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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천국’ 꿈 꺾인 조광조 기리다

1 기묘사화로 유배된 정암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그를 기리기 위한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적려란 귀양살이하던 오두막집이란 뜻이고, 유허비는 기념할만한 옛 자취에 세운 비를 말한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화순군청에서 남쪽으로 10㎞쯤 떨어진 곳에 비석 하나가 서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적려(謫廬) 유허비(遺墟碑)다. 적려란 귀양살이하던 오두막집이란 뜻이다. 유허비는 기념할만한 옛 자취에 세운 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정암이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타계한 것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된 조광조는 1519년 12월 20일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는다. 사약을 받아든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관을 두껍게 만들지 말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온다. 죽음 앞에서조차도 초연한 선비의 고결함에 전율이 느껴진다. 바로 그 사약을 받은 자리라고 전해오는 곳에는 소박한 풍취의 ‘애우당(愛憂堂)’이 들어서있다. 정암에 대한 추모 작업이 이뤄진 것은 그의 사후 149년째 되던 해인 1667년(현종 8년), 능주 목사 민여로가 주도하여 비를 세웠다. 1986년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된 강당을 지었고, 영정각도 지어 영정을 봉안했다. 유배 생활을 하던 초가도 옛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는 비문 한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강오륜의 윤리를 알게하여 이적(되놈)과 금수(짐승)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암 선생의 덕택이라 하여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엄숙하게 머리숙여 공경치 아니한 이 없으니라…”


이곳은 여느 유적지와는 다르다.비운이 서린 곳이다. 지상천국 건설의 혼이 뜨겁게 불타오르다 갑자기 꺼져버린 통한의 땅이다.

2 왼쪽 초가는 정암이 유배생활을 했던 집이고 오른쪽은 영정을 봉안해 놓은 영정각이다. 김경빈 기자


세종대왕 때는 노비도 임신하면 출산 휴가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시기는 세종대왕이 다스리던 때다. 나라는 태평했고 백성들이 행복했다. 종도 임신을 하면 출산휴가를 받던 때였다. 그들은 직업이 종이었을 뿐 하늘이 내린 백성이란 점에서는 일반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세종 치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세조 때의 비극과 연산군 때의 사화로 인해 세상이 ‘지옥의 모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상사회 건설의 꿈은 연산군의 학정이 끝나고 중종이 등극하고 조광조의 등장과 함께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조광조 영정


조광조는 17세때, 종6품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 조원강이 평안도 희천에 부임하면서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만난다. 김굉필에게서 『소학』 『근사록』 등을 배우며 성리학과 도학정치에 눈떴다. 훗날 사림파의 영수로 추앙받은 정암과 한훤당의 운명적 만남은 ‘미완의 개혁’으로 남았지만 조선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정암은 평생을 나라를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섰고 실천하려 했다. 그는 천국으로 만드는 일을 지치(至治)실현으로 표현했는데, 지치란 ‘지극히 잘 다스려진 세상’이란 뜻이다. 『서경』 군진편(君陳篇)의 “잘 다스려진 인간 세계의 향기는 신명(神明)을 감명시킬 수 있다”는 말에서 따왔다.


이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천사가 될 때 가능하다. 사람들이 모두 천사가 되는 것은 정암의 말로 바꾸면 사람들이 모두 군자(君子)가 되는 것이다. 정암이 꿈꿨던 이상향 ‘지치’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군자가 되어야 실현될 수 있다.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양을 해야 하는데,이미 군자가 된 사람이 나서서 정치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군자가 되도록 깨우치는게 효과적이라고 봤다.


조선조 정치의 양대 축은 임금과 신하다. 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군자여야 했다. 정암은 이미 군자가 되어 있었으므로 임금이 군자이면 지치의 실현은 가능해진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군자, 그 중에서도 요·순시대 임금과 같은 성인(聖人)이어야 한다. 성인이라야 백성들을 군자가 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성인은 학문을 통해 가능해진다. 왕의 집무실 가까이에 경연(經筵)이라고 하는 교실을 만들어놓고 훌륭한 신하가 왕에게 교육을 해온 전통은 그래서 나왔다.


정암은 중종이 성인이 될 자질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았다. 경연에서 열심히 학문을 하면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암은 기뻤다. 이 땅을 천국, 즉 이상향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중종도 정암의 뜻을 받아줬다. 정암은 경연에서 임금을 가르치는 한편, 이상사회 건설에 저해가 되는 것은 과감하게 개혁해나갔다. 도교의 관서였던 소격서(昭格署)를 철폐했고, 혹세무민하는 이론들을 추방시켰다.


 

유허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뒷면에는 유배 내력이 기록돼 있다. 김경빈 기자


정암 열정에 염증 느끼던 중종 결국 의심정암의 이런 꿈이 한창 불타오를 때 다른 한쪽에선 검은 음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운명임을 직감한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정암을 제거하기 위한 모략의 덫을 놓기 시작했다.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중종의 학문 수련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정암을 중종 자신도 버거워하던 차였다. 궁중의 동산에 있는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써놓고 기다렸다가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따서 왕에게 보였다. 중종은 흔들렸다. ‘走’와 ‘肖’ 두 글자를 합치면 조(趙)가 된다. 말하자면 ‘주초위왕’은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정암의 열정과 과격한 언행에 염증과 두려움을 느낀 중종은 결국 정암을 능주로 귀양 보내고 그 한 달 뒤에 사약을 내린다.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개혁작업을 추진하다 되레 임금의 의심을 사 사약을 받은 정암은 당시의 심경을 절명시에 담았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했고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 했다.이 땅을 비쳐주는 저 밝은 태양이불타는 내 마음을 비춰주누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은 그만 여기서 꺼지고말았다. 신진 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사회 질서를 만들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개혁을 추진했던 이들이 정치적 경륜이 짧은 소장파가 대부분이었던데다 개혁을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이끌어온게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온 것이다.


개혁의 불길은 여기서 꺼졌지만 불씨가 아주 꺼진 것은 아니었다. 정암이 불태웠던 개혁의 불씨는 그 뒤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타올랐다.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크고 작은 불길이 이어졌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불길이 타올랐다. 정암의 개혁은 ‘미완’으로 남았지만 훗날 그를 기리는 후학들에 의해 그 정신이 계승되고 전해져오고 있다.


정암은 사후 선조때 신원돼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능주에 죽수서원이, 희천에 양현사가 세워지는 등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과 서원이 세워졌다. 이이는 정암을 김굉필·정여창·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칭송했다.


 


이기동성균관대 동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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