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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띠 해 오는데 ‘닭’은 슬프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는 닭과 오리의 영정사진이 놓여졌다. 그 뒤론 검은색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섰다. ‘조류인플루엔자(AI) 생매장으로 희생된 2000만 생명을 위한 위령제’였다.

스터디룸·독서실·고시원 전전
‘인간 닭장’서 청춘들 오늘도 열공

AI로 살처분 2600만 마리 넘어
동물단체 “생명 살리는 새해 되길”

인생 2막 꿈꾸며 오픈한 매장
월 매출 100만원에 끝없는 한숨

매년 이맘때면 새해를 상징하는 12지(支) 동물이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정유년(丁酉年) 닭의 해는 출발이 다르다. 새 아침을 상징했을 ‘꼬끼오’ 울음소리는 2016년 세밑 대한민국의 울음 그 이상이 아니었다. 26일 현재 2600만 마리가 넘는 가금류가 생매장됐다.
위령제를 기획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황윤씨는 위령문에 “2017년엔 살생의 기운이 아닌 생명의 씨앗을 심는 새해가 되길 기도한다”고 썼다. ‘생매장과 공장식 축산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구성원인 황 감독은 살처분 이후도 염려했다. “우리가 묻은 닭은 침출수, 혹은 바이러스, 혹은 악몽, 혹은 트라우마 등등 어떤 식으로든 돌아올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AI를 창궐하게 만든 빽빽한 닭장은 젊은이들의 삶 속에도 있다. 취업 관문을 뚫으려 스펙을 쌓는 대학가나 고시촌의 연말 풍경을 닮았다.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1993년생 닭띠 방지영(23)씨는 종로에 있는 학원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내리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없으면 학원에 딸린 독서실에서 밤늦도록 자습을 한다. 때론 자신의 처지가 ‘닭장 속 삶’ 같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방씨는 “이제 2학년을 마친,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학원에 나오더라”고 말했다. 취업 시장은 정유년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4년제 일반대 취업률은 64.4%로 3년째 하락세다.

역시 닭띠인 전혜리(23)씨는 졸업을 미룬 채 지난 반년간 ‘대학교 5학년’으로 지냈다. 신입사원 공채에 30곳 넘게 지원했지만 결과는 모두 낙방. “인·적성 시험에 떨어지면 문제를 많이 틀려서인지, 인성이 안 맞아서인지 몰라 허무했다”는 그는 “서류전형에 붙어도 기쁜 건 아주 잠깐, 1차·2차·3차 어떤 회사는 4차까지 너무 많은 관문이 남아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규직 전환이 가능한 인턴 전형에 합격해도 앞으로 다른 인턴들과 닭싸움 같은 경쟁을 벌여야 한다.

열두 살 더 많은 ‘81년생 닭띠’들은 일자리 고민에서 자유롭지 않다. 회사원 김모(35)씨는 “돈 들어갈 곳은 많아지고, 벌이는 빠듯하니 이직을 고민하는 또래가 많다”고 했다. 김씨는 “나도 이직을 알아보고 있다. 이 직장을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안한 밥벌이에 대해 하소연했다.
‘닭의 비애’는 중년의 사장님에게로 이어진다. 부산시 수영구에서 8년째 치킨집을 운영 중인 손재호(51)씨는 “우스갯소리로 ‘마지막 직업’이 치킨집 사장이라고 하잖아”라고 신세 한탄을 했다. 손씨의 경우 올 초부터 매출이 줄기 시작하더니 ‘치킨 성수기’인 여름엔 전년보다 20% 줄었고, AI가 퍼진 후 절반까지 떨어졌다. 장사가 어렵다 보니 가게들 사이에 경쟁도 치열해졌다. 미성년자를 꾀어 가게에 들여보낸 뒤 경찰에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다”고 신고하는 일도 벌어진다고 했다. 손씨는 “적발된 날엔 딱 한 테이블에 손님이 앉았는데 30분 뒤에 경찰이 왔다. 장사도 안 되는데 신분증을 안 가져왔다는 손님과 다툴 점주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 자영업 등록 사업체 479만 개 중 25.5%가 연매출 1200만원 미만이었다. 『대한민국 치킨展(전)』의 작가 정은정씨는 이들을 일컬어 “스스로 고용한 노동자일 뿐이다. 어쩌면 안정되게 ‘고용당하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하다”고 썼다.

이현 기자 lee.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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