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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자칭 ‘보수신당’에 고함

최훈  논설실장

최훈
논설실장

놀랍다. 한국갤럽의 12월 조사다. 자신이 진보라는 시민이 31%. 보수라는 27%를 앞섰다. ‘매우 보수적’이란 응답은 5%.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과 일치했다. 대역전은 광장 촛불이 본격화된 11월부터다. 진보(30%)가 보수(26%)를 올 들어 처음 앞질렀다. 10월까지는 보수가 3∼9%포인트 차이로 많았다. 보수 기득권 정치에 대한 분노가 보수를 중도로, 중도를 진보로 밀어버린 새 이념 지도다.

한국 진보가 보수보다 많아져
기득권 정치에 분노한 새 지형
신당, 보수의 사명·가치 알리고
실천해낼 신념의 얼굴을 전면에


 탄핵으로 휘청해진 갈림길에서 새누리당은 분당으로 제 살길에 나섰다. 보수신당의 부활을 읍소하지만 서구의 비유로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 사장이 닭한테 지지를 호소하는” 격이다. “박근혜와 함께 보수의 가치도 휩쓸려가는 것 아니냐”는 보수층의 허탈함을 헤아리고나 있는지. “별의별 보수든 보수는 기득권 향수 속에 바꾸지 말자는 것”이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12년 전 조롱이 다시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보수정치는 왜 이 꼴이 됐는가.

 보수의 가치를 유지, 확장시키는 데 그들은 실패했다. 그들이 보수인지가 더 의문이다. 근대 보수주의 창시자인 에드먼드 버크가 정의한 보수에 다시 눈길이 가는 이유다. “사회의 일관성을 지키되 수단에 변화를 줌으로써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것”. “한쪽에 짐을 많이 실어 자신이 탄 배의 평형 상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성을 탑재해 평형을 유지하는 게 보수”라며 “평형이란 정체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변화와 개혁을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그는 규정했다. 보존을 위해 ‘개혁가’가 되라는 주문이다. “평형을 유지시키려는 이성의 재고가 바닥나면 분노와 적개심이 득세한다”는 버크의 예측은 우리의 지금이다.

 보수 정권 10년. ‘개혁’은 외면됐다. 대통령 형님 등 측근 비리, 권력(청와대·관료)과 부의 유착, 보수의 상징인 교수들의 입학 비리, 군주의 비선 부활까지. 베일이 걷히고 평형이 무너진 걸 목격한 분노의 시민혁명은 필연이다.

 자칭 보수신당은 역사의 보수가 넘겨준 유산을 되새기며 출발하라. 빚도 적잖지만 인간의 자유와 책임, 실용과 균형, 관용 등의 의미 있는 가치 말이다. 한국의 보수는 ‘자유’와 ‘평등’을 이식해 준 기독교와 구한말 개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개화파는 조선의 유교와는 맞섰지만 동학혁명이나 왕정 타도 대신 입헌군주제 등의 타협 가능한 개혁을 내세웠다. 개화파의 독립신문은 ‘보수적 성향’이 “애국심, 모국에 대한 애착, 혈족애”라며 “대체로 가장 훌륭한 인간들의 품성”이라고 언급했다(이나미 『한국의 보수와 수구』). 식민지를 거치며 국가의 보존을 뼈저리게 아파한 선비들의 각성이다.
 미 군정기 자유민주주의 이식을 떠맡았던 한민당(韓民黨) 보수 세력은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부를 지지했다. 반쪽이나마 ‘국가의 정통성’을 보존했다. 이 대통령이 실시한 토지의 ‘유상 매수’는 북한의 ‘무상몰수’와 대척을 이루며 좌익에 의한 국가 부식을 최소화했다. ‘반공’을 나라 보존의 축으로 삼았던 이 대통령이 휴전 마지막까지 ‘남북통일’을 되뇐 장면은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못 박은 헌법으로 승계됐다. 먹고사는 문제에 눈을 떴던 박정희 대통령은 ‘실용’과 ‘후대에 대한 책임’이란 가치를 남겨 주었다. 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의 김영삼 정부는 보수와 개혁이 유리될 수 없음을 일깨워줬다.

 세월의 시험에서 살아남은 보수의 유산을 후대는 어떻게 지켜왔는가. 실용 CEO의 기대를 받았던 이명박 정부는 ‘4대 강 토목’의 집착 속에 대한민국 경제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보수의 아이콘’이라던 박근혜 정권은 “자유로운 존재는 책임지는 존재”라는 보수의 근본을 허물며 ‘대통령 무책임제’란 조소를 받고 있다. 북한의 몰락이 가속화된 때문인가. 안팎 경쟁이 없던 보수 10여 년. 긴장감과 치열함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지켜야 할 게 없으니 보수의 영토에 미국의 ‘티파티(Tea Party)’ 같은 자발적 시민 참여는 사라진 지 오래다. 촛불의 반대편에 맞선 면면이야말로 현 보수정치의 ‘슬픈 자화상(自畵像)’이다.

 보수신당에 고한다. 5년의 집권보다 소중한 건 보수의 성찰과 재정비다. 짧은 정치 인생보다 훨씬 더 긴 후대에게 책임지는 게 보수다. 반기문이란 ‘사람’이 유일한 대안인가. 생각 짧은 얼굴 마담만으론 실패하지 않았는가.

 개인 자유를 최대화할 작은 정부. 재산권 박탈인 모든 규제의 철폐. 정경유착의 절연. ‘유토피아’ 대신 ‘현장’으로의 차별화. 필요에 따른 복지. 세금 내는 사람의 확대와 건전 재정. 북한 인권에 대한 원칙. 올바른 수월성교육의 허용.

 보수의 사명, 보수이기에 더 잘할 일을 밤새 토론하고 약속하라. 이를 실천해낼 용기, 인간적 매력을 지닌 신념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우라. 12월의 조사 결과 중도층은 28%가 남아 있다. 보수신당에 주어진 마지막이자 유일한 시간이다.

최훈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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