 잡혀 들어간 일이 있는데 그때 우리 외할머니가 찾아가서 ‘내가 김일성을 석 달이나 젖 먹여 키웠는데 이래도 되는가’ 라고 말해서 풀려나기도 했답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울 때 얘깁니다.”
그런 비화도 다 있었군요.
“해방되고 9월쯤 김성주가, 김일성 본명이 김성주에요, 돌아왔다고 환영한다고 만경대에 간 일이 있어요. 내가 25살. 김일성은 32세였죠. 사람들이 김일성보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나 물었더니, 친일파 숙청, 사유지 국유화 등 대여섯 가지를 얘기하더라고요. 그때 저건 자기 생각은 아니고 조직에서 나오는 얘기를 교과서 외우듯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바뀌어서 집권하게 되죠.”
 
1939년 평양 제3중학교를 졸업하신 걸로 되어 있는데 어떤 학교였나요.
“창덕소학교 졸업 후 처음에 숭실중학교를 갔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학교였죠. 내가 3학년 때 폐교가 됩니다. 신사참배를 안했다고 일제가 학교 문을 닫아버린 겁니다. 그 학생들을 흡수한 게 일본학교인 제3중학교였어요.”
숭실중학교는 윤동주 시인도 다녔었죠.
“윤동주는 숭실중학교 3학년을 같이 다니다 만주 용정으로 갔습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 나이는 윤동주가 3년 위였습니다. 좀 늦게 공부했죠.”
숭실중학교 시절 윤동주는 어땠나요.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그때도 시를 썼는데 좋은 시인이 될 거라고 봤습니다. 또 성격이 착하고 양순하기 때문에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적극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억울하게 당했다고 봅니다. 당시 일본에 한국 학생들이 많았고 그들이 모여 학생회를 만들었는데, 회장이나 간부는 일본 경찰이 늘 감시했습니다. 윤동주는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다 이름이 올라 있어서 예비검속에 걸린 것이죠. 아주 성격이 깨끗하고 착했죠. 집안이 전부 기독교 집안이고,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 같은 시가 나왔다고 봅니다.”
이어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졸업하셨는데 주로 어떤 철학을 공부했습니까.
“일본 조치대 예과 1년, 학부 3년 마치고 1945년 졸업했어요. 철학 일반을 쭉 공부하고, 그 다음에 연세대에 와서 강의를 맡아 하면서 계속 공부했죠. 이론철학(논리학)과 실천철학(윤리학) 가운데 나는 윤리학과 역사철학을 전공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해방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는 2년간 평양에 머물다 월남한다. 이어 중앙중학 교사를 7년간 지냈다 1954년(34세)부터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3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하다 1985년 정년퇴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저술과 강연으로 현역 시절 못지않은 활동을 계속해왔다.
일본 조치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한 일은 뭔가요.
“평양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2년 있다가 월남했습니다. 평양에 있는 2년 동안 중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교장을 하며 농촌교육에 종사했죠. 일본에서 같이 있던 친구들을 교사로 오라고 해서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 이사장이 잡혀갔는데 나보고 어서 월남하라고 해서 월남하게 됐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조만식 선생도 있었지요.
“조만식 선생도 숭실중학교 출신입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잡았어도 당시 평양을 포함해 북한 사람들은 조만식 선생을 더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자 김일성이 평양의 고려호텔에 조만식 선생을 가둬놓았습니다. 사모님을 제외한 누구도 면회를 못했어요.”
책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평생 몇 권의 책을 펴냈나요.
“좀 많을 거에요. 한 40권 되지 않을까요.”
1959년 동양출판사에서 간행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이 첫 책이죠.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61년 펴낸 『영원과 사랑의 대화』 와 함께 두 책이 다 베스트셀러였죠. 첫 책인 『고독이라는 병』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우리나라에 수필문학이 정립이 안 된 상태였는데 서울대 피천득 교수가 수필집 『인연』을 내면서 수필문학이 개척이 됐죠. 이어 저의 『고독이라는 병』이 나오면서 수필문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돼요. 그 다음부터 수필문학이 일반화됐다고 할 수 있어요.”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어땠나요.
“원고를 삼중당에 넘기고 1년간 미국에 가 있는데 1년 후 돌아와 보니 『영원과 사랑의 대화』로 제가 유명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해 출판연감을 보니 그때까지 비소설이 소설보다 많이 나간 적이 없었는데 『영원과 사랑의 대화』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박계주 소설 『순애보』가 6만부 나간 기록이 있는데,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1년에 그보다 몇 배 더 나갔습니다. 비소설이 소설보다 더 많이 나가긴 처음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애들 6명 학교 보내고 있었는데 수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인기의 비결이 뭐였다고 보나요.
“제가 중앙학교 학생들에게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가 연세대에 왔을 때였습니다. 그런 경험을 살려 『영원과 사랑의 대화』에서 고교 상급자가 후배에게 상담해주는 식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요즘 말로 히트를 쳤다고 그럴까요. 당시 대학생 중에 안 읽은 학생이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가장 많이 호평을 받은 책은.
“『영원과 사랑의 대화』죠. 또 하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많이 나간 책은 『철학입문』입니다. 삼중당이 ‘인문학 입문 시리즈’를 기획하며 나에게 철학분야를 쉽게 써달라고 해서 썼는데 무척 많이 나갔습니다. 서울대 교수들이 시험 답안 채점하다가 비슷한 답안이 많아 물어보니 김형석 교수의 『철학입문』 보고 썼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15판 정도 나갔습니다.”
본인이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역시 『영원과 사랑의 대화』와 『고독이라는 병』 이죠. 아무래도 독자 호응이 많았으니까. 제가 펴낸 책이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철학분야에선 『철학의 세계』 『종교의 철학적 이해』 『역사철학』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필분야가 있고, 세 번째 기독교분야에선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두 책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세 분야에서 제일 많이 나간 것은 역시 수필이고, 그 다음이 기독교입니다. 철학은 전공자들이 주로 보고.”
철학자와 수필가 어느 쪽이 더 본인에게 맞는 호칭일까요.
“본업은 철학인데 밖에 나가면 수필가가 되고 말았어요. 고등학생들도 김형석 교수하면 수필가라고 하죠. 얼마 전 여고 3학년에 강의하러 갔는데 수필가로 소개했습니다.”

1920년 태어난 동갑내기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김태길(2009년 타계) 전 서울대 교수, 안병욱(2013년 타계) 전 숭실대 교수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60~70년대 철학자이자 수필가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이 세 명의 1세대 철학자들은 수필을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윤리-실존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태길, 안병욱, 김형석 세 분의 공통점이 많습니다. 모두 장수한 점도 그렇고….
“돌이켜보니 60~70년대 젊은이들이 어려웠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젊은이들에게 관심과 희망을 준 이들이 시인이나 종교인이 아니라 우리 셋이었던 것 같아요. 제일 영향을 많이 주었던 것 같습니다. 6년 전인가 충청북도 영동에 강연을 가서 끝나고 앉아 있는데 지방 유지가 와서 그래요. ‘우리 60~70년대 정말 어렵게 살았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어려웠는데 안병욱 선생과 김형석 선생이 방송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내서 그걸 보면서 희망을 갖고 살았다’고 하더군요. 기독교인이었던 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안병욱 선생님이 입원중이라 전해드리진 못했습니다.”
세분이 친하게 지내셨죠, 누가 더 인기가 많았나요.
“학문적인 면은 김태길 선생이 앞서고, 사회활동은 안병욱 선생이 앞서고, 나는 그 중간쯤 될 거에요. 한번은 안병욱 선생이 내게 전화를 해서 ‘셋이 일만 했지 이제 80이 넘었는데 1년에 4번 만나서 차도 마시고 우리 셋이 좋은 시간 가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김태길 선생에게 전화해서 얘기했더니 ‘그거 하나만 생각하고 또 다른 생각은 안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제 한 사람씩 떠나갈 텐데 남은 사람은 힘들어서 어떻게 사나. 이렇게 떨어져서 일하다가 한 사람이 가면 이제 갔구나 하고 생각하지….’ 그렇게 서로 존중하면서 친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김태길 선생 먼저 가고 나서 안병욱 선생이 ‘이제 김형석 교수 혼자 남게 될 거 같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어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김태길, 안병욱 선생에 이어 제 어머니와 집사람 마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1년은 참 힘들었어요. 김태길 선생은 충청도 교향으로 가고. 안병욱 선생과 나는 이북이니 강원도 양구를 택했어요. 양구 박수근 미술관 옆에 ‘철학의 집’을 지었는데 안병욱 선생과 나의 기념관입니다. 다 지었는데 좀 더 크게 지을 예정이다. 안병욱 선생 장례식을 거기서 했습니다. 나도 거기 가서 할 겁니다. 한 달에 한번은 양구에 갑니다. 가서 강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인문학 강좌도 만들어, 서울 제자 교수들이 가서 도와도 줍니다. 다들 좋게 느껴요. 시인 소설가 미술가는 기념관을 만드는데 철학자는 없잖아요. 잘됐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사진도 거기 다 있습니다.”
존경하는 스승이 누구인가요.
“첫째는 도산 안창호 선생입니다. 마지막 강연을 들었습니다. 감옥 있다 건강이 안 좋아 가출옥 했을 때 고향에서 강연을 한 번하고 교회에서 설교도 하다 몇 달 후 돌아가셨습니다. 마음의 한 스승입니다. 또 한 분은 중앙학교에 7년간 재직할 때 만난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인품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김태길 안병욱 선생과 친하게 지내며 스승 못지않게 존경하며 지냈습니다. 세 명 모두 정년퇴직 하고도 계속 사회적으로 일했습니다. 셋이 만나면 사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가치관을 줘야하는데….”
 
세 분이 활동하던 시대를 ‘수필 철학’ 시대라고 불러도 될까요.
“세 명의 공통점입니다. 철학적 문제를 수필 수상의 형식을 밟아서 전해줬습니다. 상아탑적인 철학에선 철학자들이 대중을 자꾸 자기들에게 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가서 데리고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역할이었습니다. 철학에서 인문학으로 확장해 나갔죠. 책도 많이 썼지만 독자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통해 고전이 많이 읽혔다고 본다.”
60~70년대 젊은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보는 게 편할 것 같아요. 이 시대에 어떤 가치관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라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셋 다 실존주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구라파에 실존주의가 유행했던 시대였죠. 그 실존주의를 한국적인 우리 문제로 풀어내려고 했습니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철학적으로 답해 보는 거죠. 과거엔 철학의 대상이 존재였습니다. 자연이 되기도 하고 종교가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실존주의는 인간 자체를 연구하는 거고, 인간의 문제를 자아에서, 즉 나 자신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절망, 죽음 같은 문제들이 떠올라오게 되죠. 제1차세계대전부터 2차대전 직후까지 실존주의가 세계적인 과제가 됐습니다. 한국에선 6ㆍ25전쟁 이후 실존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실존주의는 지금도 필요한 철학인가요.
“실존주의는 개인 문제인데 지금은 사회과학적 과제가 더 커졌습니다. 사회철학적인 시대라고 할까요. 사회가 자꾸 변하는 거죠. 실존주의를 일으킨 사람은 니체,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입니다. 그들은 사회문제보다 개인의 문제를 다뤘다고 봐요. 2차대전 이후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실용주의 등이 나오면서 개인보다 사회의 문제가 부각됐습니다. 우리 셋도 실존주의에서 출발해서 그걸 바탕으로 한국적 사회문제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한국적 사회문제란 무엇입니까.
“정신적 황폐 속에서 인간과 인생의 가치, 역사의 방향 이런 걸 모색하던 때였습니다. 한국적 가치관의 탐구라고 할까요. 우리 민족의 공통된 가치관을 찾아보려는 거죠. 우리 전 시대에 잠깐 나왔던 실학사상 같은 것이 우리 시대에도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보십니까.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데 그 나라들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국민의 70~80%가 독서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걸 못하는 나라는 정신적인 영도력을 못 가집니다. 남미를 여행해보면 책 읽는 사회가 아니죠. 아시아에서 독서 하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좇아가는데 아직 멀었습니다. 문화에 참여하는 국민이 많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은 큰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보다 문화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어제 마산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교육은 콩나물에 물주기와 같습니다. 물을 안 주면 말라버립니다. 대학으로 끝난다고 하면 그걸로 마르는 거고, 50대에 끝난다면 거기서 말라버립니다. 콩나물 물주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올해 새로 펴낸 수필집 『백년을 살아보니』를 보면, 인생에서 보람 있는 나이를 60~75세로 해놓았습니다.
“왜 60세냐, 60이 되니까 내가 나를 믿게 되더라고요. 후배들 보기에도 떳떳하고, 명예만 좇지도 않고. 그리고 75세까지는 계속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콩나물에 물 안주면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계속 책 읽고 생각을 하면 85~86세까지는 연장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사회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강연을 하는 이유는 내 수준보다 사회 수준이 낮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김태길, 안병욱 선생과 내가 세 명 모두 다 60년대 초반에 미국에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교수들과 백인들이 제일 많이 한 얘기가 바로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선 60이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때 우리 세 명 모두 공통의 자극을 받았습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어떻게 보시는지.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다고 해도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한테 인간관계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직장과 사회생활 할 때 절대로 아첨하는 사람은 가까이 두지 말고 나도 아첨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개인이 유능해도 옆에 유능한 사람을 두지 않으면 성공 못합니다. 편가르기 하는 사람은 절대 데리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편견을 가진 사람은 집단 이기주의가 됩니다. 지금 정치가 편가르기 아니에요.”
법보다 질서가 더 중요한가요.
“김영삼 정부 때부터는 힘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됐잖아요. 그건 중간 사회이고 선진사회는 질서가 중요해요. 법보다 양심, 도덕과 윤리가 중요해요. 국민들은 그 질서를 믿고 살았는데 큰 일 났다고 생각하여 촛불집회에 나오는 거죠. 지도자가 법의 제제를 받는 걸 원하지 않지만 그걸 안하면 질서사회로 올라가질 못해요. 박근혜 대통령에 바라는 게 있다면 이겁니다. 잘못한 것은 더 많이 얘기하라, 어떻게 피해갈까를 생각 말고. 정치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것. 혼자서는 정치를 못해요. 뭔가 출발부터 지금 와서 보니까 잘못 들어선 것 같아요. 아첨하는 사람, 편가르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인간관계 기본인데 그걸 몰랐던 거 같아요.”
선생님 수필의 오래된 주제는 ‘영원’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영원’은 어떤 의미인가요.
“종교와 실존철학(윤리, 역사)에서 모든 과제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는데 그 결과가 영원과 일치하면 역사에 남고 시간으로 끝나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영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철학은 영원에 대한 애모심입니다. 지성적이고 고독한 사람은 영원을 찾아갑니다. 깊은 고독에 빠져보지 않으면 영원을 창조 못 합니다.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은 좀 추상적인 얘기로 들립니다. 이번에 펴낸 『백년을 살아보니』는 제목부터 아주 구체적이어서 더 끌리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앞으로 글을 얼마나 쓸까 싶어서 2015년 2016년에 많이 썼습니다. 출판사에서 백년 가까이 살 경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것을 써봐달라고 해서 쓰게 됐어요. 책 제목은 출판사에서 그 제목을 가져와서 달게 됐습니다.”
100년 가까이 살아보니 느낌이 어떠신지요.
“오래 살아보니 더불어 살았던 때가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남겨준 것이 쌓여서 역사가 되고 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짐을 내가 대신 져준 기억이 행복하게 오래 남습니다. 젊은이의 고민을 대신해 주고, 기독교의 고민, 정치가의 고민을 내가 대신 생각해보았을 때 같은 경우죠.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있게 남는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나이 들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인생은 다 갔다고 안타까워할 것도 없습니다. 아직 누군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것은 없나요.
“나는 인생을 아름답다고 봐요. 인간은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동안은 누구나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양구에 가면 내 글이 하나 있습니다. 자다가 우연히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위한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무거운 짐이었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그 메모를 지금도 보면 결국 내 인생이 학자로서 진리를 찾은 것과 불행한 동포들 사이에 살면서 겨레를 위해 마음을 가졌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무거웠지만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자다가 깨서 메모를 남겼는데 내 친구들이 이 글을 보고 그럴 거라고 하더군요.”
후회되거나 아쉬웠던 일은.
“후회되는 것도 많지만 오래 생각 안 해요. 잘못되고 후회되는 것에 매달리는 것보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자는 생각이죠. 만회할 수 있는 게 뭔지를 생각하는 편입니다.”
평생을 기독교와 함께했는데 요즘 한국 교회를 어떻게 보시나요.
“내가 기독교인인데다 연세대에 있어서 잘 압니다. 대교회주의는 안됩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걸 교회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 정신으로 사회와 역사에 희망을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교회주의에 빠지고 교회가 목적이 됩니다. 그건 아닙니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하버드, 예일 등 세계의 명문 대학은 모두 신학교로 시작했지만 그런 학교들을 지금 기독교 대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인문학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타락합니다. 세계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살린 나라는 후진국가이고, 기독교 정신을 살린 나라는 선진국가입니다. 구라파에 기독교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교회가 희망을 줘야 합니다. 영원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영원히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창조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철학자들은 다 그렇게 보는데 교회 목사들이 교리화하면서 형식만 남았습니다.”
건강의 비결은.
“지금 내가 100살이 다 되어 가는데 건강의 원동력은 경험 안 해본 사람은 잘 모릅니다. 오래 사신 분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욕심이 적은 사람, 일을 잘하는 사람. 욕심 많은 사람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80 넘어서도 일하는 사람은 다 건강합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해줘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건강 비결 자꾸 물어보는데 대개 나도 모른다고 합니다. 찾아내라고 합니다.”
크게 아팠던 적은 없었나요.
“어려서 건강이 나빠서 항상 조심해야 했어요. 14살에 건강이 너무 나빠서, 무슨 병인지 잘 모르겠는데 간질병으로 부모님이 생각했는가 봐요. 달리기하다 쓰러지고 그래서, 부모님과 의사는 얘는 희망이 없다고 그랬어요. 나도 느끼고요. 건강 때문에 중학교 못갈 줄 알았어요. 어머니는 제가 20살까지만 사는 것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건강에 무리는 절대 안 해요. 강연을 많이 다녀도 2주일 전에 강연할 준비를 미리 다 해놓죠. 급박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내일 모레 강연이 있다고 하면 충분히 잠도 자고요, 나는 일하기 위해 사는 거 같아요, 그런데 행복해요. 그리고 무리를 안 하고요. 오래 사는 사람은 절대 무리를 안 해요.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오래 사는 게 아니고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거 같아요. 제가 아는 130세까지 산 목사님이 계셨는데 절대 무리를 안 해요. 100세까지도 정신이 깨끗했어요.”
 
운동은 얼마나 하시는지.
“50이 넘으면 운동하는 게 좋아요. 운동을 위한 운동은 하지 말고요. 독일 갔더니 국민운동이 수영과 자전거더군요. 어딜 가든 자전거길이 있고 공공시설엔 수영장 있어요. 옳다고 봐요. 80 넘으면 제일 먼저 오는 게 다리 힘이 빠져요. 지금 내 나이에 걸어다니는 사람 별로 없거든요. 그건 자전거 타는 게 좋아요. 나는 중학교 4학년을 자전거 타고다녔어요. 옛날이지만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지금은 수영을 하고 있어요. 나는 약은 가능한 잘 안 먹어요. 나이 들면 소식할 수밖에 없어요. 나처럼 일 많이 하는 사람은 많이 먹어야 해요. 육식을 해도 다 소화시켜요. 100살 넘으면 먹고 싶어도 못 먹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 하는 일 하겠습니다. 교육과 학문.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봐요.”

그는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매일 장문의 일기를 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매주 세 번 수영을 한다.

글=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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