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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중공군 ‘당나라 군대’가 아니었다

1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의장대 모습. 참전 이래 중공군은 날카롭고 정밀한 작전 능력을 선보였다.


피 바람이 늘 번졌던 대지, ‘전쟁과 중국’은 중국의 인문을 이야기하면서 결코 비켜갈 수 없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중국인은 싸움을 잘 할까. 수많은 전란이 빗발치듯 닥쳤던 땅의 사람들이니 중국인들은 전쟁을 잘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 그럴까를 두고서는 조금 망설여지기도 한다.


중국은 120여 년 전 제국주의의 꿈을 안고 부상하던 일본과 벌인 싸움에서는 졌다. 이른바 청일(淸日)전쟁이다. 앞서 벌인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도 졌고, 일본의 중국 침략 뒤 벌어진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도 졌다. 오죽하면 ‘당나라 군대’라는 비아냥거림이 생기기도 했을까. 그러나 ‘당나라 군대’는 기운이 크게 쇠퇴하고 있던 청나라 말이나 국민당 시절의 중국 군대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아울러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의 조소(嘲笑)가 스며든 언어다. 청나라 말과 국민당 시절의 중국 군대는 권력 상층의 무기력함과 부패, 무능으로 얼룩진 상태였다. 따라서 중국이 지닌 ‘싸움의 테크닉’을 읽기에는 어딘가 부적절하다.


이번에는 공산당이 이끌었던 전쟁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자. 왕조의 긴 역사를 마감하고 현대에 접어들어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중국의 군대는 어떨까. 어엿한 민족과 국가 형태의 몸체를 지니고 나선 중국의 군대 말이다. 우리는 그런 중국의 군대와 아주 격렬한 싸움을 벌인 경험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이 전격적으로 벌인 남침으로 한반도는 냉전 이후 처음 동서 양 진영이 벌인 참혹한 전쟁터로 변했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후원, 한반도 적화 야욕으로 눈이 먼 김일성의 도발로 시작한 전쟁은 세계 현대 전사(戰史)에서 손으로 꼽을 만한 참극이다. 보통은 김일성에 의한, 김일성의 전쟁으로 6·25를 생각한다. 그러나 김일성 군대는 전쟁 초반 3개월 정도의 주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2년 9개월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공산 진영을 대표한 군대는 중공군이었고, 김일성의 군대는 그저 ‘액세서리’였다.

2 1951년 중공군 춘계 공세 때 무너진 많은 한국군들이 중공군 포로로 잡힌 뒤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 중공군은 뛰어난 전투력으로 한국군을 ‘먹잇감’으로 선택해 집중 공격을 벌였다. [사진 해방군 화보사·중앙포토]

중공군 부사령관 덩화(鄧華). 6·25전쟁 참전 뒤 실질적인 중공군 전략과 전술을 주도한 인물이다.


중공군이 2년9개월 동안 전쟁 이끌어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 무렵에 압록강을 넘었다. 이어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으로 꼽혔던 미군을 대상으로 집요한 싸움을 수행했다. 청나라 말엽에 드러냈던 왕조의 무능과 부패는 더 이상 없었다. 대신 강력한 조직력과 기율로 무장한 중국 공산당이 싸움을 이끌었다.


따라서 우리는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으로부터 중국인이 지닌 ‘싸움 테크닉’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겉만 그럴 듯하게 무장한 청나라 군대에 비해 전쟁의식으로 확고하게 무장한 지도부가 있었고, 병력의 전열 또한 튼튼하게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군…. 우리는 6·25에 참전했던 이들을 흔히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용어로 먼저 인식한다. 오로지 사람 수만 내세워 상대를 공격하는 원시적인 군대로서 말이다. 그러나 전쟁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에게 이 용어는 매우 치명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6·25의 중공군은 매우 탁월한 싸움 솜씨를 뽐냈다. 전략에서도 밀리지 않았고,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미군이 주축을 이룬 16개 연합국의 군대를 넘어설 때가 많았다. 당시 한반도는 ‘현대’라는 타이틀을 걸고 사회주의 국가로 등장한 전통의 중국이 세계를 향해 처음 싸움 기술을 선보인 무대였고, 그들은 참전 초반부터 매우 경이로운 싸움의 방식을 자랑했다.


우선 ‘인해전술’은 중공군이 선보인 싸움의 방식 중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들은 ‘밤의 군대’로도 불렸다. 늘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타고 들어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매복과 우회·포위에도 매우 능했다.


‘인해전술’은 어둠 속으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군대에 겁을 집어 먹은 미군들의 두려움을 반영한 용어에 불과했다. 중공군은 밤안개처럼 스며들어 계곡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전격적인 기습을 감행하는 데 아주 능했다. 어둠 속에서는 피리와 꽹과리를 불고 쳐댔다. 그런 분위기는 마치 ‘무당집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는 게 당시 전쟁터에 섰던 한국군 참전자들의 한결 같은 증언이다.


중공군은 무기 체계와 현대전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장비와 화력, 공병(工兵) 동원 등에서는 미군이 주축을 이룬 연합군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아울러 공중 화력에서는 미군의 탁월함에 아예 견주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중공군은 집요한 싸움을 이어갔다.


 


인해전술은 싸움의 방식 중 극히 작은 부분중공군 참전과 그 뒤의 작전을 모두 지휘한 마오쩌둥(毛澤東)과 펑더화이(彭德懷) 등 수뇌부는 수백만 명의 중공군을 이렇게 묶었다.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保家衛國)’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지키자(抗美援朝)’라고 말이다. 그러고서는 참전한 중공군의 성격을 의용병(義勇兵)으로 포장했다. 미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참전한 군대라는 정의(定義)였다. 가정 보호, 나라 지키기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 참전한 민간 부대로 스스로를 규정한 셈이다.


이는 당시 한반도 전쟁을 서방의 침략으로 몰고 가려는 고도의 전략적 위장(僞裝)이었다. 아울러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북진 행렬에 맞서 아주 높은 수준의 전략을 구사했다. 평안북도와 함경북도 일대에 덫을 만들어 미군을 유인했고, 미군 포로를 수시로 풀어주면서 ‘중국 군대는 곧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흘려 맥아더 사령부의 판단을 흐리기도 했다.


1950년 10월 말부터 그 해 12월 중순까지 벌어진 전투는 중공군의 일방적인 승리에 가까웠다. 압록강에 도달해 태극기와 유엔기를 꼽고 승리를 선언하려던 아군의 발길은 도중에 끊겼다.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미군의 많은 병력이 목숨을 잃었다. 그보다 허약했던 한국군은 2군단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참패에 직면했다.(국방부 편. 『6·25 전쟁사』, 2013)


얼마 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가 나올 예정이다. 세계적인 영화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역을 맡았다고 해서 벌써부터 화제다. 내용은 영화를 개봉해야 알 수 있겠으나, 당시 중공군의 노련한 전법(戰法)을 무시해서는 정말 곤란하다.


국가 단위로 벌어지는 현대의 전쟁은 나라의 힘이 모두 모이는 곳이다. 병력과 화력, 장비의 능력에 더해 그곳 사람이 지닌 인문과 문화의 역량도 뭉쳐져 힘을 행사하는 계기다. 따라서 6·25전쟁 참전과 전쟁 수행 능력은 현대 싸움에 관한 중국의 총체적인 역량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당시의 중공군은 참전 뒤 곧바로 벌어진 1~2차 공세에서 맥아더가 지휘하는 연합군 병력의 기세를 꺾으면서 곧장 평양을 탈환했고, 이어 3차 공세에 나서 서울까지 점령했다. 아군에게는 수도 서울을 다시 내줄 수밖에 없었던 ‘1·4 후퇴’였다.


중공군이 벌인 2차 공세에서 미군은 2개 연대가 서부 전선에서, 1개 해병사단이 동부 전선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한국군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2군단이 무너진 뒤 예하 2개 사단의 사단장이 제 병력을 놔두고 먼저 서울로 내뺐다가 길거리에서 헌병에게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은 일도 있었다.


그 뒤 체력을 보강한 미군에게 중공군은 여러 차례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한국군에게 중공군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공군은 미군 등에 비해 체력이 허약한 한국군을 ‘먹잇감’으로 골라 공격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6·25전쟁 참전 뒤 중공군이 보인 전략과 전술의 핵심이 궁금하다. 다양한 면모가 있겠으나, 크게 보면 기만(欺瞞)과 우회(迂回), 기습(奇襲)과 포위(包圍)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중국 전통의 병법과 흐름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부터 장구한 흐름을 거쳐 도달한 『삼십육계(三十六計)』까지의 도저한 병가(兵家) 전통 말이다. 이는 무기와 화력·장비 등에서 매우 큰 열세에 있던 중공군이 세계 최강의 미군을 맞아 제법 긴 시간을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저력(底力)이라고 볼 수 있다. 맥이 풀린 ‘당나라 군대’도 아니었고, 왕조 권력의 무능과 부패로 군기가 사라진 ‘청나라 군대’도 더 이상 아니었다.


 


한국군은 2개 군단 무너지는 참패 당해강력한 기율로 묶이기만 한다면 중국의 군대는 장구한 병법의 전통에 의지해 매우 노련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 상대다. 무기와 화력 등에서 절대 열세에 있었지만 중공군은 그렇게 원숙한 싸움을 벌여 미군을 당황케 했다. 한국군은 그런 중공군에게 전체 전쟁 동안 2개 군단이 무너지는 참패를 당해야 했다.(육군본부 편. 『현리-한계 전투』, 2009) 중공군이 쳐들어오면 한국군은 “밥을 먹다가 숟가락까지 팽개치고 달아났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국방부 편. 『금성전투』, 1987)


중공군의 정식 명칭은 인민해방군이다. 미국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키워 화력과 장비 등에서 이제는 더 이상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다. 아울러 6·25의 중공군이 보였던 화려한 병법과 모략의 전통도 지니고 있는 상태다.


그런 중국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다. 중국 대륙과 연륙한 한반도의 거주민으로서는 그런 전통을 지닌 중국의 굴기를 경이와 찬탄의 시선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싸움을 수행하는 방식의 다채로움, 그를 이끄는 모략의 길고 먼 시야, 전술과 전략의 다양한 변주(變奏)를 가능케 하는 병법의 장구한 전통 등과 함께 중국을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얘기다.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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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