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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 무뎌지면 새 칼을 산다고?


오래전 일본 우에노에 있는 도쿄국립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다. 르 꼬르뷔지에가 설계한 건물인 서양관도 한 동 있어 일부러라도 찾아봐야 하는 곳이다. 전시관 중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곳이 보검 컬렉션이다. 무사가 득세했던 나라니 칼에 대해 숭상의 예를 갖추는 일은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어둑한 전시장 내부에서 서늘한 광채를 내뿜던 16세기 보검의 날은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칼은 무기 이상의 힘으로 인간을 압도한다. 마치 호랑이와 마주친 동물이 오금 저리며 얼어붙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우연히 일본의 보검과 다시 마주쳤다.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동양관에서다. 방 하나가 모두 검으로 채워져 있다. 놀라움이 앞섰다. 일본을 상징하는 칼의 힘은 유럽 사람들에게도 인상적인 모양이다. 도쿄박물관에서 느꼈던 칼의 섬뜩한 아름다움을 함부르크에서 다시 보게 될 줄 몰랐다.


아닌 줄 알지만 사족을 달겠다. 전시된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유물 가운데 가장 다채로운 내용과 양으로 채워진 곳은 단연 일본이다. 부아가 났다. 나라 밖에선 저절로 애국자가 되는 모양이다. 열심히 한국의 전시물을 찾아보았다. 실망스러웠다. 몇 점되지 않는 빈약한 컬렉션 탓이다. 그나마 기품 있는 조선의 장롱 하나가 겨우 체면을 세워주었다. 한국을 알고 싶어도 알 방법이 별로 없어 아쉬워하는 독일인들이 있다. 우리를 제대로 알리는 노력이 부실했음을 반성해야한다. 국격은 문화의 내용과 깊이로밖에 증명되지 않는다.


이상하리만치 칼에 집착하는 나를 보고 마누라는 의아해 했다. 함께 쇼핑을 할 때도 주방기구를 취급하는 곳에서만 반짝 관심을 보였던 전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좋은 칼을 보면 먼저 “사줄까?”를 외쳤던 것도 나다. 좋다는 독일의 헹켈이나 일본의 KAI 사가 만든 고가의 ‘다마스커스 타입’(시리아의 옛 도시 다마스커스에서 만들어진, 혹은 다마스커스란 사람이 만들었다는 최고의 칼을 만드는 기법. 탄소 함유량이 다른 두 종류 이상의 철을 단조방식으로 만든다. 철을 달궈 여러 번 접어 두드리면 물결 모양의 무늬가 생긴다. 가볍고 얇으면서도 일반 철로 만든 칼에 비해 엄청나게 강한 특성을 지닌다. 십자군 전쟁 때 위력을 발휘해 십자군을 공포에 떨게 한 가공할 무기이기도 했다. 서울 인사동 칼 박물관에 가면 과정과 실물을 볼 수 있다)의 주방용 칼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누라에게 좋은 칼을 사 주는 이유란 당연하다. 더 맛있는 음식을 해 달라는 무언의 주문이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마저 즐거움으로 바꾸라는 뜻도 담겨있다. 나이가 들면 무조건 마누라 눈치를 보는 게 상책이다. 대단한 것이야 챙겨줄 능력이 없으므로 자잘한 물건이라도 자주 상납하면 꽤 효과가 크다.


호사가 별건가. 피곤한 일상의 반복마저 자신만의 시간으로 바꾸고 한숨 돌릴 여유를 찾는 일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마저 안정의 상태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즐기는 것으로 바꾸어야 안정이다. 재료에 맞는 칼을 선택해 썰고 자르는 일조차 즐거움이 된다면 칼의 호사를 누리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덕분에 우리 집 주방 서랍은 온갖 이유로 사들인 칼로 그득하다. 마누라가 서방의 충정을 제대로 아는지 모르겠다.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차려주는 것으로 보아 크게 빗나가지는 않은 듯하다.


[한쪽으로 몇번 당기면 칼날이 바짝]


헌데 칼의 개수가 늘어난 만큼 마누라의 불만도 함께 늘어났다. 세상의 좋다는 칼도 쓰다 보면 무뎌지게 마련이니까. 칼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좋다는 칼이 왜 이래?”


한번 무뎌진 칼날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마트에서 파는 칼갈이도 이미 몇 개 사서 갈아 주었다. 그래도 마누라의 불만은 가시지 않았다. 급기야 정육점에서 쓰는 독일제 봉 샤프너까지 사서 의기양양하게 갈아본 적도 있다. 이번에도 마누라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칼 가는 일도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문제는 칼 갈아주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언제부터인가 “칼이나 가위 갈아요”라는 외침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나무통에 수동 그라인더와 숫돌을 담아 어깨에 메고 친절하게 집안까지 들어와 날을 세워주던 이들이 그립다.


생각해 보니 의아한 일이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쓰는 칼은 과연 누가 어떻게 갈아줄까? 모두 들지 않는 칼은 버리고 새 칼을 산다는 걸 알았다. 이제 칼은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된 느낌이다. 나 역시 그럴싸한 구라를 풀기는 했지만, 칼이 들지 않는다는 마누라의 볼멘소리를 들을 때마다 새 것을 사준 게 맞다.


세상의 물건이란 모두 필요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칼이 있으면 이를 가는 물건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싸구려 중국제 칼갈이의 조악함에 한두 번 속은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물건을 찾아야 마누라에게 면이 선다. 좋은 칼은 갈고 닦아 죽을 때까지 잘 써야 그 칼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독일에 들를 때마다 주방기구 파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좋은 칼은 넘치지만 칼갈이는 별로다. 그렇다면 칼의 나라 일본을 기웃거리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칼 만드는 회사가 만든 특급 칼갈이]


예상은 적중했다. 요즘 뜨는 셰프들이나 요리에 관심 많은 남자들이 선호하는 요시킨사의 글로벌(GLOBAL)칼이 있다. 요시킨은 오래전부터 칼을 만들던 회사다. 품질은 믿을 만하다. 일설에 의하면 사무라이의 후손이 차린 회사라고 하니까. 칼로 흥한 집안의 내력을 이어받아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주방용 칼을 만든다. 이 회사의 칼은 디자인이 세련된 개성적인 제품들로 가득하다. 손잡이와 칼날이 일체화된 칼이 특기다. 가볍고 날렵한 형태의 디자인과 날의 예리함으로 인기를 끈다.


유감스럽게도 GLOBAL 칼은 우리 집에 들여놓지 못했다. 이미 칼이 많기 때문이다. 관심은 칼갈이다. 비슷한 방식의 칼갈이는 이미 여러 회사의 제품이 나와 있다. 내가 써본 칼갈이 가운데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유야 뻔하다. 칼갈이의 성능이 너무 좋으면 새 칼을 살 사람은 줄어들 테니까.


GLOBAL의 칼갈이는 달랐다. 사무라이 선조의 유훈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칼이란 날을 세우지 못하면 무용지물인 것이여.” 자신이 만든 칼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은 이래서 정당하다.


다른 회사의 칼갈이는 플라스틱 몸체에 세라믹 롤러를 어긋나게 배치시켰다. GLOBAL 칼갈이라고 방식이 다를 건 없다. 유심히 보아야 차이를 안다.


GLOBAL은 몸체가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롤러를 고정시키는 금속 봉은 단단한 본체에 고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 정확한 각도로 칼날의 양면을 연마시켜주는 것이다. 잘 썰리는 칼날의 각도가 있게 마련이다. 그 각도를 제대로 지켜 갈아주면 칼날은 원래의 성능을 당연히 내는 거 아닌가. 숫돌에 해당되는 세라믹 롤러의 경도도 달랐다. 금속과 마찰해도 표면이 쉽게 닳지 않는 재료를 쓴 듯했다. 한쪽 방향으로 몇 번을 당기면 이내 날이 선다. 말로 옮기는 비결은 싱거울 만큼 간단하다. 잘 만들면 되는 것이다. 하찮게 보이는 칼갈이는 잘 만든 물건이 어떤 것인가를 저절로 알게 했다. 손끝의 감촉과 반응은 그대로 칼에 전달되어 예리함으로 보답했다. 마누라가 오랜만에 나를 칭찬해 주었다. 칼을 잘 갈아준 덕분이다. 힘들이지 않고 썰어지는 음식의 재료는 풍성한 식탁으로 돌아왔다. 마누라에게 사랑받는 법, 정말 쉽지 않은가…. ●


 


 


윤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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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