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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펄로 그래스 없앤 땅을 뒤덮은 모래 폭풍

그림 1 알렉산더 호그,'침식 2: 벌거벗은 모국',1936년.


얼핏 보면 그림 1은 황폐한 농촌 풍경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래 더미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앞에 놓인 쟁기에 의해 유린된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은 알렉산더 호그의 작품으로, 1930년대 미국 농촌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전례 없는 지독한 모래먼지 폭풍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화가는 원래 소박하지만 안락했던 농촌이 농민들의 잘못된 경작관행으로 인해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다. 왜 이 시기에 모래먼지 폭풍이 토양을 침식시키고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이른바 ‘더스트볼(Dust Bowl)’이 대대적으로 발생했던 것일까?


15세기 말 유럽인의 침입 이래 아메리카 대륙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사람과 동식물과 세균이 유라시아로부터 들어오면서 아메리카의 생태계는 전례 없는 격변을 맞았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 가운데 하나인 토지도 이런 격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버펄로 떼가 미국의 드넓은 평원을 누비던 시절, 땅을 뒤덮고 있던 것은 ‘버펄로 그래스(Buffalo Grass)’라고 불리던 풀이었다. 이 다년생 풀은 버펄로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먹이였다.


 


‘쟁기 따라 비 온다’ 그릇된 믿음에 황폐화하지만 서부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던 백인 개척자들에게는 이 풀이 가치가 없었다.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농경지였다. 미국 정부는 1862년 홈스테드법을 제정해 이주민들이 정착해 자작농으로서 농업에 종사하도록 지원했다. 이 법에 의해 개척자들은 각각 160에이커(약 65만㎡)의 땅을 제공받았다. 상대적으로 황폐한 대평원까지 경지로 개간되면서 정부는 지원을 더욱 확대했다. 1909년 확대홈스테드법은 공여 토지를 320에이커(약 130만㎡)로 늘렸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20세기 초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와 정착했다.


 

그림 2 텍사스 스트래트퍼드를 덮치는 모래 폭풍, 1935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농산물 가격이 치솟았다. 경작지를 넓힐 유인은 더 커졌다. 농민들은 깊은 쟁기질을 통해 버펄로 그래스가 가득하던 토지를 경지로 바꿔나갔다. 버펄로 그래스는 흙을 제자리에 잡아주고 습기를 머금는 능력이 탁월해 가뭄에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을 백인 농부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땅의 영양분을 보존하기 위해 휴지기를 두거나 윤작을 하는 관행도 무시했다. 일부 농민은 면화 재배를 위해 토지를 겨울 내내 세찬 바람에 드러내 놓았다. 이런 경작 방식들이 토양을 침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하락했다. 전쟁 동안 각국이 농업생산 기반을 경쟁적으로 늘렸으므로, 전후 공급과잉은 피하기 어려웠다. 또 대부분의 국가들이 보호무역주의를 기조로 삼고 있었으므로 미국 농민이 해외시장에서 이익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미국 농민들은 줄어든 소득을 만회하고자 오히려 곡물생산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곡물가격은 더 하락했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경지는 계속 확대되어만 갔다.


실상 많은 농민들은 장기적으로 낙관적 기대를 품고 있었다. 쟁기질을 통해 목초지가 경지로 전환되면 기후 자체가 농사에 적합하도록 바뀐다는 이론이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쟁기 따라 비가 온다(Rain follows the plow)'는 표현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우연찮게도 1920년대에 강우량이 풍부한 해가 예외적으로 많았는데, 이것이 이론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1930년부터 가뭄이 찾아왔다. 하늘을 뒤덮은 강력한 모래바람이 농장을 집어삼켰고, 사람들은 집안에 갇힌 채 이 ‘검은 폭풍’이 멈추기를 고대할 뿐이었다. 모래폭풍은 계속 악화됐다. 1935년에는 기록적인 더스트볼이 발생했다. 높이가 3km를 넘는 모래먼지가 무려 3000km를 넘게 이어져 동부 해안에까지 도달했다. 뉴욕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도 뿌연 모습으로 변했다.


그림 2는 1935년에 텍사스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농장과 주택을 송두리째 삼킬 듯이 휘몰아치는 모래폭풍의 가공할 위력이 실감난다. 불청객 모래폭풍은 1930년대 내내 찾아왔다. 하늘을 뒤덮은 채 몰려오는 모래먼지 폭풍 앞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35~1938년에는 가뭄이 특히 극심했다. 모래바람이 토양의 상층부를 긁어냈기 때문에 농업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텍사스와 오클라호마를 중심으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피해를 입은 경지가 무려 1억 에이커(약 40만㎢)에 달했다.

그림 3 도로시아 랭, '이민자 엄마', 1936년 촬영


인간의 무지와 탐욕이 불러 온 『분노의 포도』쟁기를 따라 비가 온다는 믿음은 전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옳았음이 판명됐다. 버펄로 그래스가 사라진 대지에서 수분을 붙잡아두는 역할을 대신할 식물은 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스트볼이 초래하는 막대한 피해를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먼지를 흡입함으로써 질병이 발생했다. 천식·기관지염은 물론이고 규폐증과 같은 심각한 폐질환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 이 ‘갈색 역병’에 가장 취약했던 어린이와 노인들은 질병으로 신음했고 목숨을 잃은 이도 적지 않았다.


농지의 황폐화와 가뭄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도 큰 고통이었다. 50만 명에 이르는 이재민이 발생했고, 300만 명 이상이 대평원 지역을 떠나 긴 이주행렬에 올랐다. 대공황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빈곤의 고통은 더욱 뼈저렸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 등장하는 것처럼 고향을 떠나 멀리 캘리포니아로 이주에 나선 ‘오우키(오클라호마 사람)’의 비참한 모습은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민자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민자 엄마'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도로시아 랭의 작품이다(그림 3). 콩 수확 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한 농장을 배경으로 찍은 이 사진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두 아이는 엄마에게 지친 머리를 기대고 있고 아기는 엄마 품에서 잠들어있다. 현실에서 일곱 명의 아이를 둔 엄마였던 플로렌스 톰슨이라는 여성의 표정은 고난스런 상황과 동시에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미국 정부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설립한 농장안전국(FSA)은 1935년부터 사진가들을 고용해 대공황의 현실을 촬영하도록 했는데, 랭도 이렇게 고용된 사진가였다. 그녀의 세심한 카메라워크를 통해 1930년대의 사회상을 상징하는 걸작이 탄생했다.


뉴딜정책을 이끈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더스트볼 시대의 농업불황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절박한 과제였다. 그는 이를 위해 여러 정책을 발표했다. 농가의 소득수준 유지를 위해 곡물과 가축의 생산량을 제한하고 이에 따른 피해를 정부가 보상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생산된 곡물·과일·돼지고기 등은 지역 구호시스템을 통해 분배되도록 했다. 정부가 1000만 에이커(약 4만㎢)의 경지를 사들인 후 초지로 전환시켰고, 토양의 침식을 막기 위해 2억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농민들에게는 토양침식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윤작법을 가르쳤으며, 버펄로 그래스를 다시 심는 작업도 진행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의 농업은 서서히 재건됐다. 세계적 곡물 과잉생산을 배경으로 발생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환경적 대재앙을 맞고서야 깨달은 뼈아픈 교훈이었다. 인간의 무지와 근거 없는 확신, 자국 우선주의와 같은 수많은 잘못이 지구 환경의 역사에 깊이 상처를 남겨 놓았다. 오늘날 우리는 이 값비싼 시행착오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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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