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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뮤지션 20년, 지금도 난 록 페스티벌에 간다

양방언의 주요 작품 1집 ‘The Gate of Dreams’(1996) 2집 ‘into the light’(1998) 3집 ‘Only Heaven Knows’(1999) 4집 ‘Pan-O-Rama’(2001) 비정규 컴필레이션 앨범 ‘피아노 스케치’(2002) 5집 ‘Echoes’(2004) 6집 ‘Timeless Story’(2009) 비정규 스페셜 앨범 ‘Floating Circle’(2011) 7집 ‘Embrace’(2015) 솔로 데뷔 20주년 기념 ‘양방언 더 베스트’(2016)


치과 의사이자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 형도 외과 의사, 큰 누나와 둘째 누나는 약사, 셋째 누나는 마취과 의사. 막내 아들인 그 역시 의사였다. 일본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1년간 마취과 의사로 일한 후 도쿄대학 정형외과 의사로 채용돼 설명회에 가던 날 결단을 내린다. “난 여기 있어선 안 돼.”


음악은 운명이었다. 제주 출신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재일 한국인 2세 크로스오버 뮤지션 양방언(56). 지금은 세계적 음악가가 되었지만 단돈 50만원 들고 가출했던 그때만 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밴드 연주자의 애환을 경험하고 나서 일본 록의 전설 하마다 쇼고, 홍콩과 중화권에서 유명한 록 그룹 비욘드(Beyond)와도 팀을 이뤄 활동하며 숨가쁘게 10년의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만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


 

양방언 재일 한국인 2세, 의사 출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크로스오버 뮤지션. 그를 소개하는 표현이 다채롭지만 ‘꿈의 탐험가’로 불리길 좋아한다. 의사를 버리고 음악을 택한 일, 밴드 연주자와 프로듀서를 하다 솔로 작곡가로 독립한 일 모두 꿈이었다. ‘여우락 페스티벌’ 예술감독, ‘제주뮤직페스티벌’ 예술감독 등에 이어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꿈을 멈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시 달려온 게 어느새 20년이다.


“솔로 활동 이전엔 남들의 작품을 연주하거나 편곡했습니다. 편곡과 프로듀스 작업은 멋진 일이지만, 완성된 작품은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의 것이었죠.”


양방언만의 음악이란 뭘까. 종로 1가 그의 서울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20주년 기념 콘서트(11월 3~5일 국립국장 해오름극장)를 앞두고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다.


1996년 11월 4일 발매된 솔로 1집 앨범 제목은 ‘더 게이트 오브 드림(The Gate of Dreams·꿈의 문)’. 이번 20주년 기념 콘서트 제목은 ‘유토피아(Utopia·이상향)’. 노랫말이 없는 연주곡들이기에 작곡가인 그의 생각은 제목이 상징한다. 꿈의 문에서 유토피아까지. 그는 얼마나 꿈을 이루어냈을까.


그가 도쿄에서 태어나 30년간 북한 국적으로 살았다는 점도 그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아버지가 북한 국적이었기에 조총련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민단계 소속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특별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꿈의 문’ ‘유토피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나. “지금까지 잘 열리지 않던 내 꿈의 문을 이제 열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것이 어떤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상향에 도달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출발이고 가능성이다.”


솔로 데뷔를 앞두고 이런 생각도 했었다. “다른 이의 마음속 뿌리까지 직접 닿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그것을 위해 클래시컬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의 음악이 듣는 이의 마음속 뿌리까지 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케스트라와의 융합은 이뤄졌다. 그의 음악의 출발점은 클래식이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고 대학 때까지 레슨을 받았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록, 재즈 등 대중음악에도 푹 빠졌다. 1집 앨범부터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특성이 드러났다. 중국 중앙교향악단의 오케스트레이션과 마두금·장고·꽹과리·징·드럼·베이스·퍼커션, 그리고 피아노가 함께 어우러진다. 2집부터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했다.


-양방언 하면 4집 앨범의 ‘프론티어(Frontier)’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원래 별도로 만든 곡인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공식 주제음악으로 선정되면서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다. 20주년 베스트앨범에도 실었다. 이번엔 재즈풍의 ‘네오(neo) 프론티어’로 새롭게 편곡했다.”


-프론티어 이후 새로운 음악이 잘 안 나온다는 지적도 있는데. “내 음악의 영역이 넓어졌다. 대형 행사의 음악감독을 많이 맡았다. 2012년부터 3년 동안 국립극장에서 국악의 현대화를 내건 ‘여우락 페스티벌’ 음악감독을 지냈고, 2016년부터는 ‘제주뮤직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폐회식 차기 개최지 공연 음악감독을 지낸 데 이어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으로 활동중이다.”


-국가 규모의 대형 행사 음악을 주관하면서 오히려 대중과는 멀어진 것 아닌가. “대형 행사 음악은 마감시간이 있고, 창작 앨범은 마감시간이 없으니 뒤로 미뤄지는 측면은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그래서 대중과 더 자주 만나기 위해 전국 투어 라이브 공연을 많이 하고 있다. 지난해 7집 앨범 ‘임브레이스(Embrace)’도 냈다. 또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영화음악 ‘천년학’ 등을 만든 것도 저에게는 신선하고 다 의미가 있는 일이다.”


-50대 중반에 새로운 음악을 시도할 수 있을까. “시도를 해야죠. 그러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도 록 페스티벌에 다니며 감동을 많이 받는다. 후지 록 페스티벌은 매년 간다. 9년째다. 12만 명이 모인다. 미친 듯이 열광하고, 나 자신도 열광한다. 자극과 감동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제주도를 자주 가면서도 영감을 얻는다.”


-국악인이 아니면서 ‘여우락 페스티벌’ 감독을 맡았는데. “‘상식을 넘는 시도를 해도 나를 지지해야 한다’는 약속을 받고 수락했다. 3년 동안 젊은 음악가들과 다른 장르의 유명 뮤지션들이 만나는 장을 많이 만들었다.”


-한국 국악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는가. “서양 페스티벌에 초대 받는 팀도 나오고 많이 다양해졌다, 퓨전에 주목하고 싶다. 예전 퓨전은 좀 어려웠다. 서양 음악을 그대로 가져와서 국악기로 연주하는 방식이었다. 이젠 젊은 친구들의 감각이 성장하고 있다. 록, 재즈 등 많은 음악을 소화하면서 연주를 한다. 국악의 미래가 밝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에서는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다. 서양음악만 한다. ‘여우락 페스티벌’ 같은 것도 없다.”


-평창 겨울올림픽 음악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전체적인 줄거리를 잡아가며 논의를 하고 있다.”


-일본·홍콩·한국에서의 활동에 비하면 중국 대륙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이 보이지 않는다. “2년 전 중국 허난(河南)성에 있는 테마파크의 워터쇼 음악을 만들었다. 엄청 규모가 크더라.”


-중국에서 연주 활동은 하지 않는데. “초청이 없다.”


-공산당 입맛에 안 맞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닌지. “그런 것은 없다. 공연 얘기가 있긴 했었지만 실현은 안 됐다. 나는 중국에서 애니메이션, 게임 작곡가로 많이 알려졌다. 일본에서 제작된 ‘십이국기(十二國記)’ 애니메이션 배경이 가상의 중국이다. 중국인들이 아주 많이 본 것 같다. 내가 NC소프트 게임음악을 한 것도 중국 친구들이 알고 있다. 게임음악 요청도 있었다.”


그의 가족이 모두 의사나 약사인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다. 1930년 13세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모두 공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존을 의미했는데, 조선인이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며 내린 결론이 의사였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끝내 어기고 돌아가실 때까지 용서를 빌지 못한 것을 양방언은 지금도 안타까워한다.


-성장 과정에 국적이 문제 된 적은 없나. “어린 시절부터 내가 사는 환경이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왜 일본에 사는지. 록 음악을 좋아해서 선생님들한테 혼나고. 조총련 학교이기 때문에 서양음악 특히 록 음악 듣는 거를 안 좋아했다. 그때 ‘반동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일상적인 말이었다.”(웃음)


-그런 기억이 음악에 영향을 미칠까. “음악이라는 게 지내온 배경과 그로 인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영향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껄끄러운데 재일 한국인으로서 어려운 점은 없나.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의도적으로 생각을 안 한다.”


-위안부 문제나 역사 문제를 음악으로 풀어보려고 하지는 않나. “그런 생각은 없다.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질 수 있어서. 상호 간에 오해가 생길까 봐. 그런 거보다는 한국 뮤지션과 일본 뮤지션이 함께 신나게 연주하는 일이 많은데 그런 거 자체가 얼마나 보기 좋은가.”


-한국은 분단 사회다. 이념갈등이 심하다. 화음을 만드는 작곡가로서 좋은 아이디어가 없나. “개인적인 시각을 바로 음악에 반영하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체적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파노라마’ 앨범에 ‘드림 레일로드(Dream Railroad·꿈의 철도)’라는 곡이 있는데 거기서 경의선 철도를 연상하며 어머니 고향 신의주와 아버지 고향 제주도를 연결시키기도 한다.”


-자서전 『프론티어, 상상력을 연주하다』에서 ‘지적 질량이 많이 포함된 소리’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어렵게 얘기한 거다. 지적인 음악이 있다고 생각한다. 뭔가 이 사람 음악에는 생각이 있다고 하면 기쁘다. 지적인 음악만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듣는 순간 좋은 음악도 좋다. 내가 만든 음악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가치였던 ‘공존’은 아들에게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생의 가치를 묻자 “소통”이라고 했다. 7집 음반 제목 ‘임브레이스’에 대해선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했다. ‘경계 넘기’ 혹은 ‘경계 없음’(No Boundary)은 그의 모든 음악과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을 융합하는 방식의 음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가. 그에 대해서도 경계를 두지 않겠다고 했다. ‘무경계 뮤지션’ 양방언의 또 다른 20년은 어떻게 전개될까.


 


 


배영대 문화선임기자bae.young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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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