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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수재 관료들의 바보놀음

양선희  논설위원

양선희
논설위원

이 즈음이면 식자(識者)들은 저물어간 한 해의 세태를 사자성어로 풍자하는 유희(遊?)를 즐긴다. 매년 촌철살인의 사자성어를 뽑는 교수신문은 올해 ‘군주민수(君舟民水)’를 내놨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은 배를 뜨게 하지만 화가 나면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밖에 후보로 거론됐던 사자성어를 보니 천리를 거스르는 자는 패망한다는 뜻의 ‘역천자망(逆天者亡)’,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노적성해(露積成海)’ 등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 농단 사태와 이에 맞서 결연히 일어난 촛불 민심을 빗댄 비유가 주를 이루었다.

국민들이 처단한 대통령 헌정 농단
청렴사악한 ‘권력충’들은 어찌하나


교수신문의 사자성어는 오랫동안 인심과 세태를 풍자하는 것으로 날카롭지만 씁쓸하게나마 웃어넘길 만한 여유가 있었다. 한데 최근엔 가벼운 유머조차 사라지며 비장함마저 감돈다. 지난해엔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뽑아 본격적으로 국가 리더십에 대한 의심을 표현했다. “혼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을 합친 것으로 각박해진 사회 분위기의 책임을 국가 지도자에게 묻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나도 이를 빌려 중국 명(明)나라의 대표적 혼군 만력제(萬歷帝)의 사례를 들어 박 대통령의 일하는 방식을 걱정하는 칼럼을 썼다.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틀어박혀 있었던 박 대통령처럼 만력제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인사도 제때 하지 않는 태정(怠政)에다 개인 축재에 힘을 쏟으며 환관 세력이 발호하도록 함으로써 나라를 멸망으로 끌고 간 왕이었다.

비록 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불통과 무능으로 국민들을 걱정시켰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에겐 이런 근심과 우려를 대통령에게 전달해 스스로 각성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하려는 열망도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젠 알게 됐다. 근심스러운 국가 리더십은 나라의 우환거리일 뿐 대반전이나 기적을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도 웃음기 거두고 교수신문이 주목하지 않았지만, 대통령 못잖은 우리 사회의 우환거리에 대해 연말 유희 삼아 사자성어를 하나 뽑아보려고 한다.

‘가치부전(假痴不癲)’. 바보인 척 하되 시쳇말로 ‘정신줄’을 놓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병법 36계 중 27계로 적의 기운을 빼놓는 ‘병전계(幷戰計)’의 계책 중 하나다. 똑똑함을 숨기고 자존심을 누르며 손가락질을 감내하는 역발상의 처세술. 한신과 사마의가 성공했던 높은 경지의 술수다. 한데 김기춘·김장수·우병우 등 이 정권 핵심 관료들의 국정조사 청문회에선 웬만한 내공으로는 도달하기 힘들다는 ‘가치부전’ 달인의 경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 현혹하는 ‘무중생유(無中生有)’의 기술로 본질을 흐트러뜨리고 진실을 허물어 사태를 혼미하게 만드는 신묘한 재주도 구사했다. 소년 등과하고 권력의 핵심부로만 질주했던 이 나라 대표 인재들의 바보놀음에 청문회는 무능하게 겉돌았다.

이들이 무능·나태하고 속된 말로 ‘허세 쩌는’ 대통령 앞에선 바보처럼 굴고 뒤에선 무슨 일을 했을까. 이번 정부 들어 스포츠와 문화융성, 창조경제 말고도 이상하게 돌아갔던 정책과 인사의 난맥상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인데 여기에서 이 수재 고수들의 권력놀음은 없었을까. 이런저런 의심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중에 특검에서 새나오는 김기춘의 재임 시절 혐의들을 보고 있자면 의혹이 현실로 구현될 것 같은 오싹함이 느껴진다. 한데 그들을 기소해봐야 직무유기·직권남용 정도란다. 뒷돈 챙긴 증거는 없으니 크게 걸게 없다는 것. 하긴 권력 핵심을 꿰차는 능력 있는 수재들이 탈날 만한 사소한 뒷돈을 챙기진 않았겠지. 문제는 국민 기운만 빼는 이런 청렴사악한 권력놀음은 벌할 방법이 마땅찮다는 거다.

이들을 보며 깨달은 건 있다. 대통령만 보면 안 된다는 것. 주변 인사들도 부정부패뿐 아니라 권력에 탐닉한 사악한 ‘권력충’들이 아닌지 깨알같이 검증해야 한다는 것. 다음 대선을 위해 꼭 기억할 일이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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